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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3 : 유태인의 아이들이 자라는 방식

by 격암(강국진) 2010. 2. 22.

유태인의 아이들이 자라는 방식

 

하루는 하임 가족의 샤밧 성찬에 초대받았다. 하임은 히부르 대학의 교수로 회색빛 나는 머리에 귀에서 귀까지 연결되는 근사한 턱수염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조그만 키파 모자를 쓰고 다닌다. 하임은 오소독소 쥬다이즘 다시 말해 유태정교의 신자다.

 

2007년을 기준으로 이스라엘에 사는 유태인중 17%가 그와 같은 유태정교 신자다. 그리고 약 8%의 유태인은 유태정교보다 더욱 보수적인, 극보수 유태교도인 하레디 신자이다. 하레디 교도들은 그 60% 정도가 직업을 따로 가지지 않고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길을 가다가 검정색 옷을 입고 검은색 모자를 쓰고 귀밑머리를 길게 기른 사람들을 만나면 이들이 하레디 신자다. 안식일 날 차를 타고 이들 앞을 지나면 돌이 날아온다. 사실 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하는 자들은 죽이라고 되어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이 모두 종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유태인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은 아니며 다만 보다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대개는 종교와 전통을 존중한다.

 

그의 집에 도착하자 그의 가족이 나와 따뜻한 인사를 해준다. 가족들을 소개받고 2층집인 그의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도록 안내를 받았다. 우리는 부엌이며 여러 방들을 둘러보고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 긴 탁자로 돌아왔다. 규칙에 따라 손을 씻고 자리에 앉자 하임은 나에게 키파를 건넨다. 키파는 손바닥 만한 작은 모자다. 키파는 본래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으로 예배 때 머리를 가리는 풍습에서 기인했다. 머리를 가리는 것이 노예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유태정교의 신자들은 하루종일 키파를 쓰고 생활한다. 신의 종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샤밧의 식사는 예배에 준하는 모양으로 평상시와는 다르게 하임은 나에게도 키파를 권했다.

 

하임은 꼬아놓은 밧줄처럼 생긴 안식일 빵을 엄숙히 잘라서 식탁주변으로 돌린다. 유태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매우 존중받는다. 항상 아버지가 뭔가를 먼저 먹는다. 유태인들은 가정의 질서가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고 질서를 가르친다고 믿는다. 빵을 자르고 나눠주는 것은 가장의 의무요 권리다. 약간 달고 고소해서 우리 가족은 이 빵을 좋아한다. 그래서 늘 이 빵을 먹으려고 했지만 목요일과 금요일에만 파는 빵이다. 기본적으로 안식일 날 먹는 빵이기 때문이다.

 

식사는 절차에 따라 진행되므로 예배나 제사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렇게 엄숙하지 않다. 하임의 가족들은 손님과 자유롭게 웃고 떠들며 식사를 한다. 하임은 자기가 집안 일은 잘 안 거들지만 청소는 잘한다며 자신도 아내가 성찬을 준비하는 데 한몫 거들었음을 강조하곤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 남자가 한국 여자에게 얼마나 쥐어 사는가를 설명하는 동안 한쪽에선 두 쌍동이 남자아이들과 딸들이 뭔가를 가지고 킥킥 거리며 웃는다. 식탁은 매우 즐거운 분위기, 자유분방한 분위기다. 

 

그러다가 하임의 아들이 하임과 말싸움을 시작했다. 아마도 뭔가를 허락받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에서는 사람들이 유독 손으로 하는 제스추어를 많이 쓴다. 흔히 엄지와 검지와 중지를 모으고 손을 흔들어댄다. 하임은 아들 앞에서 열심히 손가락 세 개를 모은 손을 흔들며 고개를 가로 흔든다. 이제 중학생 나이인 어린 아들 역시 마찬가지로 손가락 세 개를 모은 손을 짮지만 단호히 흔든다.

