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하고 아름다운 세상
모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20대라는 것은 욕망과 좌절과 희망의 시간일 것이다. 이제 고등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어른으로 행세하지만 넓은 세상도,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데 어린 학생으로서의 제약은 대부분 사라지고 세상과 만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저런 경험들에 따라 희망도 좌절의 감정도 출렁이며 그 인생에 생겨나게 된다. 온통 처음겪어보는 일들로 계절은 채워지고 사랑도 하고 야망도 품고 벽에 부딪혀 실망도 하고 좌절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거나 자기자신을 오해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보면 20대라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나의 20대를 돌아볼때 철학적 사색과 공부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커다란 공백과도 같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일관성에 대한 생각으로 흥분하던 대학초년병의 시절에 가졌던 희망은 좀처럼 다음 단계를 보여주지 못했다. 일관적 삶의 철학을 구성한다는 희망은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삶의 바탕에 깔린 원칙은 무엇인지를 알아낼수 있을거라는 희망은 20대전반에 걸쳐 점점 작아지다가 이따금씩 껌벅거리는 촛불같다가 20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질문자체가 잊혀지는 처지가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야망과 사랑 혹은 학문적 정렬의 달콤함이나 쓴맛에 취해버렸던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희망한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인생에 대한 나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온통 모순되는 일로 가득 찬것 같았다. 나는 1988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무렵은 1980년대의 노동운동 학생운동의 여진이 대학에 아직 남아있던 때였다. 아뭏튼 대통령직선제를 달성한 87년 6월항쟁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은때였다. 물론사회는 쪼개지고 여러가지 비리가 비판되었고 서로에 대한 혹은 인간자체에 대한 불신이며 극렬투쟁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안에 팽배해 있었다.
대학안은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대학생들은 힘든 노동자나 농민의 생각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같은 말들이 많았고 교수들도 대개 국가를 위해서라던가 국민을 위해서 좋다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일이 많았던 것같다. 따라서 쌍쌍파티같은 것을 하는 것은 유치하고 어리석은 짓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무언가가 결핍되고 무언가가 아닌 곳에서 그 무언가의 정체성을 알게 된다. 우리는 타인을 만나면서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 어떠한 곳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한국이 아닌 다른 사회를 경험해 봄으로서 알게 된다. 난 대학교 3학년때 영국 버밍험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반년을 보냈다.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즉각 한가지를 느끼게 되었다. 한국에 있었을때 내주변은 민족이며 국가같은 거대한 개념이 가득했지만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는 '개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개 어떤 커다란 관념이나 이념의 이야기 없이 자기 자신의 개인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자신의 개인사만 생각하며 살수 있는 나라, 커다란 이데올로기적인 단어를 떠올릴 필요가 거의 없는 나라가 부러웠다. 대학을 채웠던 말들이 틀렸다기 보다는 그것들이 왠지 사람들을 억누르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아는 친구들이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정학을 맞고 또 그것을 항의 하던 친구들이 그러다가 정학을 맞고 그걸 보던 친구들이 괴로워서 휴학을 하고 어떤 친구들은 어렵게 들어온 학교를 그냥 영영 떠났다. 학부생인 나에게는 엄청나게 공부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이는 교수들이지만 내가 그들을 논리적으로 증거를 기반으로 논파할수 없다고 해도 어딘지 모르게 그분들의 언행에도 편협의 냄새가 났다. 학생들은 왜 세상을 학교 안과 학교 밖이라는 둘로 잘라서 서로 다른 규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고해야 하는지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다. 세상은 정상이 아닌데 학생들만 정상이어야만 한다고 하는 느낌이었다. 나쁜 것은 나쁜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대학에서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그걸 배울수 없다면 어디서 그것을 할수 있을 것인가, 어디서 그것을 배울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나서서 항의하는 학생들이 모두 존경스럽기만 한것도 아니었다. 학생회에서 잡일을 거들었던 인연으로 나는 학생들이 조직을 만들고 회의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되었다. 내가 보기엔 그들도 교수들과 대화를 할때 억지를 쓰고 있었다. 교수들이 모처럼 어떤 가이드라인에 대한 타협을 보고 자유를 증대시키려고 해도 의무와 권리에 대한 질서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더 나쁜 것은 학생들도 자기들끼리 조직을 만들고 그안에서 축제준비같은 것으로 일을 분담하는 일이 생기면 자기만 알고 감투쓰기 좋아하며 일은 다른 사람시키고 생색은 자기가 내는 그런 일을 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거나 다른 사람들의 고충은 충분히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이따금 비판하는 기성세대, 사회기득권과 그들의 차이란 고작해야 그들은 아직 권력과 돈을 가지지 못했다는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권력을 가진다면 뭐가 달라진다는 말인가.
