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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사랑과 사랑하기, 삶과 살아가기

by 격암(강국진) 2010. 2. 2.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현대인들이 소유의 형식에 점점 물들어 명사형의 말을 많이 한다고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나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나 당신에게 내 사랑을 보냅니다는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다. 

 

동사는 주어를 필요로 한다. 즉 사랑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사는 홀로 존재한다. 주어가 없어도 된다. 의자나 침대는 무엇무엇이 의자하다의 명사형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방향으로도 추상적 사고를 할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된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던가 훌룡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던질때 우리는 그것을 명사로 보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보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게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하는 나 만큼이나 그 사랑의 대상이 되는 그녀와의 관계도 중요한 것이 아닐까? 두사람이 추는 볼륨댄스를 생각할때 파트너가 어떻게 춤을 추는 가에 상관없이 진정으로 최고의 춤은 무엇인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둑을 두면서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바둑을 두는가를 무시하고 최고의 한수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할수 있을까?

 

이렇게 무언가를 명사형으로 볼때, 우리는 마치 조립식 장난감을 만들듯이 그것을 본다. 훌룡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여러가지 부품을 가져다가 하나의 이상적 삶을 조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삶이 어떤 환경에서 가능하며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무시하거나 너무 단순화한다. 

 

훌룡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같은 문제를 생각할때 우리가 또하나 범하고 있을수 있는 중대한 문제는 우리는 설계도에서 제품이 나오는 논리적 사고에 너무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연필을 하나 만든다고 하자. 우리는 연필이란 나무 조각안에 연필심이 들어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물건을 만들기 위해 어떤 나무가 필요하며 어떻게 나무조각을 자르고 흑연으로 연필심을 만들어 넣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연필을 하나 만들어 낼 수가 있을것이다. 

 

이렇게 전체적인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고 그걸 만들어 내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나열해서 재료로 부터 완제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우리는 매우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뭘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믿을수 없는 보기 드문 우연의 결과로 신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한 우리는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에서 모두 실패하고 만다. 예를 들어 인생같은 길고 복잡한 것을 하나의 드라마를 짜듯이 이렇게 저렇게 이해하고 시간대에 따라 적당한 것을 집어넣고 설계해서 완성하려고 하는 시도는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지만 아무 쓸데없는 일이다. 인생은 결코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설사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진짜 계획대로가 아니다.

 

대학은 이런 곳에 가고 취업은 여기를 하고 결혼은 이 나이에 이런 사람과 하고 하는 계획을 세워서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 그는 그가 상상한 멋진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아마 세세한 계획을 세워 그것을 모두 성취하는 기적을 이뤘다고해도 마치 남이 살았던 인생의 재방송을 보는 것같은 느낌으로 그리 즐겁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엉성한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실천했다면 계획된 부분은 계획대로지만 그 이외의 부분은 바로 그 계획된 부분에 온통 희생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 희생도 계획했던 것인가? 

 

계획대로 되느냐 안되느냐의 진짜로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인생이 뭔지를 전부 이해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능한가하는것이다. 30살쯤이 되면 우리는 인생이 뭔지 다 알아서 50살이나 70살때는 이렇게 사는 게 최고라는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가? 다시 말해 인생에는 설계도가 있을수 없다. 그러니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다고 한들 그것이 '최고'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우리의 가치판단은 계속 바뀐다. 한 시기의 가치판단이 고정된 진리일 수 없다. 

 

이유가 뭐건 현실적으로 우리는 인생을 이해하고 그것을 조립할수 없다. 인생을 정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연필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재료를 뒤적이며 연필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자전거 타기가 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쓸 수 없어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 우리는 왜 아침의 해뜨는 장면이 아름다워보이는지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일출장면을 즐길 수가 있다. 우리는 사랑의 본질이 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한쌍의 연인으로 살 수 있다. 

 

모든것을 위에서 말한 연필만들기처럼 논리적으로 이해한 뒤에, 정의된 뒤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오히려 멈춰버린다. 우리는 우울해지고 공포에 떤다.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게 없기 떄문이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정적인 것이라기보다 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며 태도의 문제다. 하나의 피리가 아름다운 음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안에 불어넣어질 공기와 피리를 조작하는 손에 더 많이 달린 것이다. 

 

하나의 아름다운 가족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 딸들의 문제는 아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다른 가족에게 달린 만큼이나 다른 가족의 행동이 아버지의 행동을 결정한다. 우리는 멋진 못하나를 들고 아름다운 집을 상상할 수는 없다. 보잘것없고 작은 못도 적재적소에 쓰이면 멋진 집을 만들것이며 큰 못은 불필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호조화와 관계다. 

 

살아가는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흐름을 타고 흔들려 나가는 것에 더 가깝다. 무슨 바람이 내일불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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