 

하임은, 그리고 많은 유태인들은 상대방이 그래 뭐 내가 맞지만 네 뜻대로 할게 하는 식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은 엄밀히 계율을 따져 온 유태인 전통이 만들어낸 태도일지도 모른다.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는 유태인들은 어떤 때는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처럼 논쟁에 열중한다. 그러니까 아들도 그냥 그렇다 하고 적당히 물러설 수는 없다. 그도 열심히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유태인의 집안에서 그것은 중요한 교육이다. 어디 가서 자기 입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알았어요 아빠 말대로 할게요 하는 식으로 대답하다 보면 옴짝달싹할 수 없이 사사건건 아빠 말대로 살아야 한다. 유태인들에게는 작은 것도 그냥 대충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들도 부모와 싸우고 싸워서 자기 입장을 관철해야 한다. 떼를 쓴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입장을 납득시켜야 한다. 떼를 쓰는 식으로 나가면 경멸적 반응이 나올 뿐이다. 유태인은 원리원칙 다툼에 매우 집요하다.

 

하임의 아들이 손가락을 모은 손이 흔들리는 속력이 증가한다. 하임의 고개 젓는 속력도 증가한다. 표정이 점점 더 강경해진다. 싸움이라도 나는 걸까? 내가 어렸을 땐 한국에서 부자지간에 저 정도면 아버지가 화를 냈을 것이다. 유태인의 언어인 히브리어에는 존대말이 없다. 그러니 부자지간이라도 말은 거침이 없다. 그러다 겨우 어떤 식이든 결말이 났다.

 

하지만 하임의 집안은 화목하다. 저런 논쟁은 유태인에겐 그저 늘상 있는 대화일 뿐이다. 하임이 매우 바쁜 사람이라 주중에는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일도 거의 없으며 장기 출장도 많지만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언뜻 봐도 상당히 스스럼없이 통하는 관계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아온 십계 중의 4번째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번인 다섯 번째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심지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인 6번째 계명보다도 앞에 있다.

 

샤밧은 유태인 자녀교육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샤밧이 되면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은 즐겁게 식사하는 것뿐이고 어디 갈수도 공부를 하거나 사업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일주일에 한번은 가족들이 하루종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천천히 길게 이야기하는 날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두 사람이 일주일에 한번씩 감옥에 같이 들어가야 한다면 그리고 서로 즐겁게 밥 먹으며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 두 사람이 친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울 것이다. 즐겁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계율의 일부다. 그러니 화목한 가정을 연출하는 게 계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목한 가정을 연출하다 보면 화목한 가정이 된다.

 

샤밧 성찬의 이야기 주제는 급할 것 없이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천천히 계속된다. 아이들은 공부를 할 수는 없지만 철학이나 역사의 인물에 대해 부모가 설명해 주는 것은 규약에 어긋나지 않는 모양이다. 이야기하다가 무슨 유태인 철학자 이야기가 나오자 한참 그게 누구인지 하임의 장인이 그의 어린 외손자에게 설명한다. 아마도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가족과 자국의 역사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샤밧에 공부는 할 수 없지만 부모나 친척에게 다른 날에 배우지 않는 것을 배우는 날이 또한 샤밧이 아닐까. 

 

한국에서 교육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유태인 가정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교육의 기본은 아버지 어머니가 아이들과 같이 있어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티브이나 컴퓨터나 학원이나 다른 아이들에게 아이들을 보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들이 하루종일 같이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만난다. 그게 교육의 기본이다. 너무 간단한 것 같지만 실상 한국의 아이들과 부모들은 너무 바쁘거나 다른 오락거리에 정신이 팔려 서로의 얼굴을 볼 시간이 별로 없다. 한국의 아이들은 대개 수많은 학생들과 함께 부모나 친척에 비하면 낯선 어른들인 선생님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혼자 시간을 보낸다.   

