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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4 : 유태인의 토론문화

by 격암(강국진) 2010. 2. 23.

때로는 정말 점심만 먹었으면 좋겠다.

 

히부루 대학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대학이며 많은 조사에서 세계적 명문으로 꼽히는 대학이다. 이 대학의 첫번째 이사회에 참여한 인물에는 물리학자 아인쉬타인, 심리학자 프로이드, 철학자 부버 그리고 지오니스트 리더 와이즈만이 있다. 이 대학은 4개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데 스코퍼스 산의 캠퍼스, 기밧 람 캠퍼스, 엔 케림 캠퍼스 그리고 르호봇의 캠퍼스다. 나는 이공계 학과들이 소속된 기밧 람 캠퍼스에 사무실이 있었다.

 

시험철이 되면 급해지는건 어느 나라 대학생들이나 마찬가지다. 시험철에 캠퍼스를 걷다보면 다급해진 유태인 학생들이 시끄럽게 공부하는게 보인다. 나같으면 차분하게 공부해야 하는 걸 외우기 위해 사람이 없는 곳을 가겠지만 유태인 학생들은 복도며 건물앞에서 모여서 와글와글 시끄럽다. 

 

언젠가 한 기억력 전문가 유태인이 한국 학생들의 공부방식에 대해 조언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은 공부하라고 하면 조용한 곳에 가서 조용히 공부하는데 유태인 학생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태인 학생들은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떠든다고 한다. 서로 말을 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잘 외워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건 나라간의 차이인가 보다.

 

암기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언어와 생활습관에 따라 효율적인 방법이 틀릴 것이다. 유태인들은 주로 손발 짓을 많이 하고 얼굴표정을 많이 짓는데 비해 한국인들은 대화하면서 그러지 않는 편이다. 이런 차이도 분명 암기하는 방법에 영향을 줄 것이다. 아뭏튼 유태인들이 공부하는 방식은 시끄럽다. 누굴 붙잡고 마구 떠들면서 공부한다.

 

노벨상수상자의 3분의 1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유태인 교육이 뭐가 틀린 가에 대해 여러가지 말들을 많이 한다. 유태인들과 접촉하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있다. 그건 유태인들은 논쟁과 토론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기질상으로 남이 하는 소리를 한 시간 내내 조용히 듣고 있는 일이 없다. 나는 몇몇 국제 여름학교에 참여한적이 있다. 백 명 규모의 대학원생이나 박사후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여름학교로 전문가를 위한 강의다. 나름대로 수강생을 선발해서 뽑고 이미 박사학위를 받았거나 받기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니 한마디로 바보나 사전지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 유태인 학생이 7-8명씩 오는데 강의 시간에 질문하는 것의 반 이상은 이 유태인 학생들이 한다. 너무 질문을 많이 해서 시간 안에 강의가 끝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분명하게 말해서 이들의 이런 행태가 반드시 칭찬 받을 것만은 아니다. 이들이 가장 질문을 많이 한다는 것이 이들이 가장 똑똑했었다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학생은 알아들었는데 나를 포함한 몇몇만 모른다. 그래도 유태인 학생은 질문을 한다. 여기서는 질문하는 매너에 대해 칭찬하거나 비판 하자는 게 아니다. 요점은 왜 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이고 유태인의 교육과 학문에 있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적극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같다. 그들은 그렇게 하라고 어릴 때부터 배웠다.  

 

나는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세미나와 학회에 참석했다. 장기 체류한 곳으로만 미국, 일본 그리고 이스라엘이 있다. 내가 느끼기로는 세미나의 분위기가 가장 좋기로는 이스라엘의 세미나분위기가 가장 좋았다. 히브루 대학에 있을 때 세미나는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매우 비공식적인 분위기로 흘렀다. 연사가 나 아는 것 많으니 그냥 들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듣는 사람들이 연사 틀렸다면서 면박을 주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런 저런 문제가 있으니 함께 생각해 보자는 분위기랄까. 세미나는 종종 연사가 원하는 곳까지 발표를 하지 못하거나 정해진 시간을 훨씬 넘겼다. 전에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지적 받고 연구발표를 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연구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벌어지는 상황도 있다. 첫번째 화면을 보여주고 뭔가가 질문이 나오면 그걸로 한정없이 늘어져서 첫번째 화면 보여줬는데 세미나 시간의 절반이 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유태인들은 이런 환경에서 연구하고 공부하고 단련된다. 연사가 준비한 자료를 전부 보는 것이 세미나의 목표가 되지 않는다.

