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하자. 거기에는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 방에는 사람이 몇명이었냐던가 그방에 있는 것이 여자인가 남자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쉽게 대답할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그 여자 신발의 브랜드가 뭔가. 그게 비싼 것인가 싼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지 못할것이다. 신발 브랜드나 처음 본 사람의 신발가격따위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것을 보는 듯하지만 실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주로 본다. 그래서 보이는 데도 보이지 않는 맹점이 생긴다. 그런데 요즘 보면 나는 한국 사회전체에 어떤 공통된 맴점이 있는 듯하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예로 국내 핸드폰 업체들과 아이폰의 차이를 볼수가 있다. 아이폰, 아이패드가 나올때 심지어 나오고 난 후에도 그 제작사들을 물론 그에 대한 기사를 쓰는 사람 그리고 많은 네티즌 조차도 중요한 것이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라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그걸통해 소비되는 컨텐츠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이야기는 많이 지적되었으므로 아마 이젠 많은 사람들이 아 컨텐츠가 중요하다구 나도 알어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들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로 그걸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컨텐츠라는 것은 어떤 정보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쪽' 뿐만 아니라 '저쪽'도 중요하다. 좋은 컨텐츠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정의되기 보다는 이쪽과 저쪽의 관계 받는 사람쪽의 입장이 아주 중요하다.
하드웨어적 발상이란 이런것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CPU를 가지고 가장 얇고 가장 선명한 스크린을 가진 핸드폰을 만들자. 그럼 이게 안팔릴수가 없다. 즉 뭐가 좋은지 뭐를 추구해야 하는지는 이미 확실히 알고 있다. 따라서 소비자의 의견은 사실 들으나 마나다. 뭐가 좋은지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삼성에서 아이폰보다 더 훌룡한 성능의 하드웨어기계가 나와도 아이폰을 능가할거라고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삼성이 노력하면 아이폰보다 훌룡한 하드웨어를 만들수 있을거라고 믿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기계가 매력적일것이며 세계적으로 히트칠거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일까. 이런 자명한 질문을 많은 사람들은 피한다.
새로운 변화는 소셜네트웍의 인기에서 보여주듯이 홀로 존재하는 것에서 관계의 중요성으로 바뀌는 것이다. 실시간적인 반응,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즉시 제공해 주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즉 소비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개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번에 끝나는 것도 아니다. 계속적인 피드백이 중요하다. 그렇게 어디론가 진화해 가는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오직 민주주의로 밖에 가능하지 않다. 애플에서 모든 소비자들이 원하는 앱을 혼자서 다 만든다고 하자. 그러면 만들수도 없고 만든다고 해도 모든 책임도 져야 한다. 수없는 소비자들의 항의로 애플은 사업에 실패할것이다.
그런데 애플이 자신의 사업을 일정부분 개방한다. 이제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구분이 안된다. 애플은 관리자로 역할할뿐 앱들의 퀄리티에 직접 책임이 없다. 컨텐츠가 중요할때 그 컨텐츠를 독점생산하려고 하면 불가능해진다. 개방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쓰이건 그냥 두고봐야한다.
만약 이문제가 단순히 아이패드나 아이폰의 문제라면 나는 굳이 이글을 다시 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똑같은 태도는 토목산업중심의 개발에서도 나타난다. 서울을 가꾼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영어마을을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만드는가. 남산가꾸기는 어떻게 하나. 4대강 개발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가. 여기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토건업자의 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건물만 보인다. 그들의 눈에는 청계천처럼 그냥 물길 만들면 철새며 물고기는 저절로 모이게 되어 있다. 가든 파이브처럼 건물 만들어 놓으면 동양최대로 크게 만들면 사람들은 모이게 되어 있다. 4대강을 파헤쳐서 시멘트로 칠하면 당장은 물고기가 다죽겠고 사람들도 흩어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다 모이게 되어 있다.