 

물론 아이디어가 필요할 것이다.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간다든가 집에서 책을 같이 읽는다든가, 같이 요리를 만든다든가 같이 집안청소를 한다든가 같이 운동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같은 활동을 같은 공간에서 같이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하임의 아이들은 사실 샤밧이 아니라도 온갖 행사에 참여하느라 바쁘다. 일년 내내 유태인의 명절이 많이 있는 데다가 친척이 아주 많기 때문에 경조사도 많다. 이스라엘의 유태인은 아이를 많이 가진다. 하임만 해도 형제가 열 명이고, 그 열 명의 형제 중 대다수가 또다시 그 정도의 아이를 가져 한 할아버지 밑에 100명에 육박하는 손자 손녀가 있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대개 종교적으로 독실할수록 아이를 많이 낳는데 하레디 신자 가족이 길을 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오리 가족이 지나가는 것 같다. 비슷한 검정 빛의 옷을 입고, 10명에 가까운 아이를, 일부는 유모차에 끌고 일부는 안고 일부는 한 줄로 걸어서 부모님을 따라오게 한다. 이런 대가족이 존재하는 데도 유태인들은 결혼이며 할례식이며 여러 가지 친구와 가족의 행사에 꼭 참여하는 편이다. 년중의 여러 가지 전통 명절행사도 빠지지 않고 충실히 치른다. 그러니까 일가 친척들이며 동네 어른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또다른 형태의 가족과의 시간이다.

 

한국도 사실은 몇십 년 전에는 이랬다는 생각이 든다. 7-8명의 형제가 보통이었던 때가 있었고 일년에 이런저런 명절을 일일이 지키느라 바쁘고 각종 제사며 경조사를 친구에서 사돈의 팔촌까지 지키느라 일년 내내 경조사로 바빴던 때가 있었다. 요새는 결혼 하객이 부족해서 결혼하객대행업이라는 직업이 생겼다고 한다. 돈을 받고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친인척으로 행세해 주고 밥을 먹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이 주는 많은 불편함과 구속을 벗어 던져버렸다. 그래서 명절에는 리조트로 놀러가거나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이 많고 동지팥죽이며 대보름 쥐불놀이며 부럼이며 한복 입기 같은 것이 어느새 희미한 풍습이 되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매우 많다. 그 결과 좀더 자유로워졌고 좀더 편해졌다.

 

그런데 자유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 부자유가 어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제쳐놓고라도 최소한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아이들은 친척도 잘 모르고 전통도 모르며 어릴 때부터 바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금방 줄어든다. 아이들은 친척어른을 만나지 않고 이웃어른을 만나지 않는다. 그들이 보는 어른은 종종 강단에 선 선생님이나 등 돌리고 티브이 시청에 바쁜 아버지다. 외롭게 크거나 어른과 만날 시간이 없는 아이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은 첫번째 단계에서부터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들은 한 마디로 믿고 따라할 어른을 만나는 시간이 너무 없다.

 

우리는 과거 한국에 있던 것이라면 그것은 후진적인 나라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미신이라거나 의미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이 전세계 최하위 수준의 가난한 나라를 지금 만큼의 부자나라로 만든 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와 달라졌다. 더 좋아졌다. 정말 그런가?

 

오늘의 이스라엘은 해방 직후의 한국과는 다르다. 아무튼 평균국민소득 33천의 세계적 부국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20세기 5-60년대의 한국과 비슷하게 크는 면이 있다. 가족이 강조되고 아이들은 전통 속에서 자라난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어른을 만나고 사촌을 만나고 세상을 만난다. 이게 이스라엘이 아이들에게 세상을 가르치는 방식이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실은 미국과 일본도 방법이 조금 다를 뿐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지역사회 활동이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웃이 친척의 역할도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샤밧 성찬에서는 제미롯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손님인 나는 무슨 노래인지 몰라 그저 웅얼거릴 뿐이다. 하임의 가족들은 웃는 얼굴로 다같이 노래를 부른다. 중동의 이국적인 음악이 집안에 가득 찬다. 음악이란 사람을 뭉치게 한다. 다같이 노래 부르는 가족이란 멋져 보인다. 가족이 다같이 송편을 만든다던가 윷놀이를 하는 것만큼 멋져 보인다. 그 노래하는 장면에 유태인이 수천 년의 박해를 견디고 번성한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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