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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 미국 이스라엘

이스라엘 이야기 2: 유태인이란 누구인가.

by 격암(강국진) 2010. 2. 22.

유태인은 누구인가.

 

오늘날 심장 이식수술 같은 것은 큰 화제거리가 못 된다. 시험관아기처럼 이제는 사람들을 놀래키지 않는 지난 소동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만약 두뇌 이식수술 같은 것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누군가의 두뇌를 나의 두뇌와 바꾸거나 내 두뇌를 버리고 인공두뇌를 교체해 넣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내 몸에 남의 두뇌를 넣어서 나를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난다고 해도 그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팔이 없어져도 내가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내 몸에 기계심장을 달거나 남의 심장을 이식해도 내가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몸에 남의 두뇌를 단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다. 우리는 손발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두뇌는 전혀 다르다. 그 수준이 아니다. 두뇌가 바뀌어 진다면 설사 그 두뇌가 내 두뇌보다 훨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기쁘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한 개의 뇌는 아니지만 두뇌는 우리 자신의 핵심이다.

 

오늘날에는 당연해 보이는 이 생각은 뜻밖에도 항상 당연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은 심장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인은 두뇌는 펌프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파라오의 부활을 기대하며 미이라를 만들었던 이집트인은 내장기관은 따로 잘 보관했지만 뇌는 내다 버렸다. 사랑을 하는 것은 두뇌라는 것을 알고 있는 오늘날에도 깨어진 사랑을 가지고 영어에서는브로큰 하트즉 깨어진 심장으로 말한다.

 

인간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인간의 몸에 대한 지식을 쌓아왔다. 그리고 인간의 두뇌가 팔다리와 심장을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 대부분은 이제 두뇌는 우리에게서 포기할 수 없는 핵심적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몸의 모든 부분이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해를 한다는 것은 종종 이런 것이다. 서로의 상관관계를 통해 핵심적 부분을 찾고 복잡한 것을 간단한 것으로 설명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던가 유태인은 누구인가 혹은 한국인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데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까. 우리는 매우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어떤 것들은 매우 소중해서 절대 포기할수 없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없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으로 남는다. 그 중의 어떤 것들은 그것이 없어지거나 교체된다면 더 이상 우리를 우리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지만 어떤때는 우리는 그걸 의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이 핵심적인 것에 따라 우리의 행동은 상당부분 결정되고 만다.

 

사람들은 살아갈 이유를 잃는 순간 작은 어려움도 극복하기 힘들어 하고 건강도 나빠진다. 반면에 살아갈 이유를 확고히 가진 사람은 험한 조건도 잘 참고 견뎌낸다. 나는 아들을 위해 희생하며 주기만 하고 산다고 생각했으나 그 아들이 없어지고 나면 내가 사는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야망으로 사는 사람,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에 사는 소년도 있다. 희망이나 의무, 때로는 고통조차도 어떤 때는 그것이 없다면 더 이상 나를 나라고 부르기 힘든 것이 된다.

 

반면에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말할 때 한국인은 매운 김치를 잘 먹는 사람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인에게 김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김치를 먹을 수없다는 사실이 한국인을 한국인이 아니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하겠지만 일단 유태인은 누구인가에 대해 말해 본다고 하자. 유태인에게서 이것저것을 지워버린다고 할 때 무엇을 버리고 나면 유태인은 더 이상 유태인이라 부르기 어려운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들마다 꼭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나올법한 답은 있다. 유태인의 핵심에 있는 것은 유대교라는 종교 그리고 종교와 관련된 전통이다.

 

유태인이란 무엇인가. 유태인이란 유일신이신 여호와에게 선택되고 계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유태인은 선택된 민족으로 특별하다. 그런데 유태인들은 교만하여 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기나긴 박해와 고난의 세월을 살아 왔다. 이것이 유태인들이 믿는 신화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라고 했는데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래서 온갖 고난을 당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율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럼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유태인을 유태인이게 하는 것은 종교고 문화전통이고 계율이다.

 

따라서 유태인들에게 있어 계율을 지키고 종교적 전통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계율과 전통이 사라진다면 유태인의 정체성은 증발되고 유태인 사회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박해 때문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들이 당해 온 박해가 힘겨웠을수록 계율을 엄밀히 지키는 것이 강조되었을 것이다. 유태인이란 신에게 선택 받은 민족이다. 이 말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럼 유태인이 어떻게 이 계율을 지키는가를 조금 이야기해 보자. 종교적으로 신앙심이 강한 유태인들은 코셔라고 불리는 음식을 먹는다. 유태인들은 일단 피가 섞인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그래서 가축을 도축하면 피를 모두 뺀다. 네 발을 가진 동물을 먹으려면 위가 두 개 이상 있어야 한다.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것만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돼지와 말은 유태인이 먹을 수 없다. 물고기에는 비늘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 뱀장어나 미꾸라지는 그래서 먹을 수 없다. 고기를 먹는 독수리는 먹을 수 없고 새우도 먹을 수 없다. 이러니 코셔 때문에 해외 여행을 갈 때 독실한 유태인들은 종종 음식을 가방 가득 가지고 떠난다.