나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서 어떤 동료에 대한 선망이나 이성에 대한 사랑을 다른 감정으로 변명하는 것 같은 언행, 뒤에서는 험담을 하면서 앞에서는 화사하게 웃는 것같은 행위를 볼때 나는 짜증이 솟구쳤다. 나는 세상의 부조리, 사람들의 부조리를 더 알게 될수록 뭐가 뭔지 더 알수 없게 되는 것같았다. 사람들은 위선적이었다. 그리고 물론 나도 위선적이었다. 어떻게 안그렇겠는가. 뭐가 좋은 건지, 뭐가 옳은 건지 나도 모르겠는데 뭐를 기준으로 신념으로 삼아야 할것인가. 애매한 신념을 가진 나도 한심했고 나보다 더 기준이 없이 행동하는 친구들도 한심했고 어떤 것을 끝없이 믿고 확신에 차서 밀어부치는 학생도 한심해 보였다.
한편 나의 학문에 대한 시각과 방향도 20대 중반을 거치며 크게 달라졌다. 당시 물리학과에 들어간 많은 학생들은 입자물리학을 공부하기 원했고 나역시 그랬다. 그러나 나는 물리학을 조금씩 더알아갈수록 물리라는 학문에 대해서도 실망을 하게 되었다. 한번은 초대칭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세미나를 들었는데 연사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이런 수학놀음이 도대체 이세상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 감정만 크게 가지게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 세상이 모두 혼란스러워도 물리학만은 정말 작은 몇개의 원리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힘을 주는 그런 학문으로 생각했는데 물리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야말로 난장판 같있고 고체물리학쪽을 보면 때로는 그냥 실용성만 강조되어 공학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같았다.
국내의 학문풍토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20세기 초엽에 만들어진 양자역학이나 그 이전에 거의 완성된 고전역학같은 것을 배울때도 나는 힘겨운 문제에 부딪혔다. 수학과 문제풀이를 외울수는 있었다. 그러나 뭔가가 개념적으로 뒤죽박죽이 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역학을 배우면서도 시간이나 질량이나 힘같은 것이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에 잠기다가 혼란스러워 지는 일이 많았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것은 어느정도 철학의 문제라고 할수가 있다. 수학과 개념들은 철학적 이유, 실용적 이유로 해서 도입되는 것인데 한국의 교수들은 그 문제들이 왜 중요한가라던가 그 문제들을 왜 그렇게 풀게 되었는가 도대체 우리는 그걸왜 하는가 하는 배경에 대한 논의보다는 이미 알려진 문제의 문제 풀이 테크닉에 강의를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답을 외우고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암기식 교육이기는 당시의 대학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배우기 원했던 학문의 일부일수는 있지만 핵심이 될수는 없었고 나는 물리학을 공부할수록 뭔가 핵심이 없이 껍데기만 배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만 쓰면 나의 20대는 온통 실망스러운 일만 있었던 내리막길만 있었던 것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도 많았다. 나는 연애감정에 빠져 인생에 대한 장미빛 환상에 빠졌던 적도 있었고 어떤 연구주제에 대한 열정에 온통 몰입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생산적으로 결과를 도출하고 있다는 충만감을 즐기기도 했다. 비교적 어린나이로 국제학회에 가서 나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들, 연구원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처음 가졌을때 나는 잔뜩 고무되었으며 나의 장래와 학문적 잠재력에 대해 큰 기대를 하게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일들의 결과로 이제와 뒤돌아보면 여러가지 욕망과 야심과 기대를 쫒아다니느라 실망과 희망과 좌절이 뒤범벅되어 정신없었던 20대로 그 시절을 기억하게 된다.
