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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나의 철학적 자서전

나의 철학적 자서전 6 (마지막)

by 격암(강국진) 2010. 5. 6.

6. 자유의 길


나는 두개의 자유에 대한 깨달음을 가진 후 내가 스스로 많이 자유로워졌으며 많은 인생의 짐을 벗어던지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것은 내가 도대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찾아헤메는 것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내가 대학 초년병 시절에 도서관의 서가에 주저앉아 많고도 많은 책들을 보면서 느꼈던 좌절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내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기술 (ZMM) 이라는 책을 읽는 동안에 일어난 것이다. 정확히 내가 그 책에서 배웠다고 하지 않고 그 책을 읽는동안 일어났다고 말하는 이유는 ZMM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반드시 어떤 논리적 흐름을 정확히 쫒아간다고 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다. 그것은 공감을 한다던가 사랑에 빠진다던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첫번째로 내가 깨달은 것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옳은 법칙에 대한 것이다. 나는 과학도를 꿈꾸면서 컷고 실제로 과학도로 교육받고 공부했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논리와 증거로 이뤄지는 과학적 방법에 대한 커다란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내가 소위 인생의 문제를 풀려는 태도조차 애매한 방식으로나마 과학적 방법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학적 방법이나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도 모두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실상 그런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내곁에 있었다. 노자나 장자나 불교의 구절 하나만 읽어도 그런 이야기는 쉽게 볼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기만 할뿐 결코 마음속에서 느끼지는 못했던 것이다. 실상 현실속의 나는 절대적 원칙을 찾아헤매며 그것을 찾지 못하는 현재에 대해 불안감과 불만을 가득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것을 과학이나 논리와 어떻게 공존시켜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적이 있듯이 이런 태도는 결국은 과대망상적인 태도나 시스템의 노예가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낼뿐이다. 우리는 결국 위로 위로를 추구할뿐이요 불안함에 괴로울 뿐이다. 이 세상에 진리가 하나만 있다면 그 진리는 내 자신이 거의 메시아적인 천재가 아니라고 할때 다른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쌓아온 지식의 더미 안에 있기 마련이다는 것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시간을 써서 만들어 낸 진리에 대한 주장을 연약한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있게 부인할수 있을까. 한명의 철학자와 한 작가의 작품을 해석하는데만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나는 아직도 그 사람에 대해 조차 잘알지 못한다고 말할때 한 개인이 어떻게 집단적으로 쌓아올린 기성사회의 견해와 시각을 부인할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일억명이 소금이라고 느끼는 물건을 내가 달게 느낀다고 해서 이것은 설탕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도 내 혀나 혹은 내 머리가 잘못되었다고 믿는 쪽이 옳은 가능성이 더 클것이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를 믿는 자는 대개 도서관에 가서 노예가 된다. 시스템에 대한 노예가 된다. 거기에는 시간적으로 오랜동안 누적되어지고 수없는 사람들이 덩어리가 되어 존재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답이 있다. 절대적 진리만을 믿으면서 그앞에서 자신의 혀와 머리를 의심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많은 작은 철학도들은 헤겔이며 스피노자며 들뢰즈며 하는 철학자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결국 완전한 시스템의 노예가 된다. 좋고 나쁘고를 판단해야 할때는 남들의 의견에만 따른다. 그런 능력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주의의 신봉자들도 실상은 노예상태에 있는데 그들은 바로 똑같은 논리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원칙에 따라 세상이 돌아간다는 가정에 근거해서 사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 숭고함을 외치는 그 입과는 상관없이 실제로는 가장 똑똑한 사람, 가장 현란한 말쏨씨를 자랑하는 사람, 혹은 어떤 집단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저 길고 긴 도서목록을 가지고 서둘러 수박겉핧기로 책을 읽지만 결국은 누군가 더 잘난 사람에게 더 잘난 집단에게 구속 된다. 어떻게 미약한 개인이 시스템보다 똑똑할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그저 평범한 개인이 저 똑똑한 사람의 결론보다 옳은수가 있겠는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따르지 않는것은 토론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졸렬한 행위가 아닐까? 이런 논리들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쉽사리 과대망상증 환자의길을 간다. 즉 온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바보라서 내가 아는 것을 모른다고 믿고 그길을 혼자서 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이 세상을 구할 메시아는 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두번째의 그러나 첫번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깨달음은 인생에 있어서 진짜로 중요한 문제는 바로 가치판단의 문제, 윤리학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이것역시 많은 사회적 교육의 결과 나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던 것이다. 


