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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문명의 썰물과 밀물

문명의 썰물과 밀물 1

by 격암(강국진) 2010. 6. 24.

2010.6.24

내 글은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 나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고 반이상 스스로 즐기려는 목적에서 씌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들은 특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로서는 일종의 몽상을 쓰려는 것인데 모든 좋은 생각은 한 때는 전부 몽상이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내가 가진 가장 중요한 생각일 수도 있다. 

 

인류문명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내적 그리고 외적 발전에 있어서 썰물과 밀물이 바뀌듯 바뀌는 때가 있는 것같다. 그것에는 커다란 밀물과 썰물이 있고 다시 그 안에는 작은 밀물과 썰물이 있는 식으로 구성되는데. 불교주도의 국가가 유교주도의 국가로 전환되는 것이나 서양에서 중세 기독교 시대가 끝나고 근대철학이 흥하게 되는 것은 이런 크고 작은 밀물과 썰물의 예들이다. 

 

외적인 발전을 말하는 쪽은 엄밀한 논리와 유물론적 과학주의, 합리주의를 주장하고 내적인 발전을 말하는 쪽은 직관과 감성 그리고 가치와 윤리에 집중하는 데 물론 어느시대를 막론하건 이 두가지중 하나가 완전히 홀로 존재하는 시대는 없다. 버틀란트 러셀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역사는 사회적 융합을 강조하는 쪽과 자유를 강조하는 쪽이 반복해 가면서 힘을 얻는 일이 계속된다고 하는데 이것도 내가 말하는 안과 밖의 썰물과 밀물이란 말과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외적인 논리가 성해지면 외적인 시스템이 거대해 진다. 그리고 시스템이 거대해 지면 우리 모두는 시스템의 노예가 되고 만다. 누구도 혼자서 시스템 전부와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영어로 학교나 학자라는 말과 닮아 있는 스콜라 철학은 이렇게 세세한 것을 따지는 거대한 시스템을 만든 철학이었다. 하지만 세세한 것을 따져서 엄청나게 분석을 축적했을 때 이제 사람들은 기성의 견해를 뒤집을 수가 없게 되고 만다. 

 

누군가가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이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해서 헤겔정도까지를 읽지 않으면 그런 질문은 던질 자격도 없었다고 했다고 하자.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포스트 모던까지는 읽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하고 그옆에 있는 사람은 동양의 고전들과 사상 정도까지는 훓었어야 한다고 말한다고 하자. 이런게 외적인 시스템에 의한 억압의 예다. 당신이 말한 것이 칸트가 말한 것과 비슷하거나 헤겔이 말한 것과 비슷해지면 생각은 중지하고 헤겔이나 칸트를 읽으라고 즉각적인 주문이 날아온다.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논의에 참가하는 것에는 자격증이 필요하다. 모든 새로운 생각들은 이런 필터들을 통과하는 동안 여과되어 사라질 것이다. 

 

반면에 내적 논리를 강조하는 쪽은 진리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산처럼 쌓여있는 객관적 자료의 중요성은 한순간에 날아간다. 이것은 때로 우리를 해방하는 작업이 된다. 사실 외적 논리건 내적 논리건 축적되면 억압이 되고 그에 저항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면 그것은 인간해방이 되는 것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치고 계몽주의로 나가는 것은 인간해방이었지만 이성의 억압을 느끼고 그에 저항하는 낭만주의는 또다른 의미의 인간해방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같다. 지난 몇백년간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이 발전에 취한 사람들은 몇십년안에 인간의 과학은 믿을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무엇이든 가장 성했을 때 그것은 동시에 몰락의 시작점이 된다. 

 

지난 몇백년간 발전한 과학기술의 근간에는 계량화, 엄밀화라는 것이 그 기반에 있고 수학이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즉 더욱 작고 기본적인 것에서 단단하게 논리를 쌓아올려서 전에 없던 거대한 논리적 구조물을 만드는 작업이 지난 몇백년간 있어왔던 것이다. 그 시작부근에는 바로 유명한 뉴튼이 있다. 

 

그런데 뉴톤이래 발전을 거듭하던 물리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이르러 인식론적 한계를 논해야 할정도가 되고 만다. 물리학의 발전은 정체되고 유전공학, 분자생물학이 발전했다. 물론 앞으로도 우리는 적어도 당분간은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을 목격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현재의 우리는 과학기술문명의 어떤 정점을 살고 있는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즉 과학기술문명의 썰물이 시작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거대 과학프로젝트의 선전에 휩쓸려 있다.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것은 그런 선전이 모두가 아니면 거의가 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상온 핵융합과 초전도체 연구가 좋은 예다. 선전과 기대는 많았지만 결과는 별거없었다. 또다른 좋은 예에는 게놈프로젝트도 있다. 사람에 따라 게놈프로젝트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고 말할지도 모르나 실은 게놈프로젝트가 시작될 무렵만 해도 사람들은 프로젝트가 끝나면 많은 질병들이 해결될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기적은 어디에 있나? 이제 우리는 게놈순서를 아는것 만으로는 질병을 고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또다른 예도 있다. 인공지능이다. 1990년대 초만해도 사람들은 인공신경망 연구가 금새 엄청난 인공지능시스템을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대하드론 가속기는 대충 5조에서 10조가 들어가는 세계 최대의 가속기다. 여기서 나오는 결과는 분명 우리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기는 하겠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과연 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실패한 혹은 기대한 것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는 과학프로젝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놀라울 것이 없다. 문제는 이것이 그저 우연한 일들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작은 것으로 더 엄밀하고 정확하게 큰 것을 설명한다는 환원주의적 아이디어가 이제 효과를 다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비환원주의적 과학이라는 것도 말이 안된다.  내가 느끼기엔 과학은 그 본질이 환원주의적이다. 

