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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나의 철학적 자서전

나의 철학적 자서전 4

by 격암(강국진) 2010. 5. 3.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앞의 글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석사 1년차때 나는 어떤 문제를 풀기위해 아주 길고 긴 계산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계산은 종종 요약이 50페이지가 넘는 것이었으며 적어도 당시의 나에게는 매우 복잡했기 때문에 나는 그 계산을 7-8번이나 반복하면서 혹시 틀린 곳이 없는가를 확인해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 긴 계산을 하고서도 나는 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본래 좋은 계산은 대개 처음에는 점점 복잡해지다가 결론에 이르르게 될무렵에는 단순해 지기시작해서 결과는 단순 한 것이 된다.  그런데 50페이지가 넘어가는 계산을 했는데도 내 계산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만 있었고 나는 어떻게 그걸 해결해야 할지 몰라 우울해 하고 있었다. 


최악의 순간은 바로 그 계산 요약원본을 분실한 순간이었다. 나는 따로 복사본도 없었기 때문에 그게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된 순간 머리속이 하햫게 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포항이며 서울이며 사방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결국 내가 4-5달이나 해온 그 계산이 없어졌다는 것을 인정할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주일을 우울하게 지낸후에 그 계산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계산을 다시 시작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내가 7-8번이나 확인했던 계산이 틀렸었다는 것을 발견했고 계산은 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풀려나갔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진도를 나갔다고 생각할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종종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일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서있는 곳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용기를 낸다고 해도 때로 세파가 우리를 어딘가로 던져넣기때문에 우리는 어쩔수 없이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용기를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우리는 여러가지 질문들과 부딪힌다. 질문은 계속되며 우리는 결코 그 질문에 대해 최종적인 답, 확실한 답을 가지는 일은 없다. 다만 한가지 질문이 다른 질문으로 바뀔 뿐이다. 사춘기의 청소년은 사춘기의 질문에 대해 궁극적인 답을 찾았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제 전과는 다른 질문을 던질때 우리는 전의 단계에서 벗어난다. 어떤 진지한 질문이든 궁극적 답은 찾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옮겨갈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음번에는 어떤 질문으로 옮겨가는가 하는 것이며 그 질문은 그 앞의 질문에 얼마나 성실하게 답하려고 노력했나에 따라 달라지기는 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라나면서 다른 질문에 매달린다. 그리고 미처 답하지 못한 질문들은 쌓여만 가며 보통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미 우리는 그런 수준의 질문은 답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할수 있을 만한 용기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렇게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경우다. 가르친다는 것은 배우는 사람 이상으로 가르치는 사람에게 더 큰 가르침을 준다. 다시한번 기초적 질문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 때문이다. 자기가 예전에 기초적인 것을 배우면서 생각했던 기본적인 질문들을 다시 생각해 보면서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이 설명하고 전달해줄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종종 느끼게 되는 법이다.


30대가 되면서 나는 아버지가 되었다. 나는 얼마지나지 않아 내가 곤혹스러운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나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내딸 예나는 내가 겪어야 했던 여러가지 당황과 좌절 그리고 시행착오를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피하게 해주고 싶다. 그것이 부모된 사람이 해야할 역할일 것이다. 그러자면 나는 아이와 함께 아이의 문제를 풀어나가고 적어도 같이 생각은 해봐야 한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에게 인생을 복습하게 만든다. 부모는 아이를 가르치면서 혼자서는 잘하기 힘든 인생복습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부모가 되봐야 어른이 된다는 세상의 말에는 깊은 경험에서 나온 진리가 있다. 


예나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질문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금새 나는 합리적이라던가 공평이라던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규칙이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어떻게 하는 정도가 '공평'한 것이고 '합리적'인 것일까. 나는 원한다면 아는 것이 없는 예나에게 얼마든지 불공평하게 굴고 그런 것들이 '원래' 그런거라고 말할수 있는 위치에 있다. 밥은 본래 엄마가 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아이는 집안일을 거들어야 하는 것일까. 뭐가 '원래' 그런 것이고 합리적인 것이고 공평한 것일까. 나는 이에 대해 독단적으로 답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고 아이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아이가 뭔가 불공평하다고 깨달을 정도로 머리가 좋아지기 전에는 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뭐가 합리적이고 공평한가를 깊게 생각해야 하는 사람은 마땅히 나였다. 


나는 이런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이 모든 문제들 즉 공평이라던가 합리적이라던가 하는 문제들을 포함한 많은 질문들은 하나의 질문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른 모든 것들의 의미를 제공하는 기준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질문이야 말로 질문들의 무게중심이고 질문들의 제로점이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질문이다. 


어떤 것을 왜 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왜 중요한 가. 그런 질문들을 거듭해서 묻다보면 우리는 결국 그런 일을 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으로 돌아가게 되고 만다. 결국은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일이 중요해 진다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은 그냥 정체성으로 머물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우리는 너무나 그것에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그 이데올로기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견해가 있을수 없다는 착각에까지 빠져든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은 인간 이데올로기에 빠져있다.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며 이 세상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 등의 이야기를 계속 해서 들은 결과다. 그들은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다른  세상의 동식물들의 그것에 비해 끝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떤 왕족이 있는 것이다. 그 왕족은 어릴때부터 그 왕족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왔으며 하고 있는지 이야기들은 끝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반백성의 목숨 천만개보다 우리 가문의 목숨하나가 더 귀하다. 아마도 본인이 그런 왕족가문출신이 아니라면 이런 사고를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중심의 사고가 이 왕족줌심의 사고와 본질적으로 틀린게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차이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수 있을 것이다. 


정체성에 기반한 이데올로기는 대개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나는 누구다에서 시작해서 이세상의 문제는 무엇이고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하는 이야기로 나가서 마지막으로는 나는 이러저러한 것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나간다. 


왕족 이데올로기는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나는 이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위대한 왕가의 자손이다. (정체성) 이 세상이 혼란 스러운 것은 우리 왕가의 권위가 훼손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문제점,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나는 우리 왕가의 권위를 세워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겠다. (해결책)


막시즘은 이렇다. 우리는 노동자다. 이 세상이 비극과 착취로 물들고 있는 것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우리 노동자는 단결해서 자본가들의 착취를 끝내야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러가지 차원에서 여러가지 정체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부모인가, 우리는 어떤 가족이고 한국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의 직업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면 역시 새삼스레 중요했던 것으로 생각되어 지는 것은 내가 어떤 학구적 태도때문에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름대로의 절박성이 없으면 질문은 던지나 마나다.자기가 처한 환경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제대로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된 힘이 나온다. 나를 다시 질문에 몰두하게 만든 것은 아버지로서 딸앞에 선 그 위치였다. 모든 스승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학생들에게 너무나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스승들을 발전시키는 것은 학생들이다.  


나는 난감했다. 아빠를 믿고 자라나는 딸아게 나는 사실 뭐가 좋은지 뭐가 나쁜지 전혀 모른다. 인생이 뭐하러 있는 건지, 그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할수는 없었다. 아니 고백하냐 안하냐의 문제 이전에 내가 합리적이지 못하다면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짓을 딸에게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저기 어디 아마존 밀림의 부족에서 딸에게 무식한 짓을 하는 야만인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다면 과연 나는 야만인이 아닌가 생각해 볼일이다. 합리적인게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야만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것은 설득력이 없다. 내가 무지하다는 것은 딸이라는 환경을 만나서 새삼스레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잘 모르겠지만 그냥 이렇게 늙으면 된다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인간의 특징이라던가, 한국 문화의 특징, 개인으로서 나 자신의 특징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것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게 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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