20대에 내가 공부하던 일을 말하는데 있어서 내가 종종 언급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내가 석사 1학년때 레플리카 방법이라는 통계물리학적인 방법을 써서 뭐가를 계산하려고 했던 때의 일이다. 그 계산은 지긋지긋하리만큼 복잡했다. 그리고 가정없이 푸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어떤 적절한 가정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 가정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 하는 것은 경험과 직관이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한가지 아이디어를 내서 계산을 진행시켰는데 나의 미숙함과 계산의 복잡성으로 인해서 몇달이나 계산을 진행시켰는데도 계산이 어떤 결과를 생산하는지 알수가 없던 형편이었다. 나는 오류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계산을 다시해야 했는데 그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나와 지도교수는 우리의 계산에 대해 확신을 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리 초록을 작성해서 독일 베를린에서 있는 학회에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약속을 해둔 참이었다.
그렇게 약속한 여름이 다가오고 학회가 한달이 좀넘게 남았을뿐인 어느날 나는 거의 반년은 진행시켜온 계산의 결과를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내가 가정했던 가설을 가지고는 계산은 전혀 컴퓨터 시물레이션의 결과를 설명하지 못했다.
나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 결과를 지도교수에게 말할수도 없었다. 나의 첫번째 해외 학회발표는 재앙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시간은 하루하루 흐르고 지도교수에게 결과를 말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해진 어느날 나는 학교에 있던 맥주집 2층에서 계산한 종이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그 집을 통나무집이라는 뜻으로 통집이라고 불렀는데 그 통집의 2층에서 맥주를 마시던 나는 문득 1층에 지도교수가 와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다. 만나면 반드시 결과를 물어볼텐데 난 뭐라고 해야 할것인가. 뭔가 다른 계산을 진행시키고 있다고라도 이야기할수 있어야 하지 않을것인가.
난 약간은 취한 머리를 가지고 집중해서 임시방편으로라도 계산을 진행시킬 새로운 가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후 나는 어떤 새로운 가설을 생각해 냈고 그 가설을 생각해 낸 순간 이것이 모든 계산을 단순화 시킬것이며 시뮬레이션 결과를 잘설명하는 계산을 하게 해줄것이라는 직감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통나무집에서 간단한 계산을 시작했는데 내가 다시 지도교수의 존재를 생각해 냈을때는 교수는 이미 어디론가 가버리고 난 후였다. 그 가설로 나는 1주일만에 새로운 계산을 마쳤고 원하던 결과를 얻어서 학회에 가서 발표를 했다. 내가 그걸로 무슨 세계적 논문을 쓴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 내가 공부하던 중에 몇번이나있었던 가장 희열에 넘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것은 하나의 징크스처럼 되어 나는 석박사기간동안 문제가 안풀리면 통집에서 술을 마시며 계산을 했다. 수없는 좌절의 나날들이 있은후 한번의 직관으로 문제가 풀려나갈때 나는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답이 존재할것이라는 희망을 가질수 있었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눈에 대한 희망이기도 했다.