 

과학기술발전에 대한 투자효용은 날로 떨어지고 있다. 즉 새로운 기술은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했는데도 잘 나오지 않는다. 거대 과학프로젝트에 들어가는 돈을 보면서 이 돈을 굶어죽는 사람들을 구하는데 써야 하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사람은 아주 많을 것이다. 거대 과학프로젝트들은 잘 성공하지 않고 성공해도 약속한 만큼 대단한 효과를 보지 못한다. 

 

반면에 이미 알려진 기술과 과학은 더욱 빨라진 인터넷 기술을 타고 세상에 널리 퍼지고 있다. 즉 과학적 지식의 희소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있다. 온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정보의 가치는 0이다. 산소가 없으면 인간은 죽지만 어디나 있는 산소가 공짜인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은 생각보다 빠르지 않고 그 확산속도만 빠르다면 우리는 과학의 고마움을 모르는 시대를 살게 될것이다. 우리가 산소가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우리도 이젠 과학기술없이는 살기 힘들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시대도 여전히 엄청난 과학문명의 시대고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시대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이상 과학기술을 높게 평가하지도 값어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수 있다. 이미 개발된 지식과 기술은 공짜에 가까운 가치로 흔하게 존재할테니까 말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없는 것의 가치는 높게 올라갈것이다. 그것이 조금만 있으면 많은 사람을 살리고 행복하게 만들수 있다는 것이 강조될 것이다. 그것이 도덕적 가치다. 벌써 그런이야기 많이 듣지 않는가. 쓸데없는 낭비를 조금만 줄이면 아프리카의 소년하나를 구할 수 있다. 더 많은 돈을 들여서 신기술을 개발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자세와 생활 패턴을 조금만 바꾸면 훨씬 쉽게 좋은 세상을 만들수 있다. 이런 식의 말들을 들을 때 사람들은 종종 이런 주장들이 우리가 원시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건 그렇지 않다. 과학기술은 대부분 보존될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좀더 단순하게 살면 된다. 인류가 식단만 조금 바꿔도 그것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점이 있다. 그건 도덕적 가치의 문제가 '착한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뭐가 착한가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 착각은 현대교육이 노예교육이라서 자꾸 일어난다. 선생님과 시스템이 자신들의 가치를 절대가치로 학생과 사회에게 강요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착한 것이 뭔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규칙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도덕적 가치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도덕적 인간이란 규칙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정해진 것, 고정되어진 것의 가치는 그다지 크지 않다. 도덕적 인간의 본질은 도덕적 가치를 볼 수 있는 인식능력이다. 로보트와 인간의 가치차이는 여기서 나온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서 현인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더 많은 돈이나 더 많은 과학기술이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더 돈을 많이 벌고 더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벌써 적어도 반세기는 겪어왔다. 우리는 아직도 달에 가서 살거나 화성에 가서 살고 있지 않으며 자원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해서 무한대의 방종을 부릴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도 않다. 그런 기술은 생각보다 어려우며 심지어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게 오늘날의 세계를 볼 때 바람직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순식간에 지구를 오염시키고 엄청나게 자원을 낭비하는 사회로 변신하게 될뿐 인 것인지도 모른다. 

 

20세기 현대철학의 특징은 어느것이나 새로운 과학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과학을 비판하거나 과학의 한계를 말해주는 철학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근거로 새로운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게 되지는않는다. 새로운 지평은 윤리학, 내적 성찰, 인간과 인간이 이어지는 방식에 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과는 좀 다른 것이다.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사업가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빌게이츠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IT산업보다 더 신나고 전도유망한 분야를 찾은 것이 아닐까?

 

지난 몇백년간 선진국이라하면 대개는 과학기술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는 쪽을 말했다. 앞으로는 그게 달라질지 모른다. 선진국은 도덕적 힘을 지닌 쪽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중세를 흔히 암흑기로 부르고 부패한 교황청만 생각하며 조선을 고루한 유학만 연구하다가 망한 나라로만 생각하지만 그건 그런 질서가 지나쳐서 무너진 이후의 것만을 강조한 결과론이다.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교황의 힘은 유럽전체로 넓어졌다. 상인들도 평화로운 세상을 원했기 때문에 그걸 더 선호했다. 교황의 반대편에는 왕권을 강조하는 야만인의 문화가 있었다. 조선도 귀족계층이 고착화되기 전에는 훌룡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거대한 자본주의는 괴물이 되었다고 다들 말한다. 이것은 문명의 밀물이 이미 극한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의 왕자는 돈을 버는 괴물이 된 법인이다. 거대한 회사들은 기본적으로 돈을 벌기위해 존재하는데 그들은 이제 너무나 성장해서 인류나 국민들에게 위협이 될정도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는 것도 새로운 문명의 방향이 아닐까. 미래에 선진국이 되어 행복을 누리는 쪽은 이런 방향에 있어서 선두를 차지하는 쪽이지 않을까. 문명은 거대한 밀물을 멈추고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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