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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생명과 환원주의

4. 환원론적 시각과 세계에 대한 무관심

by 격암(강국진) 2010.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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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

 

앞의 글에 이어서 이번 글에서는 환원론적 시각이 어떻게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만들어 내는 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비과학적인 신비주의를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사실 과학에 있다기 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많은 것을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데이터 몇개 만으로 어떤 결론을 과학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환원론적 시각과 세계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주제로 돌아와 봅시다. 사람들에 따라 이해는 조금씩 다르지만 어떤 전체를 그것의 부분들과 그 부분들 사이의 관계로 정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환원주의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 부분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의 관계는 임의적이고 우연한 것들입니다. 집이 벽돌로 이뤄져 있다면 부분은 벽돌이지만 벽돌들 사이의 상대적 위치가 벽돌들간의 관계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벽돌로 만든 집을 벽돌과 벽돌 사이의 관계로 설명하거나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원자들과 원자들간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유물론이나 생물학이 화학으로 환원될 수 있고 화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듯이 언젠가는 인문학도 자연과학의 일부로 환원될거라는 생각이 모두 환원주의적인 생각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세상에는 환원주의가 있고 비환원주의가 있는 것처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비환원주의가 무엇인지, 그런게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는 말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도 그것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논리라던가 설명따위가 모두 환원론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언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문장이 가지는 의미는 단어들과 단어들간의 관계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문장의 의미자체가 환원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비환원론적인 것에 대해 언어로 기술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모두가 아니라면 적어도 상당부분이 환원론적인 셈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 자체가 환원론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환원주의적인 것은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이것이 비환원론적인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환원주의적 사고의 특징과 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환원주의적 사고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원주의적 관점의 한 예로 자동차의 이해를 생각해 봅시다. 자동차는 여러가지 부품내지 여러가지 부속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차체, 바퀴, 동력축, 엔진, 기름통, 전기계통등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지요. 이렇게 전체를 작은 부분들로 나누고 각각을 이해한 후 다시 그걸 합쳐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환원론적 시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체를 부분으로 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가지 전제조건을 도입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각각의 부분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타이어가 없다고 엔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엔진이 고장난다고 타이어가 터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기까지는 타이어라고 부르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엔진이라고 부른 후에 각각의 부분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관계는 그렇지 않죠. 위가 없는데 아래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전체를 어떤 한 무리의 부분들로 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 부분들은 하나의 블랙박스처럼 보게 됩니다. 즉 그 부분들도 더 나눠서 다시 더 작은 부분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면 더 작은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무한히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동차의 한부분을 가르켜 엔진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엔진은 방대한 세부구조를 가진 복잡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다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분과의 관련을 이야기할 때 그 세부구조는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엔진의 원리따위를 몰라도 운전은 할 수 있죠. 중요한 것은 엔진에 어떤 입력을 넣었을때 예를 들어 악셀패달을 밟았을 때 어떤 출력이 엔진으로부터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특성을 이해했다면 운전자에게는 그 안의 내부구조는 잠정적으로 블랙박스로 남아있어도 좋습니다. 타이어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이어의 내부구조는 세부사항입니다. 타이어의 재료과학을 이해하지 못해도 타이어를 쓸 수있고 팔 수 있고 설치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이어가 정해진 기능을 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필요하지 않으면 우리는 타이어를 다시 세분해서 그 내부 구조를 탐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부분의 독립적 존재는 대개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애초에 전체를 그런 부분의 합으로 생각하는 것이 인간 사고의 결과입니다. 화병의 윗부분을 여기서 여기까지라고 정의했기에 나머지 부분이 화병의 아랫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는 임의적이고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분은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좋은 근사일뿐 무한히 옳은 것은 아닙니다. 타이어는 닳아서 없어집니다. 쇠도 조금씩 깍여나갑니다. 우리가 바다에서 파도라고 부르는 것은 시간적 간격이 짧은 때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두가 흐르고 사라지는 물이죠. 그런데 그 일부에는 이름을 붙이고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다른 것들은 이름을 주지 않습니다. 

 

전체를 어떤 부분들과 그 부분들의 관계로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입니다. 우리가 전체를 그런 부분들로 해체하는 것을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그 패러다임에 빠져서 다른 해체방법과 다른 관계를 보기 힘들어 집니다. 마치 우리의 사고가 우리의 언어의 지배를 받듯이 우리는 그 패러다임속에서 사고하므로 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한한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의 사고도 유한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에 확실한 존재로 보이는 것들도 사실 더 넓은 초인간의 세상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주는 충격을 통해 이것이 실재로 그렇다는 것을 20세기에 확실히 경험했습니다. 양자론의 세계는 일상의 상식을 초월하니까요. 여러분의 손에 딱딱하게 만져지는 의자가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허구라는 겁니다. 우리의 의자에 대한 이미지는 고전역학적이죠. 