나의 20대를 말하는데 있어서 나는 내가 포항공대를 졸업했다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포항공대 2회 입학생이었는데 당시 신설학교였던 포항공대는 전교생이 기숙사생활을 하고 학생수가 작았기 때문에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건 모두가 모두를 아는 작은 마을같은 느낌이었다. 대학총장이 뭔가 할말이 있으면 때때로 전교생을 강당에 불러놓고 이야기를 하는, 학생회사무실을 우연히 방문한 대학총장님과 학부생이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10시쯤에 이야기를 듣기 시작해서 4-5시까지 잡혀 있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이런 공동체적인 느낌은 훗날 학생수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희석되었지만 나는 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학교를 떠나기 전까지 이 공동체안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나의 20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변환이었던 동시에 훗날에는 나를 가두는 테두리가 되기도 했다.
우선 내가 서울의 집을 떠나 포항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우리 부모님의 세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포항공대는 전액장학금을 지원하고 생활비보조까지 있었기 때문에 돈문제도 있었긴했지만 내가 원한다면 서울의 대학을 갈수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는 집을 떠나 홀로 서고 싶어했다. 집안에서는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수 없을 것같았다.
학교생활은 매우 즐거웠다. 재미있는 친구들과 밤을 세워 공부하거나 여러가지 황당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면서 밤늦게까지 떠들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교수들은 학생들을 자주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영어 회화라고는 전혀 하지 못했던 내가 영국사람인 포스톤 교수의 부인에게 영어를 배웠던 곳도 여기였고 교환학생 자격으로 세계라는 곳을 보게 해준곳도 그곳이었다. 요즘이야 해외어학연수도 흔하지만 당시에는 그건 큰 혜택이었고 매우 드문일이었다.
학생들은 여러가지 세미나나 강연을 들었고 힘겨웠던 숙제나 프로젝트때문에 밤을 새는 일이 많았다. 한번은 숙제가 너무 과하다고 한 강좌를 수강하던 학생들이 항의로 모두 강의를 빼먹고 경주로 놀러갔던 사건도 있을 정도였다. 학생들은 대개 3-4개에서 많으면 열개까지도 여러가지 동아리에 포함되어 활동했고 학생수가 적다보니 다들 어디선가는 리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많이 공부하고 많이 방황하고 많은 시간을 교내와 학교 근처의 시장터 술집에서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과 한두해 전만해도 입시공부를 하면서 부모들의 집에서 정해진 일과를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커다란 변화였다. 나는 내 삶의 규칙을 내 스스로가 만드는 자율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20대의 나에게 환경으로 작용했던 포항은 서울같은 대도시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랐고 거의 여행을 해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포항에서 살게되면서 나는 소도시에서 사는 즐거움, 여유, 그리고 자연의 혜택같은 것을 보다 크게 느끼게 되었다. 나는 포항근처의 구룡포 바다까지 때로는 버스로 때로는 자전거로 때로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곤 했다.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빽빽하게 사람과 건물이 차있는 서울에서 포항으로 처음 내려올때는 나는 그 생활이 실망스러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에 가까운 생활, 보다 여유있고 조용한 중소도시의 생활이 보다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농촌생활을 할정도로 자연친화적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가능하다면 자연과 가까이에서 사는 삶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그 포항의 최대의 문제점은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이었던가 하는 것에 상관없이 그곳이 어느정도 폐쇄된 장소였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부모님집을 떠나 포항으로 내려온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진입이었지만 포항생활이 길어지면서 포항은 나를 제한하는 또다른 작은 세계가 되었다. 포항공대는 서울의 다른 대학과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포항안에서도 외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이제와 생각하면 어느정도 한국안에 동떨어진 섬같은 곳을 만들려는 시도처럼 보이는데 새로운 학풍, 새로운 대학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경우 그럴수도 있을 것이다. 타대학과 똑같아 지는 것을 막기위해 그 영향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공동체는 주변환경에 적응하는 것과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문제의 양쪽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자기만의 정체성에만 빠지면 세상과 무관해진다. 세상에 대한 정보를 차단당하고 공부벌레로만 학생들을 교육시킨다면 그 학생들은 사회에 대한 애착이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왜 사회적 지원을 통해 학생들 교육을 지원해야 하는가에 의문이 생긴다.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자 마자 물에 빠진 호랑이처럼 힘을 쓰지 못한다. 