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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문명의 썰물과 밀물

문명의 밀물과 썰물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6. 1. 14.

2016.1.14

몇일전에는 문명의 밀물과 썰물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2010년에 몇편의 글을 썼던 것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 글들을 다 읽고 나자 약간의 여운이 남아 그것을 써보기로 한다.

 

얼마전에 읽은 뉴욕타임즈의 사설에서 폴 크루그먼은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 특히 에너지와 우주선에 대한 기술적 발전에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1970년대 이래 지금까지의 시대를 기술적 실망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에 따르면 물론 과학기술은 그 기간에도 많이 발전했지만 그 이전의 시대와 비교하면 과학기술의 발전속력은 훨씬 느렸다는 것이다. 

 

사실 20세기 중반사람들이 꿈꾼 21세기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런 평범한 세계가 아니었다. 우주여행이 보편화되고 로봇이 세계는 물론 우주공간을 누비는 그런 세계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의 에너지 문제는 금방 해결될 것같았을 것이다.  핵폭탄은 공포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무렵의 사람들은 핵융합이나 핵분열을 이용해서 무한의 에너지를 마음껏 쓰는 미래가 금방 다가온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컴퓨터가 등장했던 초기에는 인공지능이 금방 사람같이 일하는 로봇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시대가 정말 왔다면 실제로 우리는 지금 화성이나 달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생활을 했을지 모른다. 자동차는 연료없이 핵발전으로 무한히 달리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크기의 자동차, 게다가 속도도 비슷한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이 자동차는 우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늘도 날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연료비 걱정을 하면서 살고, 신기술은 주로 연비를 높이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같다. 미래는 상상한 것과는 달랐다. 

 

문명의 밀물과 썰물이라는 글은 역사적으로 기술과 정신적 융합이 강조되는 시기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기술시대의 마지막이거나 정신적 융합시대의 초기가 아닐까하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이런 성장과 퇴조의 주기설은 내가 만들어 낸 참신한 것이 아니다. 한가지 예는 문명의 성장과 퇴조를 다룬 조지프 테인터의 문명의 붕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테인터는 하나의 문명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점 더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가지만 그렇게 하는 효율이 점점 더 나빠져서 결국은 붕괴를 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문명은 태어나고 성장한 후 어느 한계에서 다시 붕괴하고 이것이 반복된다. 또다른 예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틀란트 러셀인데 그도 철학사를 쓴 후 역사는 자유와 질서를 강조하는 주기적 반복이 일어나는 것같다고 썼다. 

 

문명의 밀물과 썰물에서 그리스와 로마는 현대의 유럽과 미국에 비교된다. 기술적이고 문화적으로 앞서있던 것이 그리스이지만 로마는 사회적 융합력으로 그리스를 앞선다. 말하자면 철학과 과학의 그리스라면 법의 로마랄까. 오늘날 과학기술분야에서 미국이 가지는 위치를 생각하면 미국이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핵심에 있지 않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20세기 과학기술의 근원은 결국 유럽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그리스가 나눠져 싸웠듯이 내부적 분열을 이기지 못했고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들의 지식인은 미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이주한 과학자들은 상당수가 이제 늙어죽었다. 미국대학의 풍경은 크게 바뀌어 중국인들이나 한국인들, 인도인들이 미국 대학원을 많이 채우고 있다.  

 

뛰어난 사회적 융합력을 보였던 로마는 대제국을 이뤘다. 그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붕괴한다. 유럽에서는 그 이후 왕들이 다스리는 세속 국가들이 성장하여 교황세력을 이겨내기 전까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시대가 계속된다. 그것은 기술적 발전을 강조하기 보다는 정신적 사회적 통합을 강조하고 내적 탐구에 몰두하는 시대다. 

 

만약 20세기 중반에 상상했던 대로의 엄청난 과학적 발전이 계속되었다면 우리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계속 성장하기만 하는 것을 봤을 것이다. 지금이야 중국이 부상했지만 20세기 중반에 중국은 그저 가난한 빈민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기술이전은 계속되었다. 결국 세계는 어느정도 평준화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미국의 세계지배에 대한 불만은 더 커졌다. 귀족이 귀족으로서 하는 역할이 없는데 특권을 누리고 평민들이 성장하여 경제적 지적인 실력을 키웠다면 귀족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시대의 변곡점에 있다면 앞으로도 기술적 발전은 계속 되겠지만 그 속력은 느려지며 세상의 중심에 서는 것은 내적인 세계와 사회적 융합력의 연구일 것이다. 기독교 시대의 마지막에 나타난 과학은 스스로를 신학의 일부로 주장했다. 즉 신의 위대함을 밝히기 위해 자연법칙을 탐구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시대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종교는 스스로를 과학으로 주장할 것이다. 즉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과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뇌과학, 인지과학, 심리학같은 주제에 대해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이미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과학으로 부르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일 수 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등장해서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지나친 비약이다. 다만 기술적 발전의 효율성이 떨어지면 경제적으로도 사회적 융합력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기억할만 하다. 즉 가장 좋은 스마트폰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그 스마트폰을 둘러싼 소비자와 기술자, 컨텐츠 판매자등 여러 사람들이 잘 공존할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망이 강조되는 시대다. 망이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훌룡한 컨텐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연결되는 망속의 기술에만 몰두하면 착각을 하게 된다. 가장 좋은 길이 있어도 그 길이 아무 것도 아닌 곳에서 아무 것도 아닌 곳에 놓여져 있으면 누구도 그 길을 달리지 않는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 창의적인 사람, 재미있는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와 질서가 없으면 새로운 기술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먼저 나온 아이러브 스쿨같은 서비스는 그 개념상 페이스북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주커버그는 한국사람이 아닐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조선에서 만들었는데 왜 출판혁명으로 지적 폭팔이 일어나지 못했을까? 조선이나 한국사회가 소통을 위한 기술이 나와도 그것을 잘 활용할 사회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재와 반칙이 난무할 것같은 국가가 세계적 소통의 중심에 서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어떤 후진적인 국가를 머리속에 떠올려보라. 주커버그가 그 나라에 태어나 같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고 해도 과연 그게 페이스북이 가지는 위치를 차지하게 될까?

 

나는 윤리적 사회적 힘이 미래의 성장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철학이 미래의 힘이다. 그것은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그럴 것이다. 우리가 갑자기 1-2년안에 기술을 우습게 아는 시대를 살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의 감성으로 기계나 기술에 접근하면 돈만 잔뜩 쓰고 결과는 없게될 것이고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정말 우리가 시대의 변곡점에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또다시 이상한 세계로 비약하게 될 것인지는 백년쯤 뒤가 아니면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난 50년을 돌아보면 더 큰 가능성은 전자에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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