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일본 미국 이스라엘

이스라엘 이야기 1, 예루 살렘

by 격암(강국진) 2010. 2. 19.

초등학교 때 우연히 교내 과학경시대회에 나가서 2등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서울 시내 어딘가에 가서 과학실험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2등한 게 기쁘지는 않았다. 1등 못한 게 분했다. 당시는 내가 1등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과학자를 꿈꾸던 소년이긴 했지만 그 분한 마음이 없었으면 과학을 전공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나중에 보니 정작 그때 1등한 아이는 법대에 갔다. 

 

제임스 코울먼의 상대성이론이란 책을 나는 중학교시절에 많이도 읽고 읽었다. 그렇게 여러 번 읽었던 이유는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갈때까지 결국 특수 상대성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잘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열심히 여러 번 읽은 탓이었는지 나는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때도 물리 점수가 아주 좋았다. 내가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게 있어 아주 당연한 일이 되었다. 

 

물리학을 전공하던 대학교 4학년 때 나는 하임 솜폴린스키라는 사람이 쓴 논문을 소개 받았다. 나는 그 논문을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그 논문을 읽은 이후 내 관심은 입자 물리학에서 인공지능과 뇌과학 같은 주제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머리에 쥐가 날만큼 지긋지긋하게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하는 연구를 했고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학과공부보다 그 계산에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연구가 나중에 결국 박사 학위논문으로 이어졌다. 

 

만약 그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다면, 만약 상대성이론에 대한 책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그 논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미래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랬더라면 나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엔 평생 가볼 이유가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1999년 9월, 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루 대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 바로 그 하임 솜폴린스키 교수에게서 박사 학위를 마치면 같이 연구하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은 것이다. 나는 아내와 아직 돌이 되지 않은 딸, 예나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가는 비행기를 탓다. 

 

낯선 땅이다. 나는 이 곳의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이스라엘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나는 중동지역을 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었다. 어떤 사회에 대한 경험과 느낌은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이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형식으로 그 사회를 접하는가에 크게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혼의 몸으로 외국에서 연구 생활을 하는 것은 가족과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가족이 없으면 그 사회와 상당히 분리된 관광객처럼 살게 된다. 그러나 가족이 있으면 원하던 원치 않던 그 사회에 섞여들고 그 사회의 내부사정에 더 많이 의존하며 살게 된다. 일단 알고 지내게 되는 사람들과 행동 반경이 전혀 다르다. 훨씬 많은 것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첫인상은 건조함과 눈부심이었다. 예루살렘은 바싹 말라있었다. 바닥을 걷어차면 먼지가 풀썩인다. 그 푸석한 땅을 보니 왠지 앞길이 험난할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 때문에 우리 아파트의 앞길은 눈이 부시게 빛났다. 햇살이 강렬해서 땅이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땅이나 나무에 손을 오래 대고 있으면 풀향기나 나무즙이 손에 밸 것 같다거나 땅냄새가 밸 것 같은 한국의 느낌과는 다르다. 벽에 오래 손을 대면 뜨거운 돌의 열기만 느껴지거나 돌가루 먼지만이 손에 묻어난다. 집 앞에 작은 놀이터가 있는데 그것도 온통 시멘트로 만들어 놓았다.  미끄럼틀도 순전히 시멘트로만 만든 것이다. 아마도 쇠로 만들면 너무 뜨거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물을 자주 마시라는 충고를 받았다. 뜨겁고 건조한 날씨에서는 모르는 사이에 수분을 많이 잃어 탈수증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극동아시아로 불리는 중국이라던가 일본 한국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매우 드물었다. 그 전에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몰라도 중국인은 세계 어디 가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우리가 예나를 데리고 예루살렘 거리로 나서거나 쇼핑몰을 돌아다닐 때면 너도 나도 신기하게 생긴 아기라며 말을 붙여서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사진 좀 찍으면 안 되는가, 한번 안아봐도 좋은가 하고 연신 부탁을 했다. 