 

우리의 사고는 환원주의적이며 그 패러다임은 변합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고 그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은 통상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하나의 패러다임은 마치 도로교통법처럼 설사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바꾸지 않도록 권장됩니다. 모두가 한국어를 하는데 혼자서 독일어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논리적 시스템 안에서 그 체계는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수소원자는 이런 뜻이라고 알고 있는데 혼자서 수소원자란 다른 것이라고 은근슬쩍 고쳐 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그 점을 지적하고 그걸 하자고 제안해야 하는 것이죠. 질량이라거나 속력이라거나 산소원자라거나 온도라거나 하는 단어를 썼다면 그 단어들은 하나의 문제에 과학이론을 적용하는 동안은 본래의 의미를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 정밀함이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정의의 엄밀함이 사실은 과학과 공학의 힘의 근원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과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예술은 이와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 문학작품에서 어떤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중의적이거나 대중적으로 쓰는 의미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시인이나 철학자의 언어는 상당부분 아주 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예술은 환원주의의 폐해를 더 쉽게 피할 수 있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했을 때 큰 피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정성적으로는 문학과 물리학이 설사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해도 적어도 정량적으로 엄밀함의 정도는 과학과 예술에서 분명히 크게 차이가 납니다. 진정한 과학은 아주 엄밀한 테스트를 거친 후에야 과학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칼 포퍼는 미래를 예언하는 사회과학을 유사과학이라고 부르며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성공적인 사고의 패러다임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적입니다. 학교에서 늘상 배운 것은 사실 모두 환원주의적 사고의 훈련입니다. 학교에서 교과목을 국어 영어 수학따위로 나누는 것 자체가 환원주의적이니 학교의 구조자체도 환원주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를 부분들과 그 관계로 보는데 익숙하고 어떤 것이 잘 이해가 안되면 보다 더 작게 대상을 나누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더 근원적인 환원론적 이론을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를 기술하는 어느정도 만족스러운 설명이 나온다고 느껴지면 거기서 생각을 멈춥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합리적인 존재로 여깁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분리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분양 아파트에 사는 사람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때로 매우 자연스러워 보일지 모르나 그런 구분은 당연하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을 상류층, 중산층, 빈민층으로 구분하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일지 모르나 그런 구분은 당연한게 아닙니다. 우리는 학교를 1학년에서 6학년으로 나누고 사람들을 교사와 학생으로 나누며 한 학년은 각각의 반으로 나누고 한 반은 다시 각각의 사람들로 나눕니다. 가정은 부모와 자식으로 나누고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며 사무실 안의 직원들은 팀장과 팀원으로 나눕니다.

 

우리가 이런 구분이 당연하고 가치 중립적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명확히 정의될 수 없는 존재들이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남는 것은 이름표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사고 남자고 한국인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고 그런 이름들을 알면 그 사람에 대해 다 알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름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지 못하게 됩니다. 

 

환원론적 시각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나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 사라지게 만듭니다. 부분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관계는 임의적이고 변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변하지 않는 관계를 우리는 법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법칙때문에 우리가 어떤 학생의 성적은 이렇고 성격은 이렇고 운동능력은 이렇다라는 몇가지 사실을 알아내면 우리는 마치 그 학생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미래도 아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변화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는 뉴튼 물리학도 가지는 특징입니다. 뉴튼물리학에서도 자연법칙때문에 지금의 초기조건을 알면 그 과거도 미래도 이미 결정되어져 있다고 말하죠. 우리는 비슷한 논리에 따라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들을 습득하고 나면 이제 그 대상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다 알것같다는 느낌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다 아는 대상에 대해서는 흥미가 있을 것이 없겠죠. 

 

환원론적 시각에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사람들을 나와 분리된 객체로 인식합니다. 즉 그 사람들의 환경인 내가 어떻게 하는가가 그들을 바꾼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마치 내가 기계처럼 같은 입력을 하면 항상 같은 출력을 주는 존재로 사람들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동떨어지게 정의되고 파악되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나와 세상은, 나와 저 사람은 당연히 분리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행동은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독립된 특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생님과 친구와 부모님과 동생과 형과 누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래 그들이 내게 해주는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응당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던 엄마가 그렇게 못하는 날이 있으면 화를 낼뿐입니다. 나는 학교를 다니고 정해진 성적을 받아올만큼 내 할일을 했으니 정해진 입력을 한것인데 그들은 정해진 출력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불량부품이라는 이야기밖에 안됩니다. 그 내부적 사항은 관심밖입니다. 사회는 불량부품이 되는 것은 죄악이라는 말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의 불량부품이 전체 자동차를 세우는 해악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몫을 해야 한다고 사회는 외칩니다. 

 

좋은 사람뿐만 아니라 나쁜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못된 친구들, 못된 어른들, 못된 동생들, 못된 이웃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래 그렇게 못되게 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그들을 불량품이라고 부르면 모든 것이 분명해 집니다.  불랙박스처럼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들이 정해진 입력과 출력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처분은 분명해 집니다. 바로 폐기 처분과 부품 교체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는 불량한 동네, 불량한 계층, 불량한 지역, 불량한 나라, 불량한 인종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지금과 같은 것에 거의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는 독립되어 존재하는 이 세상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은 모두 연결되어진 사건들의 균형의 결과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남의 일과 내일은 따로 없습니다. 어느 반에 불량학생이 하나 있다는 것은 그 학생의 문제인만큼이나 다른 학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불량학생과 그 환경간의 조합이 그런 일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은 더이상 불랙박스로만 채워진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붙여진 이름을 넘어서 선입견을 넘어서 고정된 시각을 넘어서 세상을 보고 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가를 느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지금과 같은 것은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혁명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면 됩니다.  

 

기계적 시각에 빠진 사람이 삶에 대한 지루함에 빠지기 쉬운 반면 생물학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지루함에 빠지기 어려울 것입니다매일 마다 같은 자리에서 뜨는 태양도 이제 같은 태양이 아닙니다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기 때문입니다내가 다르다면 태양도 달라질수 밖에 없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하루 하루를 새롭게 살아갈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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