부모님의 교육을 받는 것, 학교에서 오랜 간 교육을 받는 것은 모두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답을 듣는 것에 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알고 있고 선생님이 알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많은 비 철학전공의 사람들은 윤리학의 문제를 매우 단순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즉 우리는 이미 옳고 그른 것을 알고 있으며 비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사회적 공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 그렇지 못하게 우리를 만드는 유혹과 맞서 싸우는 문제로 윤리학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가치는 내가 느끼는것 안에 있다. 제대로 느낄수 있다면 모든 지혜의 책은 불질러 버려도 좋다. 아니 때로는 고의로 불질러 버려야 한다. 자신을 믿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를 성취하는 것은 자유를 주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유에 대한 이해와 고민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고민이 충분치 않았다면 믿을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믿는 쪽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어떤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들은 언어적인 문화적인 장벽을 느낀다. 그들은 평생을 공부해도 익숙해지지 않은 무한한 지식의 산더미안에서 진리를 찾아헤매야 하는 숙제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우리가 느끼는 것에 있다면 우리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 숙제가 사라진다. 우리는 자유가 된다.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벗어던질수 있다. 소위 더이상 찾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풀잎하나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해서 세상 모두는 보나마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태도에 대한 것이다. 자유로워 지기전에는 그것은 엄청나게 제출기한 넘긴 숙제를 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이었다고 하면 자유로워지고 나면 그것은 숙제가 끝나고 한가한 방학에 취미삼아 이책 저책을 넘겨보는 일이나 그저 순리대로 나에게 찾아오는 지식과 대화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무와 유를 구분하지 않고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무와 유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내가 그로 부터 벗어났다고 하는 시스템, 절대적 진리, 누적된 논리, 과학의 세계를 부인하지도 종속되지도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많은 지식을 누적시켜 문명을 만들었다. 우리는 많은 증거에 근거하여 아름다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었으며 상식과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나는 그런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절대진리의 차원에서 믿어야 할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을 도구로서 현시점에 내가 발을 딛고선 현재점으로서 소중히 생각하려고 한다. 절대적 문화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발전해온 소중한 것이다. 절대적으로 올바른 자아란 없다. 그러나 내가 어릴적으로부터 경험하고 키워온 이 나라는 존재의 심성은 한계가 있는 동시에 중요한 것이다. 편견없고 희노애락도없고 문화적 역사성도 없는 그런 존재, 나의 역사를 부인하는 듯한 초월적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데올로기는 항상 그 한계가 있다. 그리고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리고 오직 그런 사람에게만 이데올로기는 훌룡한 도구가 된다.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생명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생명체로서 어떤 테두리를 가지고 명확히 구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내부는 세상이 반영되어 존재한다. 나는 우리 가족을 반영하고 한국을 반영하고 인간문명을 반영한다. 나의 가족이 어떤 성질을 띈다는 것은 동시에 나도 역시 그런 것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커다란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환경에 대해서 말할때 나는 두가지를 근간에 자주 말하곤 한다. 하나는 거주지로서의 집이고 또하나는 환경으로서의 인간이다. 집은 거주하는 장소로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거주의 장소로서의 집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환경으로서의 인간, 이웃과 가족이다. 살아가는데 있어서서 그 질을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이다. 좋은 이웃이 있는 동네가 전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곳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같은 것을 너무 쉽게 무시하고 아파트의 크기나 도로나 쇼핑몰, 학교등에만 신경을 쓰는 듯하다.  


내가 자유의 길이라고 썼지만 자유의 길이란 반드시 문명에 반대하고 정부에 반대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모든 사회적 관습에 반대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한번 더 강조하고 싶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에 얽매이는 것이다. 법이나 관습이나 문화는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수단이라는 한계에 머문다는것을 잊지않는 한도내에서 그렇다. 과학적 사고, 엄밀한 사고, 정량적 사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래도 저래도 개의치 않고 항상 싱글벙글 웃는 것은 위선이고 가장 부자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항상 성인인척 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 어떻게 자유인가. 나는 초등학생도 자유로워질수 있다고 믿지만 불안과 부자유의 시기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초등학생때 지금 아는 모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을 크게 유감스러워 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태어나서 결국은 죽는다. 육신이 가진 삶이 결론만 볼것 같으면 육신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결론에서 바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자유를 방종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없기 바란다. 


맺는 말


이글은 내 과거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정리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지 누군가에게 뭔가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약과 생략이 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은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나는 몇번이나 글을 썼기 때문에 이제와 자세한 공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것들, 그리고 합리적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에 써서 정리한 것들이 합리적 사고의 근거와 고의로 실패한 교육이다. 블로그에는 고의로 실패한 교육은 나라별로 나눠져서 이스라엘, 미국, 일본 편으로 각각 올려져 있다. 


자유의 길, 허무를 이기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철학을 위한 여행이라는 소설과 가치판단에 대한 연작에세이 무지한 선택에서 정리해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 가족 더 나아가서는 나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그러나 나 자신이 보다 어렸을때 도움을 더 빨리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 중 이런 글을 읽고 흥미를 느꼈으며 더 자세한 것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쓴 글들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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