 

이스라엘에는 일본 중국 한국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한국 음식을 만들 재료도 없었다. 돼지고기 같은 것은 종교적 이유로 팔지도 않아서 훗날 특별한 경로로 구할 수 있기 전에는 먹을 수도 없었다. 이스라엘에서는 많은 요리를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농담 삼아 때때로 지인들에게 말한다. 이스라엘식 한국요리는 요리단계의 첫번째가 틀리다고 말이다. 한국에서 콩나물국을 끓인다면 요리의 첫 단계는 콩나물을 끓는 물에 넣는다던가 파를 썬다가 될지 모른다. 이스라엘에서 콩나물국을 끓이는 순서는 이런 식이다. 첫째, 콩을 구한다. 둘째, 콩나물을 키운다. 쑥갓을 넣은 된장국을 끓이고 싶다면 이렇다. 첫째, 들로 나간다. 둘째, 쑥갓을 뽑는다. 모든 걸 처음부터 해야 한다. 우리는 사실 콩나물을 키우거나 들에서 쑥갓을 뽑아 오기까지는 않았지만 그런 한국 사람은 종종 있었다. 사람들은 어찌저찌 방법을 개발해서 떡국도 만들어 먹고 김치도 담궈먹는다. 채소 씨를 뿌리고 떡 만드는 기계도 사오고 해서 그렇게 한다. 삼겹살도 어디선가 누군가 구해온다. 쑥갓도 뽑아오고 콩나물도 키운다. 그렇게 해서 만들고 구한 것을 서로 나눈다. 마치 작은 한국같다. 사람들이 낯선 곳에서 뿌리박고 사는 모습을 보면 참 대단하다.

 

대민서비스는 어디나 매우 좋지 않았다. 은행에 가도 슈퍼에 가도 관공서에 가도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무능하고 불친절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은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었다고 했다. 노동력이 넘쳐나서 허드렛일도 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한국과는 다르기 때문인가 보다.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적응해 있던 나에게 그들은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한국같으면 그들은 전부 해고감일 것 같다. 

 

나는 중고차를 샀다. 그런데 그 차를 등록하기 위해 차량 등록소를 10번을 방문해야 했다. 그건 물론 기본적으로는 내가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거기서 일하는 공무원은 전혀 도움이 되질 못했다. 오히려 내게 혼란만 줄 뿐이었다. 그는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거기 있다기보다는 국민들에게 봉사를 받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등록과정에 대해 그는 잘 알고 나는 잘 모르는데 내가 겪을 수 있는 곤란함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고려도 없었다. 같은 곳을 5번을 오건 10번을 오건 그게 얼마나 시간이 걸리던 그건 내일이 아니라는 태도였다. 

 

슈퍼에서 줄을 서면 반드시 계산하는 사람이 뭔가 문제를 일으켜서 줄은 멈춰서고야 만다. 나는 슈퍼점원이 그렇게 무능할 수 있다는 것을 거기서 처음 알았다. 해결은 시간이 걸렸다. 때때로 싸움이 났다. 점원은 무능하고, 따지는 사람들은 뒷사람이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항의하며 소리라도 치게된다. 나는 그저 무력하게 뒤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은행은 요일마다 시작하고 끝나고 중간에 휴식하는 시간이 다 달랐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헛걸음을 해야 했다. 은행창구직원은 왜 거기 앉아 있는건지 모를 정도로 업무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뭐하나 물어볼 때마다 결국 상위 관리자에게 왔다갔다 해야 했다. 적어도 당시에는 한국사람이 일처리해 주는 것과 비교가 안 되게 서투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가득했다.  

 

사방에 검문소가 있어서 검문을 받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쇼핑몰에 가도 검문을 받아야 하고 특히 공항에서의 검색은 악명이 높았다. 당시는 쌍둥이 건물 테러 이전이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공항검색이 크게 강화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런 검색이 매우 낯설었다. 한국사람들이 모여서 공항 검색 이야기를 하면 간단히 밤을 샐 수 있을 거라고 한 목사님은 내게 자신있게 말했다. 