 

유태인 학생들은 자기 의견을 매우 강하게 표현한다. 히브루 대학교 학부 물리학 강의 시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수학에는 벡터라는 개념이 있고 텐서라는 개념이 있다. 텐서는 좀더 일반적이고 따라서 조금 더 고급과정에 나오는 개념이다. 학부저학년들이 듣는 과목이라 학생들은 텐서가 뭔지 몰랐다. 그런데 강의에 텐서를 말하면서 그 강사가 강의를 한 모양이다. 당장 한 학생이 일어나 거세게 항의를 한다. 이런 강의 못 알아 듣겠다는 것이다. 텐서 아는 사람있냐고 다른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뭐라고 한다. 나도 전해들은 이야기라 현장분위기는 정확히 모르나 일단 나중에 화제가 될 정도로 그 항의가 거세었나보다. 애초에 유태인 학생들의 항의란 한국의 유교적 분위기의 기준으로보면 매우 거세다. 히브리어엔 경어도 없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시켰는데 오래 기다린 끝에 짬뽕나오면 다혈질인 한국사람이 중국집 종업원에게 어떻게 항의하겠는가. 교수에게 학생이 항의할 때 그런 분위기다. 한국기준으로는 그야말로 망신을 주는 것이다. 교수가 얼른 사과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임을 다짐했다고 한다. 유태인 학생들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다. 그러니 국제 학회 가서도 행동이 다른 경우가 많다.

 

유태인이 단순히 하나님의 계율만을 엄격히 따르는 민족이라면 유태인의 뛰어난 성취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논쟁과 토론의 달인이라는 것은 그 사람들이 합리주의자들이고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계율은 바꾸지 못하지만 그 밖의 것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토론한다. 어떤 뛰어난 혹은 높은 위치를 가진 사람이 명령을 내리면 그 권위에 금방 순종하는 그런 문화가 아니다. 다른 민족들이 보기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 따지면서 의견을 나누고 최선의 방책을 배우고 발견해 나간다. 이런 열린 자세가 유태인의 성공을 가져왔을 것이다.

 

토론문화의 중요성은 여러 번 강조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제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한국어로 토론할 땐 서로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토론하는 것도 때로는 어렵다. 나는 진정 토론의 중요성을 믿는 사람은 집단적 지성이 개인보다 뛰어나다고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마음속깊은 곳에서는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같다.

 

과학과 학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아무래도 개인위주로 기록하기 쉽다. 즉 프로이드나 아인쉬타인이나 뉴톤이 이러저러한 것을 했다는 식으로 기록한다. 여기에 더해 천재에 대한 대중적 호기심이 책을 파는데 도움을 많이 주므로 대중과학서적도 주로 그렇게 만들어 진다. 어떤 대단한 천재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풀어내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주로 말한다. 그런 책만을 접하다보면 과학과 학문이란 몇몇 천재가 골방에 들어앉아 이뤄내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느날 천재가 나타나서 불쌍한 범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는 성은을 내리는 것이다. 물론 분야별로 정도는 좀 다르다. 수학과 예술 같은 분야는 개인의 천재성이 아마 좀 더 중요할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학문의 발전은 집단이 교류하는 데서 이뤄지는 것이다. 수학이나 물리학도 그렇고 공학이나 신경과학에 이르면 혼자서 뭘 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집단의 힘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집단의 소중함이 무시되거나 저평가되는 일이 많다. 오직 성공한 천재에만 주목한다. 이것은 단지 과학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발전은 한국의 문화와 국민들 때문인가 아니면 박정희대통령 같은 한 사람의 공이 큰가. 이런 문제에 대한 이해와도 관련이 깊다. 물론 양쪽 다 기여한 것이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얼마만큼 기여하나? 어느 쪽이 필수 불가결한 것인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정책은 전혀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개인의 힘만 강조된다고 나는 느낀다. 민족의 강함이 번영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보다 어찌보면 간단히 수입할 수 있거나 우연히 나오게 되는 한두 사람의 위인이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이 강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과학발전은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천재가 중요하다면 주로 어떻게 하면 한 명의 천재를 탄생시키거나 끌어올 것인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노벨상급 인사가 한국에 와서 연구를 하거나 총장을 맡으면 한국의 과학은 당장에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자유롭고 열띤 토론과 상호간에 도움이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다. 과학 하는 사람의 숫자가 어느 이상이 되어야 한다. 또 모두가 뛰어난 사람의 입에서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그 수족이 되기를 자처해서는 창의적인 발견을 하기가 어렵다. 집단과 뛰어난 개인 둘다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제한된 돈과 자원의 배분을 어떻게 할것인가의 문제다. 한 사람에게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엄청난 권위를 가지게 하는 것으로 과학이 발전한다면 그건 엄청나게 낙후된 사회나 그럴 것이다. 권위주의는 없애고 자유로운 토론을 막는 문화적 걸림돌이 없어져야 한다.