 

유태인 율법에 따르면 고기와 유제품도 같이 섭취해서는 안 된다. 하루는 예나에게 예루살렘 시내의 버거킹에서 우유를 주다가 제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햄버거 가게에서는 우유나 치즈를 팔지 않거니와 누군가가 우유를 가져와서 먹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유태인은 안식일을 지킨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모세의 십계명중의 하나다. 안식일은 샤밧이라고 불리는데 샤밧은 쉰다 멈춘다는 뜻으로 금요일의 일몰 때부터 토요일밤 세 개의 별이 나타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안식일 식사는 식사인 동시에 예배와 같은 것으로 즐겁게 식사하라는 것 자체가 계율이다. 유태인들은 부모자식이나 배우자가 사망했을 때 한 주일 동안 곡을 한다. 이것을 시바라고 하는데 샤밧이 되면 이 시바도 멈춰야 한다. 즐겁게 먹고 마셔야지 다른 사람에게 슬픈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샤밧이 되기 전에 몸과 옷을 깨끗이 한다. 샤밧이 되면 노동을 하지 않고 즐겁게 보내고 3번의 성찬을 가지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요리조차도 전날 모두 해놓는다.

 

샤밧의 기간 동안 유태교도들은 세 번의 성찬을 가지는 것 이외에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뭐가 일인가 아닌가는 유태교법률에 의해 엄밀히 정해져 있다. 우회 방법이 있다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유태교도는 전기를 켜거나 꺼서는 안 된다. 안식일에는 불을 쓸 수 없으므로 성찬의 음식들은 모두 전날 준비해서 음식을 따듯하게 유지시켜 주는 장소에 보관한다. 유태교도는 샤밧에 자동차를 몰거나 타는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행도 할 수 없다. 다만 샤밧에도 친구나 가족을 초대하거나 방문할 수는 있고 기도를 하러 시나고그에 가는 것이 허용되며 유태인의 규약집인 토라를 읽거나 연구하는 것이 허용된다.  

 

유태인 율법은 모든 것을 아주 자세히 규정해 놓고 있다. 유태인은 모든 것에 매우 꼼꼼하다. 예를 들어 샤밧이 시작될 때 하는 샤밧촛불의 점등은 일몰 18분 이전에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샤밧에 하지 못하는 일들도 39개의 집단으로 분류되어 지정되어 있다. 이 모든 규약의 근거는 성서에 나오는 한두 줄의 글을 가지고 유태인들이 열심히 싸우고 논쟁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해가 질 때쯤 적당히 촛불을 켜자라던가 대충 이런 것들은 안 된다는 식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유태인 학자들이 모여 만든 탈무드는 일만 이천 페이지에 달한다고 한다. 유태인은 유태인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뜨거운 논쟁을 하고 기록을 남겨 온 것이다.

 

물론 유태인이라고 해서 모두 이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비종교적이라고 말하는 유태인이 더 많다. 그러나 이 비종교적이라는 뜻은 그들이 유태민족의 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신을 존중하며 종교의 존재감을 크게 느낀다. 유태 민족에게 있어 종교적 전통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유태인들의 핵심에 유대교가 있다는 것은 유태인들에게 간단치 않은 문제를 남기기도 한다. 어느 날 유태인 교수들과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나는 유태인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 나이 지긋한 한 노교수가 내게 설명을 해 주셨지만 내 기억에 그 설명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 내는 문제를 진짜로 해결했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태인을 유태인이게 만드는 문화적 특색과 구심력은 그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민족이라는 개념은 아주 손쉽게 배타적 민족주의로 변질된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티브이에서 한 랍비가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태인 사이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신이 유태인에게 팔레스타인 지방을 차지할 권리를 주었으니 그것은 정의라는 논리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하고 신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은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다. 전통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것은 유태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할 법한 일이다.

 

우리는 위대한 사람들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신화는 반드시 악을 찾거나 위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를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남보다 뛰어나게특별한 위대한 민족이라던가 우리는 위대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로 민족 신화를 시작한다면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다. 현실을 보면 위대한 것치고는 별볼일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기대치보다 현실은 못하며 때로는 아주 비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위대한 민족이란다. 그렇다면 반드시 뭔가 엄청난 실수가 저질러 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실수를 설명하는 중요한 방법은 악이다. 위대한 민족의 신화는 종종 악을 만들어 내서 그 악을 물리치면 우리 민족이 승리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민족의 정체성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우리는 반드시 더더욱 큰 악이 필요하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그 악적에게 던져 넣는다. 우리는 위대하지만 그 악적 때문에 이렇게 산다는 것이다.

 

실수가 저질러진 이유가 뭐건 간에 그 실수를 만회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유태민족은 계율을 지키고 있고 신에게 잘못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룰 만큼 치루었다고 생각하는 유태인이 있다고 하자. 그럼 그는 우리 민족은 본래의 위대한 정체성에 맞는 위대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위대한 정체성은 위대한 권리의 주장으로 간다. 신에게 선택된 민족은 당연히 다른 민족과는 다른 권리를 가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중에도 민족의 우수성이나 위대함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들은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의 언어는 제국적 침략을 꿈꾸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배타적 민족주의로 변하는 것이 두렵다고 해서 단순히 민족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자긍심을 부정하는 쪽으로 가는 것도 올바른 방향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시도로 여겨질 것이다. 왜 여러 나라에서 자신들의 유적이며 역사의 기록을 크게 선전하고 기념할까. 그것은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공동체의 도덕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다. 모두를 하나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가치의 강조와 전통의 재해석이 필요하다. 이웃과 예를 들면 일본과도- 잘지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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