이런 시각대로라면 이런 것이다. 우리나라에 노벨문학상이 안나오면 모든 학생들에게 연필과 종이를나눠주면 된다. 연필과 종이를 나눠주면 소설을 어차피 저절로 씌여지게 되는 것이다. 좋은 문학작품이 안나오면 연필과 종이가 부족한 모양이니 더 많이 나눠 주거나 이번에는 노트북 컴퓨터를 나눠주면 된다.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한번 파괴된 자연과 역사도 그렇게 당연하고 쉽게 복구되는 것이 아니다. 토건 업자의 눈에는 문화, 풍습, 인간관계같은 것이 안보인다. 그러니까 재개발한다면서 한지역을 통째로 공사판으로 만들어서 그 동네사람이 다 흩어지게 만들어도 큰문제 없는 것이다. 아파트 다만들어지면 사람은 다시 오기 마련이니까. 그러면 다시 그 옛날의 마을 분위기가 다시 돌아올것이다. 피맛골을 보면서 그들은 건물만 본다. 건물을 부셔도 큰 문제가 될것이 없다. 나중에 건물만 다시 복원시키면 피맛골은 그대로 살아나니까.
진짜로 중요한 건 컨텐츠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컨텐츠를 만들고 인간이 컨텐츠를 소비하며 정보는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흐르는 것이다. 사회에자유가 넘칠때 컨텐츠가 많아진다. 모두가 기계처럼 규칙대로 살면 새로운 소식은 필요없다. 오늘울었던 기계 뻐꾸기는 내일도 우니까. 어떤일에 대해 조선일보사설에 뭐라고 나오는지는 안읽어봐도 알지 않는가. 그건 컨텐츠가 아니다.
누군가가 애플빠는 있는데 왜 삼성빠는 없는가라고 물었다. 단순히 회사가 커서 그럴까? 문화가 다른것 아닐까?
이런 예는 개발사업과 핸드폰에서만 나타나는게 아니다. 문화산업도 마찬가지다. 문화산업이 좀 된다고 하니까 큰 자본이 들어간다. 그리고 부자분들께서 최고의 영화, 최고의 드라마를 만든다고 한다. 최고의 컨텐츠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엄청난 돈을 들인 졸작을 만든다.
왜냐면 그들은 한국에서 자라서 한국에서느낀 것, 마음속에서 우러난 자기의 메세지를 말해서 한국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고 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설픈 헐리우드 영화의 모조품 같은 것을 만든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특정한 사람들이 없고 그냥 최고의 영화란 최고의 드라마란 이런거라는 생각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설픈 짝퉁이 된다. 재미가 없다. 그러니 작품성이 떨어진다.
이 부분은 특히 중요한 이야기다. 컨텐츠가 중요하다고 했더니 대기업들은 또다시 똑같이 대응하려고 할것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앱, 최고의 컨텐츠를 자기 마음대로 만든다. 최고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잘알고 있다. 제일 비싼 작가 쓰면 되는거 아닐까? 그들은 시민들과 문화적으로 주고 받기가 없다.
최고의 컨텐츠를 만들려면 좋은 연극배우가 좋은 관객이 필요하듯이 어떤 문화적 그룹이 필요하다.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공감대를 가지고 문화적으로 연결된 문화적 공동체가 필요하다. 애플의 성공은 어떤 의미로 미국인의 성공이다. 미국인들이 아이폰에 호응하고 거기에다가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을 하니까 아이폰이 아이패드가 되고 성공한 것이다. 우리도 그런때가 있었다. 그래서 세계인이 부러워하던때가 있었다.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국민과 문화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폰을 능가해 보겠다면서 네티즌에게 뭐가 필요하냐고 묻지 않는다. 그냥 전세계 소비자만을 막연히 생각한다. 한국의 소비자그룹이 삼성 상품의 가치를 창출해 낸다. 문화가 있어야 신제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것이 세계에서 통할 상품이 되는 것이다. 한국문화없이는 삼성은 절대 승리할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아직도 건물만 보이고 하드웨어만 보이고 흥행의 공식만 보인다. 사람이 보이질 않는 것같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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