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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 단상

by 격암(강국진) 2010. 3. 30.

요즘은 인터넷에서 생태계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4대강에 관련해서 생태계 파괴라는 말을 들으며 생태주의, 생태마을이라는 말도 종종 들린다. 애플이 만들어 낸 It 생태계라는 말도 아주 자주 듣는다. 


그런데 나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요즘은 가끔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이 생명이라는 말과 생태계라는 말에는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같다. 그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생명의 가장의 큰 특징은 그 경계가 없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일상에서 움직이는 것을 살아있다고 말하는데 그말은 외부의 자극이 오면 변화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또한 호흡하고 먹을 것을 먹고 배설을 한다. 이런 행동이 전혀 없는 완전히 닫힌 존재를 생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경계가 없다. 끝임없이 외부의 것이 들어와서 내부의 것과 반응하고 교체되기 때문이다. 


생태계라는 것은 뭘까.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생명이라고 생각된다. 생명에는 경계가 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생명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면 그것은 그자체로 커다란 하나의 생명이 되고 마는 것같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생각과 생태계에 대한 생각은 거의 같은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하나는 인간관계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두 사람만 알고 산다고 해보자. 이것은 어린 아이를 홀로 키우는 엄마나 아빠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아이에게는 그 엄마나 아빠가 전세계에 해당한다. 물론 그 아이는 다른 사람도 많이 만나지만 아직 다른 사람을 얼마나 믿을수 있는지 모른다. 세상은 너무나 알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소통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엄마나 아빠다. 아이는 엄마나 아빠의 말과 요구에 민감하고 또한 그런 아이의 말과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해 주는 것이 또한 아빠나 엄마다. 


부모와 아이는 각자가 독립된 생명이지만 하나의 관계속에서 그둘은 서로 분리된 생명체가 아니다. 부모가 아이고 아이가 부모다. 너가 나이고 내가 너다. 종이위에 구불구불 경계선을 그으면 왼쪽 부분이 있고 오른 쪽 부분이 있으되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왼쪽이 튀어나왔다는것은 오른쪽은 들어갔다는 이야기고 왼쪽이 뾰죡한 부분은 오른쪽이 뾰족하게 들어간 부분이다. 아이의 세상의 기분은 부모에게 맞춰져 있다. 아이가 뭔가 불만에 차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아이의 특성이 아니라 아이-부모라는 생태계를 이룬 아이의 특성이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고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다. 


위의 글에 보면 민감성이라는 단어가 귀와 눈을 자극하는 것을 느끼게된다. 마치 날 봐달라는 것처럼. 생태계를 이룬다는 것, 생명이라는 것은 민감해야 한다. 서로에게 민감한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서로를 느낄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가 못할때 생명은 죽는다. 생태계는 파괴된다. 발에 가시가 박혀서 발이 썩어가는데 그것을 느낄수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찍어서 피흘리게 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면 그런 공동체는 파괴될 것이다. 우리는 민감해야 한다. 우리는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서로를 느낄수 있어야 한다.


그런 민감성이나 감수성은 기계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생태마을을 생각하고 It생태계를 생각하고 4대강 살리기를 말하며 그런 부분을 간과하는 것같다. 물론 기계적인것, 논리적인 것, 구조적인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효율성을 기대할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IT 생태계를 꾸려가기 위한 여러가지 법률조항이나 일처리 방식에 대해 합의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생태마을은 이러저러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이러저러하게 일이 분담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강을 개발하는 것도 순서를 생각하고 구조를 생각해야 한다. 논리가 필요하고 기계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제 아무리 훌룡한 사회 시스템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 개개인이 느낄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제아무리 법을 잘만들어도 느낌이 없는 집단이 생태계로 들어오면 그들은 그 생태계를 잔혹하게 파괴한다. IT 생태계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죽으면 자신도 죽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대기업이 있다. 따라서 생태계에는 피가 흐른다. 


감수성을 개발하려면 논리만 쫒지 말고 그렇다고 값싼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평안히 하고 작은 나에 대한 생각을 잊고 조용해 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위해서는 지식이전에 자기 성찰과 훈련 그리고 휴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통찰력과 영감의 순간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사실 알고보면 매우 익숙한것이다. 논리로 통찰력과 영감이 만들어 지지 않는다. 


장자에서 내가 좋아하는 악기 만드는 장인의 이야기가 있다.  이 장인은 기가 막히게 악기를 만드는데 이 악기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이 깃들어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먼저 목욕재계하고 명예나 돈같은 것을 얻는 것에 대해 다 잊어버릴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나무를 보았을때 그안에서 악기가 저절로 떠오르는것 같으면 그때 악기를 만들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둔다는 것이다. 이게 감수성이다. 나무의 구조와 성질에 대한 통찰력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 감수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 청와대에 앉아서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사방에서 끌어모아 나름대로 한국을 구하려고 불철주야 바쁘다. 그런데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 부지런 한것만큼 위험한게 없다. 건드리는 것마다 피를 흘리지만 그는 그것을 모른다. 강산이 피를 흘리고 문화가 죽어가고 국민들의 자존심과 감정이 다쳐도 그는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국민들은 소통이 안된다고 말한다. 그는 말하자면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라는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들이다. 이 세상을 구원할 시스템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감수성을 돌아봐야 한다. 그렇다고 무슨 말로 만들어진 도덕률을 보라는게 아니다. 일단 자기안에 뿌리박힌 상식과 문화적 편견의 일부라도 성찰하고 덜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대체 나는 왜 지금 이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게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는 한 무슨 무슨 주의는 결코 아무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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