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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문명의 썰물과 밀물

문명의 썰물과 밀물3 : 사회적 현실.

by 격암(강국진) 2010. 6. 30.

2010.6.30

앞의 두개의 글에서 나는 무슨 말을 했는가. 우선 과학기술의 발전이 투자대비 효과가 떨어져 가는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두번째 글에서 내가 한 것은 과학기술을 두 개로 나눈 것이다. 그 두개중 하나는 홀로 존재하는 기술이고 또하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다. 홀로 존재하는 기술은 핵발전소나 우주선처럼 원리적으로 말해서 단 한명의 인간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인간의 능력을 증대시켜주는 기술이다. 이에 반해서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다수의 사람들, 적어도 두사람이 존재해야 의미를 가진다. 난 홀로 존재하는기술의 발전은 느려지고 있으며 커뮤니케이션 기술만 그 효과가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같은 분류는 많은 곳에서 애매함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기술들, 발명들은 양쪽의 성질을 모두 가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나 기차는 물론 커뮤니케이션 기술이기도 하다. 전자통신이 나오기 전에 모든 정보가 편지로 오고가던 시절, 기차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소포와 편지를 빠르게 전달할 수 있게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애매함이 내가 말하려고 하는 논지 자체를 크게 상처입힌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어떤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볼까 한다. 다시 말해두지만 이 글들을 쓰면서 나는 지식과 상상력중 후자를 다른 글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해서 글을 쓰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반드시 그런 것이 되지는 않으므로 나 개인의 사색적 즐거움을 위해 쓰는 이런 글이 지겨운 분은 그냥 읽지 않으셨으면 한다. 

 

징기스칸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 그들은 사거리가 매우 긴 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몽고의 전사들이 유럽의 병사들을 포위하고 멀리서 활을 쏘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속절없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징기스칸의 전사들은 압도적 수의 열세에 있을 때에도 승리했다는 것이다. 즉 몽고의 승리는 야만적 힘이나 사람숫자때문이 아니라 기술덕분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런 활을 만들고 쓰는 방법이 순식간에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땠을까? 그럼 유럽의 왕들도 즉각 그렇게 했을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제약을 포함한 여러가지 난관때문에 기술은 그렇게 빨리 전파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의 커다란 기술적 우위를 가진 집단이 있다고 할 때 그 기술적 우위는 과거에 상당히 오래 유지되었다. 

 

이 상황이 바뀔 수 있는 것은 두가지에 의해서다. 하나는 물론 기술이전의 속력이 빨라질 때이다. 그럼 후발주자가 금방 쫒아와서 선발주자의 비교우위를 없애버린다. 또하나는 선발주자가 도망가지 못할 때이다. 즉 신기술 개발이 없거나 개발의 속력이 너무 느린 것이다. 이 경우도 후발주자는 결국 선발주자가 느리게 서있는 동안 금방 쫒아온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선진국과 그외 다른 나라들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기술 이전의 속력이 엄청나게 빠르다. 애플에서 아이패드를 내놓으면 그날로 인터넷에 그 해부장면이 뜬다. 모든것이 금방 해체되고 이해되버린다. 사실 그 부품의 상당수는 삼성이나 엘지같은 외국 기업에서 사온 것이다. 

 

그런데도 선진국의 기술발전의 속력은 크게 떨어졌다. 20세기에 선진국은 컴퓨터와 자동차를 만들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IBM이 PC부분을 중국에 팔았고 대부분의 완성된 컴퓨터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든다. 여전히 소프트웨어나 칩제작 같은 것은 선진국의 기술이지만 그것도 얼마나 견딜지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그래서 새로운 영역이 열렸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비아그라가 대표하는 신약개발은 컴퓨터나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는 것만큼의 세상을 바꿀 변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짧은 시간내에 우주개발을해서 새 시대를 열 것같지도 않다. 자동차는 50년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양을 하고 비슷한 속력으로 거리를 달리고 있다. 

 

선진국사람들이 잘사는 것은 결국 그들은 후진국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하기 때문이다. 즉 부가가치가 높은 일을 하니까 훨씬 더 돈을 많이 번다. 그렇게 되는데는 문회적 지리적 상황등 여러가지 다른 것들도 존재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것은 바로 기술이었다. 기술적 우위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외국에 팔면 큰 돈을 버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게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있다. 

 

선진국에 남은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후진국이 없는 자본이다.  선진국은 돈놀이를 해서 돈을 번다. 그러나 이런 불로소득이 사람들의 불만을 사는 것은 당연하다. 또하나는 쌓여진 돈, 투자된 돈이 만들어 낸 문화가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술이전은 문화이전보다 오히려 더 쉽다. 따라서 이런 경향이 계속되면 결국 21세기에는 문화의 힘, 인간의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되는 풍조를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기술적 우위가 사라지자 문화적 우위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능력의 비교우위를 주로 지키던 시절에는 사실 그걸 해낼 능력만 있다면 단 한명의 천재발명가가 모든 것을 해내도 된다.  다시 말해 한명의 에디슨과 한명의 아인쉬타인이 국가하나를 먹여살리는 시대랄까. 한명의 천재가 그 지식을 만들었더라도 그 지식을 독점한 선진국은 그걸로 큰 부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문화의 시대는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보통 사람의 가치 다시 말해 바람직한 문화를 가진 인간 집단의 가치가 커진다. 내가 자주 언급하곤 하는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만들어 가는 생태계를 보라. 나는 어떤 사업가가 천사라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라고 하는 것은 소비자, 개발자, 하드웨어 제작자들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관계이며 그 안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그 작은 세계의 윤리적 규범적 키를 쥔 애플 그 중에서도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이 만드는 이 현실이다. 그 시스템이 널리 퍼지면 후발주자가 아이폰보다 하드웨어적으로 더 뛰어난 것을 만들어도 그걸로 세상을 뒤집는 것이 엄청나게 힘들어 진다. 