바깥 세상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특이한 조건에 잘 적응된 부속품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물론 외부의 영향이 내부의 풍토를 순식간에 뒤엎어버릴 정도가 되면 그곳은 알맹이가 없는 식민지가 된다. 어차피 핵심적 판단과 흥미로운 사건들은 외부에서만 일어나고 그곳은 바깥에 종속적인 처지가 되고마는 것이다. 포항공대를 비롯해서 한국의 이공계 대학은 정도의 문제지만 거의 대부분 미국 학계를 쳐다보는 식민지적 위치에 있다고 할수가 있었다. 우리끼리의 토론과 흥미에 따라 학문의 발전이 이뤄지는게 아니라 미국에서는 요즘 어떤 것이 유행하는가 그런 학문연구의 흐름에서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방향으로 사고가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포항공대는 한국안에서 타 대학들과 비교했을때는 자기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혹은 그저 우연히 지리적으로 떨어진 포항에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된것인지도 모르지만, 작고 닫힌 시스템에 가까웠다. 박사과정에서 몇년을 보내면서 나는 모든 것이 너무 갑갑하게 느껴졌다. 지도교수와도 감정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일이 생기곤 했는데 이는 내가 묶여있고 갇혀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나는 지리적으로도 갇혀있을 뿐 아니라 병역문제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박사과정 말엽에 군복무의 의무를 마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어차피 당시의 규칙에 따르면 나는 박사를 받고도 5년을 한국밖으로 갈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눈이 나뻐서 공익근무요원 판정을 받았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7-9살정도는 연상이라는 사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편한 보직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서울의 한 손님없는 주차장에서 시간을 죽이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 공익근무요원 시절은 돌아보면 내게 매우 소중하고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준 생활이었다. 나는 또한번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내가 거듭거듭 이런 경험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우리는 정말 매우 제한된 환경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었다. 박사과정학생으로 살다보면 이세상에 석박사 학위없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군사훈련소로 가면 또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당시의 나에게는 그것이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일단 훈련소에서 나는 일종의 멸종위기에 놓은 천연기념물같은 존재였다. 공익근무요원이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에는 뭔가의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인 경우도 많았다. 내가보기엔 3분의 1은 그런 사람이었고 얼굴에 칼자국난 깡패같은 사람도 있었다.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하는 친구, 밴드에서 기타치다가 온친구, 가스통 나르던 폭주족 친구, 술집 삐기같은 것하던 친구, 이런 친구들에게 나이가 7살이나 많고 물리학 박사과정에 있다는 나는 외계인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분명 자포자기의 냄새, 범죄자적 윤리의 냄새가 났다. 단돈 몇만원을 위해서 기꺼이 영창에 갈만한 짓을 저지르는 무모함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내게는 모두 친절한 편이고 연장자대접을 해주었다. 많은 기억이 있지만 지금 이순간은 나를 공부에 관한한 뭐든지 해결가능한 사람쯤으로 생각한 한 친구가 생각난다. 중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붙겠냐는 거였다. 무척이나 범죄자적이지만 무척이나 순진하기도 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뿐만 아니라 또다른 세계로 진입하기도 했다. 바로 결혼이었다. 당시에 나는 일과가 끝난후 중국어와 영어학원 두개를 한꺼번에 다니고 있었는데 영어학원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만난지 6개월만에 그녀와 결혼했다.
돌아보면 나는 반드시 그녀와 결혼해야겠다는 확신을 아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에 대해 제대로 뭐하나 아는 것이 없던 시절에도 그랬다. 어머니가 내가 사귄다는 여자가 집안이 어떤지 뭐하는 사람인지 물어볼때 나는 내가 그런것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내게는 이여자와 결혼해야겠다는 지관적 답이 있었을 뿐이다.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귀한후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학위를 받고 자유로워졌다. 학위를 받았을 무렵 나는 이스라엘의 한 교수에게서 같이 일하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고 바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한국을 떠나기로 한것이다. 나는 다시한번 새로운 세계로 떠나고 있었다. 실은 그 교수야 말로 내가 인공신경망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 논문을 쓴 사람이었으며 학회에서 몇번 만나적이 있어서 친근감도 있기도 했다. 나의 20대가 끝난 무렵 나는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가는 비행기를 탓다.