 

이런 의견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대개 비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유태인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대단한 천재가 많은 유태인들이지만 유태인들은 부단히 집단으로 소통하면서 의견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유태인중에 성공한 사람도 많고 유태인이라는 집단이 성공한 이유일거라고 생각한다. 유태인 유전자가 좋아서 아이들 중에 천재가 많이 태어나는 게 아니다.  

 

한 사회가 도덕이나 질서가 없으면 붕괴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계율만 강하다면 그 사회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용하지 못한다. 질서와 도덕을 세우는 가치가 존재하고 그와 균형을 이루는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유태인은 이 두 가지를 전부 균형 있게 가지고 있다. 공동체의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개방된 자세를 가지는 것이 번영의 열쇠인 것 같다.

 

히브루 대학에 있을 때 나는 하임교수와 일했다. 하임교수는 어떤 때는 거의 한달내내 내방에 와서 점심을 먹자고 하거나 10시무렵에 이야기 할것이 있다며 나를 화이트보드 앞으로 불러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점심때가 되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항상 잡담을 한다. 그리고 그 점심이 끝나기 전에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얼마냐 구체적이냐하면 방정식을 쓰고 푸는 것이다. 아주 종종 우리는 카페테리아의 종이 내프킨에 대고 문제를 풀었다. 잘 안풀리면? 그래도 계속 푼다. 잘 풀리면 좀더 대화를 나누고 또다시 구체적 문제로 들어간다. 혼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서로 펜을 주고받으며 푼다. 얼마나 오래 푸는가. 자 이제 가볼까라는 말이 나올 때면 점심식사를 시작한지 4-5시간이 흘렀기 일쑤다. 좀 있으면 저녁먹어야 할 판이다. 나로서는 의견을 나눌 좋은 기회이기는 했으나 또한 고생스러운 시간이었다. 논문도 읽고 싶고 나름대로 혼자 생각할 시간도 가지고 싶은데 매일 매일이 그 모양이니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도 교수는 한번도 우리 문제 풀러가자고 하지 않는다. 우리 점심이나 먹을까 하고 묻는다. 어떤 때 내가 바뻐서 점심을 못먹게 되면 나는 혼자서 생각해야 하는가 하고 말한다. 즉 하임은 연구할 때 혼자서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치고 받는 공방전이 있어야 머리가 돌아간다. 누군가가 시비를 걸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뛰어난 그도 생각을 혼자 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어한다. 혼자 조용 한데서 산책을 해야 머리가 잘 돌아가는 나와는 다르다.

 

어느 날 어김없이 하임은 내방에 와서 점심 먹으러 가지고 말한다. 나는 전날 풀었던 문제를 아직 다 정리하지 못했으므로 사실 그걸 계속 혼자 풀고 싶었다. 강제는 없다. 안 간다고 말하면 가자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이고 무엇보다 그가 나의 상사이므로 안 간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때로는 정말 점심만 먹었으면 좋겠다.’유태인은 토론에 강하다. 유태인은 토론에 열려있다. 그게 유태인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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