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문화와 저급문화 혹은 대중문화를 구분하는 것은 차별과 선입견의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급문화라는 것을 대중문화와 구분하고 그 존재가 지켜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과연 오늘날 고급문화라는게 존재하는지 그게 뭔지 그게 왜 지켜져야 하는지 하는 것일 것이다.
일단 질문이 고약하다. 고급문화라는게 뭔지도 모르고 존재하는지 안하는지도 모르는데 지켜야 한다니. 나는 고급문화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한무리의 전문가 집단에 의해 공유되는 문화풍조. 여기서 내가 부자들이 즐기는 것이 고급문화가 아니라 전문가집단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 고급문화라고 했다는 점을 주목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런게 왜 필요할까. 그리고 이런게 존재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먼저 말해서 나는 한국에 고급문화가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모른다. 내 경험으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그 존재감이 매우 미약하다는 느낌이다. 내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이 비교적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문화권에 들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고급문화를 즐기는 집단이 존재하더라도 내가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을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크다. 나는 제발 그렇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이글을 쓰면서 고급이니 대중이니 하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소수자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가를 고려한 적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고급문화라는 표현이 옳다. 고급문화는 소수자 문화이지만 모든 소수자 문화가 고급문화가 될수 없다. 고급문화는 사회의 문화를 선도할수 있는 능력을 보이는 소수자 문화라는 점에서 다른 소수자 문화와 구분되며 '고급'이라는 단어를 붙일 자격이 있다.
예를 들어 단순 카드게임 동호회나 레즈비언 그룹의 문화는 소수자 문화를 구성할수 있지만 나는 그런 것을 고급문화로 부르지는 않겠다. 거기에는 사회전체로 확산될수 있는 일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식클럽도 단순히 돈많은 사람들의 식도락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소수자 문화 밖에는 될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음식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면 그것은 고급문화가 될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동호회던 음악감상회던 국토순례회던 철학회던 어떤 사회전체를 대상으로 혹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행해지는 것이라면 고급이라는 말을 붙일수 있으며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저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만족을 위해 행하는것일 뿐일 것이다.
이렇게 고급문화를 정의한다면 이 고급문화는 자신들이 만족하게 생각하는 어떤 문화를 지키면서 가능하면 퍼뜨리려고 할것이다. 그들이 찾고 있는 문화는 그들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거문화를 연구하고 개량하는데 관심을 가진사람들이 있을수 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성과를 올린다면 그 성과는 사회로 나와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같다. 고급문화집단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들의 영향력이 한국에 퍼지는 것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몇십년동안 한국에서 돈많은 사람들이 늘어난 것말고 어떤 문화적 진전이 있었다는 느낌을 거의 받을수가 없다. 오히려 천박한 배금주의적 사고방식이 끝모르고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사실 대학생들이기만 해도 어느정도 사회적 엘리트 의식이 있었다. 엘리트의식은 나쁘게 발현되면 선민의식이 되지만 좋게 발현되면 책임의식이되기도 한다. 즉 더 높은 도덕적 규범적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장벽은 사라지고 모든 권위주의는 깨어지며 오로지 돈과 권력을 기준으로하는 권위만 더욱 강력해 진채 무성해 진것 같다.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과연 이것을 가르켜 발전이라고 부를수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선생님, 교수, 의사, 대학생들이 어떤 엘리트 의식, 더 높은 규범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그저 돈이나 많이 벌면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만 남아있지 않은가? 배운 사람들이 그렇다고 할때 도대체 어디서 고급문화가 싹틀까.
일본에 와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느낀 것중의 하나는 서점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잡지들이었다. 그 다양성은 단순히 한국의 인구가 일본인구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으로 설명되지 않는 수준이다. 수없이 많은 잡지들이 수없이 많은 소수자 문화의 존재를 웅변해 주고 있는 것같다.
미국도 마찬가지이지만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중 하나는 사소한 것도 매우 진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테니스를 친다고 하자. 선진국은 정식으로 된 장소에서 정식으로 코치에게 배워서 정식으로 대회까지 열어가면서 테니스를 한다. 후진국에서는 그저 대충 즐기고 말뿐이다. 차를 마시거나 독서토론회를 열어도 규범을 찾고 형식을 찾아서 매우 진지하게 한다. 후진국에서는 그저 후르륵마시고 대충 할 뿐이다. 한마디로 전문성이 다르다. 이것은 물론 선진국이 돈이 많고 여가시간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후진국의 부자들은 선진국의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돈이 많다. 부자라고 모두 그렇게 살지 않는다.
앞에서 소수자 문화, 고급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충하면 그건 기껏 소수자 문화가 된다. 진지하게 하면 그건 고급문화가 된다. 그 의미를 따지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선진국은 고급문화의 단계로 올라선 소수자 문화가 많이 존재하고 후진국은 그게 없는 것이다. 그 결과로 후진국은 선진국의 문화를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고 선진국은 끝임없이 새로운 풍조를 만들어 낸다. 여러가지 새로운 문화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일은 정부의 이해가 필요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국민들의 이해가 필요하다. 정부의 경우는 이해력이 떨어지면 도와준다고 하는게 방해만 될뿐이다. 차라리 내버려 두는게 도움이 된다.
두번째로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차 한잔을 마시건 산보를 하건 닭을 키우건 종이비행기를 만들건 고급문화에 도달하기위해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철학이다. 한국에는 철학책 매니아는 좀 있는 것같지만 그 철학이 실제로 현실사회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는 잘모르겠다. 철학하기와 철학적 지식의 습득은 서로 다른 문제다. 문화는 철학에 있어 실전 응용문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철학적 지식만 있을뿐 철학하기가 안되는 사람은 아마도 이런 문제에 대해 완전한 무능력을 보여줄것이다. 노래하는 방법에 대해 줄줄이 말할수 있지만 실제로 노래한곡못하는 사람꼴이 날것이다.
한국에는 고급문화가 있는가. 나는 없다고 했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곳에서 많은 분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으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씨앗이 발화해서 하나의 숲을 이룰때 그때 한국은 진정으로 한단계 발전하고 제대로 된 선진국으로 안정화 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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