사색하지 않는다고 해도,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생각은 주변 환경과 부딛히면서 바뀌기 마련이다. 그런의미에서 물론 나의 20대는 나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와 돌아보면 그것은 내가 어렸을때 겪었던 일들과 같은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우선 그것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생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원하는 것을 위해 살아보고 그것을 얻는데 실패하거나 성공해 보는 시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했던 생각 즉 삶에 대한 경험을 얻는 일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내마음이 이끄는대로 살아보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이런저런 기회를 제공받을수 있었으므로 여러가지 경험을 가질수 있었다. 돌아보면 감사한 일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그랬듯이 중요한 경험은 항상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기존의 세계가 무너지고 또다른 세계로 혹은 전의 세계를 포함하는 더 큰 세계로 세상이 바뀌는 경험이었다. 내가 우리집 마루 책장의 세계에서 혹은 부모님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더 큰 세계로 옮겨가게 되었듯이 그것은 대학이라는 세계로 들어가고 나오는 시간이었고 한국 사회라는 곳 혹은 세계라는 곳으로 나의 관심과 흥미를 넓히고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기존의 세계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성장이라고 할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좌절과 자신의 왜소함을 알게되는 시간일수도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나는 일상에 묻히고 나자신의 이런 저런 일에 묻혀서 어떤 일들이 내게 내적 긴장감을 조성하는지, 나의 인생의 길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뭐가 중요한 문제인지를 생각하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나는 그것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잊는 일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인데 살다보면 돈을 벌면 된다는 부분만 빼고 다른 부분을 잊게 되기 쉽다. 그래서 이제는 돈이 얼마가 있든 행복해 질수 없는 상황이 되어도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생각해내지 못하고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게 되기 쉽다.
나도 논문이라던가,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문제따위로 20대를 보내면서 원천적이고 단순한 질문은 잘 던지지 않게 되었다. 이따금 멈춰서서 사색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이제 넓어지기만 한 이 세상에서 문제는 너무도 복잡해서 어떤 단순한 견해가 형성될것 같지 않았다. 사색은 처음부터 아무 쓸모가 없어보였고 책들도 그다지 내게 와닿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들의 말도 거의 대부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돈키호테를 읽지 않은 사람은 소설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라는 식의 말은 엄청난 벽을 만든다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분량의 거의 끝도 없는 자료들, 책들을 늘어놓으며 이런 걸 다 모르는 사람은 입닥치고 머리도 돌리지 말고 일단 읽고 외워라라고 한다면 실질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공부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랑시에르나 칸트를 읽지 않은 사람앞에서 아 그건 랑시에르가 혹은 칸트가 다 생각해 놓은거야 하고 말하는 식의 그것말이다.
나는 아주 가끔식 뒤뜰에 나가 엄청나게 거대하게 산처럼 자라난 쓰레기 더미를 보고 이걸 치우는 건 불가능해 라고 생각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하는 그런 처지가 되었다. 세상에 대한 경험이 늘면서 이런 저런 설명하고 연결시켜야 할일은 많아졌는데 나는 그걸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할 시간도 자신도 능력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살다간 언젠가 저 쓰레기더미가 무너지며 나를 덮쳐올 것이다라는 불안감, 나는 이제 저 쓰레기를 평생 치울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이 있었다. 결국 나는 남의 말만 따라 하며 사는 로보트 같은 인간이 될 뿐이리라. 30이 될 무렵 나는 철학적 패배감에 젖어있었다. 30이 된다는 사실, 이제 더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은 나를 더더욱 우울하게 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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