 

노트북 컴퓨터 안의 파일을 전부 검사하고 보내줄 테니 노트북 컴퓨터를 놓아두고 출국하라는 경우부터 태도가 불량하다고 알몸으로 검색을 받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다양하다. 검색요원은 질문도 많이 하는데 이 질문이란 게 종이 위에 써 있는 걸 순서대로 하는 것이라 답을 하다 보면 짜증이 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방문목적이 뭐냐고 해서 형을 만나러 왔다고 하면 좀 있다가 누굴 만나러 왔냐고 묻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이미 답을 말했으므로 짜증이 난다. 그런다고 빈정대면 검색은 더 길어진다. 잘못하면 조용한 후미진 방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그러니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긴 질문이 끝나면 한번 더 참아야 하는 것이다. 질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일관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 질문지의 질문을 두세 번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많이 거칠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주 자주 듣는 두 가지 말이 있었다. 하나는 친구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나 오, 내 친구여 하는 식으로 친구라며 불러대는 사람이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또 한결같이 나에게 해 주는 말이 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다 도둑놈이니 믿지 말라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는 친구라고 말하고 모두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다 도둑놈이라고 말하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믿음의 성지로 유명한 예루살렘은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에 가득차 있었다.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사는 유태인들도 팔레스타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국사람들보다 훨씬 격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싸움도 사방에서 잦았다. 앞차 빨리 가라고 크랙션 울리는 사람, 양보 안 해준다고 창 열고 싸우는 운전자들이 사방에 흔했다. 항의하고 자기의 권리를 열심히 찾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적당히 물러나는 내가 왠지 바보같이 보인다. 이러니 실제로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을 통해서 뭔가를 처리하지 않으면 사기를 당하기 쉬워 보였다.

 

물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이 이스라엘에서 살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정보를 주고 자기집에 초대도 해주고 같이 여행도 갔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어려움을 공유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친절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한국 사람의 도움도 받았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움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 다른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는 말도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어수룩한 외국인이 어디 가서 사기라도 당할 것을 걱정해 주는 친절에서 나오는 말이었을 것이다. 

 

유태인들은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매우 뛰어난 기술이 있는 것 같다. 지금 와 돌아보면 유태인들이 모이는 모임에는 항상 유머가 있고 웃음이 있다. 그들은 모임을 가지고 파티를 하고 식사 초대를 해서 다른 사람을 접대하는 데 매우 능숙하다. 유태인은 솔직하고 거침없이 말을 한다. 그래서 그런 것 때문에 분위기가 딱딱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유머 감각이 항상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든다. 유태인은 낙천적이고 매우 사교적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용한 분위기 혹은 썰렁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한 사람이 왕처럼 주도권을 잡고 다른 사람은 그저 이야기를 듣는 그런 분위기는 보기 힘들었다. 농담을 하든지 강력하게 의견을 주장하든지 해서 왁자지껄하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으면 사는 맛이 나지 않는 다는 식이다. 쾌활한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에는 몇백 명 정도의 한인 사회가 있다. 상당수는 목사나 전도사로 종교에 관련되어 유학을 온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이다. 한국에서 성지순례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여행가이드를 부업 삼아 혹은 주업처럼 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갑자기 환율 불안이 일어나서 여행이 줄거나 하면 이스라엘 쪽의 한국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다. 한인이 얼마 안 되는 나라에 가면 한국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해 보인다. 사람이 넘쳐나서 사람이 덜 중요하게 느껴지는 곳이나 모든 것이 그저 풍족하기만 해서 작은 것을 나누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곳에서는 그런 곳의 삶이 가끔 그립다. 

 

이스라엘은 어떤 면에서는 척박한 땅이며 무력분쟁으로 얼룩지고 여러 가지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땅이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게는 대단해 보였다. 그들이 가지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그들의 나라에 대한 사랑과 유머감각과 낙천주의가 모든 나쁜 환경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좋아질거라고 믿으며 살기 좋은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가능한한 낙천적으로 살아나가는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