 

아이포드와 아이폰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자신의 필요를 말하고 개발자들이 그 필요를 충족시키고 이익을 나누는 상호관계는 하나의 신뢰망으로 굳어진다. 이것은 이미 독립된 인터넷 공화국에 한없이 근접한다. 우리는 아이폰을 사거나 개발자가 되어 그 공화국의 시민이 되고 세금을낸다. 그리고 그 혜택으로 서비스를 제공받거나 돈을 버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술이전에 이 생태계 안의 윤리적 규범적 기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대단하지만 그도 역시 아주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생태계를 만든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 미국인들이다. 

 

이에 비교하여 많이 비교되는 삼성은 이 점을 크게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삼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건희회장이 강조한다지만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과연 삼성이 그걸 아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삼성은 정말 한국유전자라는 것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알고 있을까?

 

내가 느끼기엔 한국의 소비자집단은 전세계 어느 집단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다. 김대중시대나 노무현 시대 초기 만 해도 한국은 인터넷, ,IT분야에서 세계 첨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걸 회사들은 자신들이 잘해서라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거기 뛰어들어서 온갖 평가를 하고 소비하면서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많은 회사들은 자신들의 수익을 늘리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또 뭔가 다른 이유로 인해 한국의 커뮤니티를 누르고 죽이는 것을 정책으로 삼았다. 온갖 종류의 서비스가 뒤로 미뤄졌다. 다음도 그렇지만 특히 네이버는 뉴스 편집같은 것을 통해 자신들이 공평하지 못한 미디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의 인터넷이 훨씬 재미있었는데 그걸 재미없는 세상으로 만들어 놓고 미국의 애플이 만들어 가는 세상을 보면서 부러워 한다. 세계에서 제일 처음 mp3 플레이어를 만든것이 한국이고 한때는 아이리버가 애플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pmp중 히트친 v43같은 것은 아이폰보다 먼저 나왔는데 그당시 이미 오픈 소스정책에 의해 개발자들이 자유롭게 뛰어드는 상황이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실패했다. 그것은 한국 회사들의 무능력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무능력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구글이나 애플이 요즘 새롭게 미디어를 채우는 것은 내가 보기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구글이나 애플이 이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엎을 거라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뭔가. 그게 인터넷 공화국이다. 그 인터넷 공화국의 헌법이 누구에 의해서 씌여지고 누구에 의해서 관리되어지며 누가 그 세상에서 주도권을 쥐는가가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커뮤니티다. 

 

이런 시대에 한국문화, 한국어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집단은 어찌될 것인가. 나는 한국 문화의 가능성을 믿는다. 나는 그 잠재력이 우리를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놓을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건 잠재력 뿐이다. 현실을 보면 우리는 멀쩡한 4대강을 파헤치는데 돈쓰고 시간쓰고 있으며 과기부는 없어졌고 북한과는 날로 사이가 나빠지고 있다. 커뮤니티가 큰 힘이 되는 시대에 산다면 한국어를 하는 북한의 존재는 우리에게 사실은 놓칠 수 없는 거대한 재산인데 말이다. 

 

남한사회만을 봐도 그렇다. 내가 보기엔 희망은 오직 한 곳 인터넷 밖에는 없다. 서로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이어져서 새로운 문화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이 커져서 남한 사회전체에 새로운 문화적 변화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남한 사회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층 특히 교수들은 인터넷에서 제한된 역할밖에는 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느정도 개방의 문제다. 인터넷에 올라오려면 발가벗어야 한다. 인터넷 공간은 적어도 아직은 교수같은 사람들에게는 사실 편한 집을 두고 따뜻하게 지낼수 있는 사람이 허허벌판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트위터 같은 공간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전의 인터넷 게시판에 비교하면 그곳은 안전한 공간이다. 게시판은 그야말로 깡패들이 몰려다니는 무법지대였다. 트위터 공간은 그렇지는 않다. 

 

나는 무조건 교수사회나 고학력층이 인터넷에 나타나면 그들이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무능할 수 있으며 그리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만 할지도 모른다. 그저 어떤 가능성은 보여준다는 정도다. 시골의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박경철씨도 트위터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이외수의 트위터도 유명하다. 그밖에도 소설가며 과학자들, 영화감독도 간간히 눈에 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이 어떤 문화적 융합으로 가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같다. 물론 내가 보지못하는 곳에서 뭔가가시작되고 있을 가능성은 크다. 

 

그것은 벼룩시장이나 바자회같은 것을 조직하는 모습일지도 모르고 국토 종단 도보여행을 조직하는 사람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고 야학을 조직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여행이야기를 하는 커뮤니티일지도 모르고 교육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이패드나 아이폰 사용자 모임이 커지면서 생기는 것일수 있다. 

 

그들은 새로운 기능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시작은 그저 좀 편하게 혹은 좀 쓸모있는 정보를 나눠보자는 생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거기서 공동체의 정체성, 윤리적 근원에 대한 고찰, 좌도 우도 아닌 새로운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터져나오고 뭔가가 확산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적어도 다음번 대통령은 문화대통령이라고 불릴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로 말하면 이 글을 쓴 후 당선된 대통령은 박근혜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탄핵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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