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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나의 철학적 자서전

나의 철학적 자서전 5

by 격암(강국진) 2010. 5. 5.

5. 사회적 자아. 


앞의 글에서 내가 부모가 되면서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전체적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학위를 받고 이스라엘로 떠난 이후 지난 11년동안 이스라엘, 미국, 일본 세개의 나라에서 살았다. 그것은 다른 여러가지 의미를 제외하고도 끊임없이 한국이 아닌 것, 한국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겪고 만나는 시간이었으며 따라서 동시에 무엇이 한국인지, 무엇이 한국인인지에 대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질문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몇개의 나라에 대한 경험담을 쓰고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선진 사회는 한가지 특징을 가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그 사회가 매우 열린 사회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의 핵심을 굳건히 한 사회라는 점이다. 이것은 언뜻 들으면 매우 모순적으로 들린다. 자신의 정체성만 지키려고 한다면 폐쇄적이 될 것이고 열린 사회를 추구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받게 될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선진사회가 사회적 화합과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열린 사회일수 있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사회가 공감하는 중심적 질서, 중심적 가치에 대한 합의가 굳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어떤 중심적 가치를 지키는 한에 있어서는' 모두 자유라는 자유가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것은 법치가 없는 상태가 가장 자유로운 상태라는 주장과 같다. 실질적으로는 법없는 세상은 대개 잔인 할 뿐이다. 


이같은 특징은 유기체, 생명체로서의 사회를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생명체는 끊임없이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고 외부의 물질을 받아들여야 살아남는다. 그러나 동시에 외부의 환경적 자극에 대해 수동적이기만 하다면 생명체는 그 생명을 유지할수 없는 것이다. 작은 자극에도 수없는 변종을 만들어 내는 생명이라면 진화던 생존이던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존재는 예를 들어 유전자의 화학적 안정성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도 마찬가지처럼 보인다. 사회도 끊임없이 변하고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고 외부의 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적 유전자의 안정성, 중심적 정체성적 가치의 안정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저 산산히 흩어져 버릴 뿐이다.


예를 들어 여기 노란 머리를 하고 청바지를 입고 코에 피어싱을 한 일본인 청년이 있다고 하자. 이 일본인 청년은 일본인 다운것일까 아닐까. 쉽사리 일본인 답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본인답다는 것이 기모노를 입는 외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일본인답다라고 말할때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인간적 의리다. 제아무리 일본적 외모를 하고 있어도 은혜를 모른다면 일본인답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 많은 일본인인 것이다. 


이 예에서 보듯이 우리가 뭐가 한국인다운지를 정의하면 그 이외의 것에 대해 개방적일수있게 되고 소통이 쉬워진다. 그렇지 못할때 우리는 중요성에 대한 개념이 없이 모든 것이 다 관습으로 지켜야 하는 것으로 주장되거나 모든 것이 다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버리고 만다. 원칙없는 사회가 더 열린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외국인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선망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아이에 대한 교육에 대한 사색은 한 인간이 어떤 근거로 합리적으로 살아갈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번졌으며 이것이 나를 자연스레 이끌고 간 방향은 하나의 공동체 안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을 생각하는 일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가치적 문화적 공동체라는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은 삶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일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공감대를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안에서 살아감으로서 시간적 일관성에 더하여 공간적 사회관계적 일관성을 성취할수 있다. 이것은 불안하고 초초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훌룡한 지지대가 될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당시의 나로서는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연약하고 한계가 있는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공동체가 있어야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어떤 공동체인가. 공동체는 작게 말하면 나와 아내와 아들딸을 포함하는 작은 가족이 되고 우리 부모님이며 형제들을 포함한 좀더 커다란 친족단체나 직장에서의 공동체도 있게지만 한국어를 쓰는 문화적 공동체, 국가 공동체의 문제를 무시할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아이를 위해 한국 사회와 소통하고 그 일원이 되고 한국사회가 성숙한 문화적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겼다. 


나는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한국 소식에 항상 귀를 기울였으며 매년 여름마다 큰돈을 들여 아이들과 아내가 한국에서 생활하도록 노력했다. 아이들이 제대로된 한국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한국 사회가 훌룡한사회로 성장하기를 기원했다. 


어떻게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나의 고민은 정체성과 그에 관련된 이데올로기, 이야기의 힘을 주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사색은 이 이야기들, 이데올로기들을 되새김질 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이 당시 내가 한때 매우 기뻐했던 깨달음이 생각이 난다. 그것은 이해는 그 대상을 객체화하고 무력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예에는 팔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모두 팔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다. 근육과 뼈가 어떻게 존재하며 그것이 신경에 의해 어떻게 연결되어 있다라는 등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의 팔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100% 이해한 순간 그것은 이제 단순한 기계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어쩌다 팔을 잃어버려도 대개 자신의 정체성이 바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팔이 없어도 나는 나인것 이다. 그러나 머리를 남의 머리와 바꿀수 있다고 해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없다. 그것은 더이상 내가 아니다. 이차이는 우리가 두뇌와 팔을 이해하는 정도의 차이가 만들어 낸다. 우리는 아직 의식이라던가 지성이 뭔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언젠가 이런 것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깊어지면 그것이 새로운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 낼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팔도 머리도 의식도 아니고 이해가 가지는 효과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떤 이유로 해서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이데올로기가 내 머리와 마음속에서 작동해서 나를 조종하려고 하는가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순간 그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힘은 약화된다. 


나는 내적 성찰이 주는 큰 힘은 상당부분 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왜 우리가 어떠한 것들을 원하게 되었고 싫어하게 되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어떤 절대적 힘들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그 이해를 돕는 중요한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적인 구조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과거, 사회적 편견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은 어디서 출발된 것인지, 우리의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 진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이 아닌 사회를 알수록 한국이 어떤 사회인가를 잘알게 되고 한국이 어떤 사회인가를 알수록 내안에 있는 한국적인 사고가 나를 지배하는 힘이 약해진다. 본래 그런것, 당연한 것이 더이상 본래 그런것이 아니라고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성찰은 자기 자신과 자기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멈추지 말고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못할때 이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 결국 세상의 것들이 어떻게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어떻게 가치를 가지게 되는가에 대한 원천적인 생각없이 아름다운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 철학에 따라 사는 것이나 어떤 아름다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두 물위에 뜬 배처럼 위태롭고 그 근원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삶의 법칙을 찾기를 원했다. 마치 뉴톤의 물리법칙같은 자연의 법칙에 대응하는 인생의 법칙을 찾을수 있기를 소망한 것이다. 자기성찰의 끝에서 나는 내가 이런 법칙을 더 열심히 찾으려고 노력할수록 나에게 더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발견했다. 절대적 법칙을 찾아헤맬수록 우리는 대개 자기망상적 인간이 되거나 거대한 시스템에 종속된 노예가 되고 말뿐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최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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