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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새로운 생명과학에 대한 생각 2

by 격암(강국진) 2010. 8. 19.

10.8.19

친구 사귀기와 자전거 타기

 

잠깐 화제를 돌려서 A라는 남자 그리고 B라는 매우 매력적인 여자 마지막으로 성격적으로나 외모적으로 모두 매우 비호감을 주는 여자 C를 생각해 보자. C는 A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싶다. 그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C는 자신을 숨긴채 A를 몰래 관찰하려고 한다. A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하면 A와 친구가 될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A는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은채 혼자 있었다. 이때 A가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더라는 것을 C는 기억해 둔다. 그러더니 B가 나타났다. B는 A에게 매우 무리한 부탁을 하는데도 A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수용한다. B가 아주 썰렁한 농담을 했는데도 A는 그게 어찌나 웃긴지 모르겠다면서 웃어댄다. 거짓말을 하는 것같지 않다. 실제로 A는 그런 농담때문에 많이 웃는다. 이런 관찰을 바탕으로 C는 A는 아주 관대하고 사소한 것에도 잘웃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C는 A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B처럼 행동한다. 아마도 친구를 좀 사귀어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결과가 매우 처참할것이라는 것을 알것이다. C는 전혀 다른 A를 발견하게 된다. 관대하지도 잘 웃지도 않는 A를 말이다. C는 A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A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가 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행동하는 A가 어떤 사람인가는 그 앞에 있는 C가 어떤 사람인가에 크게 의존한다. 친구사귀기는 관계에 대한 것이지 자기 자신을 숨기고 둘을 떼어내고 각각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여기 자전거타기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자전거를 타지는 않고서 자전거타기를 배우려고 한다. 이 사람은 먼저 자전거란 무엇인가를 열심히 연구한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의 행동을 열심히 연구한다. 이러저러한 상황에서는 이러저러하게 조작을 하면 된다는 식의 지식을 축적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자전거를 타려면 일단 자전거와 한 몸이 되어 자전거가 전해주는 지면의 상황, 자전거의 현재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의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사 도로를 나란히 달린다고 해도 옆사람의 자전거 조작을 기계적으로 그대로 복사해서는 자전거를 탈 수 없다. 

 

동기화 문제

 

나는 이런 예들이 생명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에 대해 좋은 가르침을 준다고 믿는다. 문제는 생명이란 것은 엄밀히 정의되지 않고 진공을 나르는 질점이나 시계추처럼 이해하기 쉬운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생명에 대해 뭔가를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그 '이해한다'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리학적 과학 혹은 환원론적 과학의 경우는 관찰자는 거의 무의미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위의 예에서 보여주는 것은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관계라는 것이다. 세상이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이유는 상당히 객관적 사실말고도 내가 이러저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객관적으로 탐구되는데 한계가 있고 우리가 어떻게 상대와 관계를 맺는가에 관련되어져 있다. 

 

쓰다보니까 내가 쓰는 것 그리고 앞으로 쓸것은 신비주의적인 냄새를 풍기기가 쉬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통적 의미에서의 과학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그것도 틀리지 않은 생각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일종의 기술이나 예술 혹은 수련같은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자전거타기의 예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분명해진다. 우리는 어쩌면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 때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보이는가를 연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신비주의를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인상을 지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는 동기화 문제의 수학적 연구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이런 연구는 내가 보기엔 바로 내가 말하는 새로운 생명 과학 -사실 나도 그게 뭔지 지금 쓰면서 배워가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과 물리학적 과학의 과도기쯤에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 벽에 나란히 붙어있는 두개의 추시계가 있다. 추시계는 각각 추를 가지고 흔들리고 있는데 이 추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재미가 있다. 두개의 추는 종종 정확히 똑같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또다른 예로 커다란 나무에 붙어 있는 반딧불들을 생각해 보자. 이 반딧불들은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빛을 켰다 껏다하는데 여러마리가 한꺼번에 불을 밝히므로 나무는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불이 들어올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여기서도 우리는 동기화를 발견하기도 한다. 즉 반딧불들이 불을 밝히는 주기가 똑같더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동기화(synchronization) 고 이 동기화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동기화의 연구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알수 있는 것이 있다. 추시계도 반딧불도 매우 복잡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호 관계를 통해서 서로 다른 주기를 가지고 진동하는 시스템들이 어떻게 동기화를 하는지를 연구할 수 있다. 

 

이런 연구는 어떤 단일 객체의 연구가 아니라 개체와 개체의 관계에 대한 연구다. 종종 이런 연구에서는 한개의 개체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정확히 추적하는 것은 포기된다. 우리는 시계추에 대한 동역학을 풀거나 반딧불의 행동을 100% 올바르게 수학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조건하에서 두개 혹은 다수의 개체들이 서로 이런 저런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개체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없어도 이런 것을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관계에 촛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것은 여전히 고전적 물리적 과학의 특징도 가지고 있다. 즉 그 다수의 개체를 포함하는 시스템은 외부에 대해 닫혀있고 여전히 그 다수의 개체를 관찰하는 관찰자는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있다. 여전히 이 관계란 관찰대상들간의 관계이지 이 세상과 그것을 관찰하는 나와의 관계가 아니다. 

 

존재에서 관계로의 시점 변경

 

이제 우리는 핵심적 부분에 도달하기 시작한것 같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이해라는 것에서 우리는 존재에서 관계로 시점을 변경한다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그것은 어떻게 우리와 관계짓는가로 시점을 변경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홀로 떨어져 관찰자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뭔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찰자와 관찰대상자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연구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연구는 아마도 과학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 모르며 과학의 영역으로 가기위해서는 위에서 동기화의 연구경우처럼 어떤 중간적인 형태를 띄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건 없건간에 우리는 시점의 변경을 통해 실질적으로 중요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지 않을까? 

 

친구 사귀기와 자전거타기를 생각해 보라. 친구사귀기와 자전거타기는 과학이라며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과학적으로 철저하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거나 자전거를 타는데 철저히 실패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친구를 사귀려면 용기를 내서 자신을 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신뢰를 얻을 수 있으며 관계가 시작되고 그 관계는 시간에 따라 진화해 간다. 자전거를 타려면 생각만 하지말고 무서워 하지 말고 과감히 페달을 밟고 감각을 발동시켜야 한다.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낡은 지식에 근거한 메뉴얼을 따르는 대신 지금 이 순간에 민감히 대처하는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물론 현실세계에서 경험적으로 이런 사실들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실은 과학에 대한 훈련을 철저히 받은 경우는 그렇게 하라고 철저히 훈련받은 나머지 그렇게 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생명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과학만능주의가 어떤 개인에게 침투하는 경우는 우리를 도와줄거라고 생각하는 과학적 사고가 오히려 우리를 무능하게 만들고 있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종종 -내가 이과생이므로 그걸 안다-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현실적인 문제앞에서 매우 무능하고 바보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두고 웃기는 농담을 한다. 수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일반인 기준으로는 때로 기괴한 행동패턴을 보이기 때문이다. 여자와 데이트를 하면서 어떤 전공적인 문제를 열심히 설명하는 그런 모습말이다. 그들은 전체적인 대화의 분위기같은 것에 매우 둔감하며 순간 순간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념과 원칙에 따르려고 즉 어떤 기억, 어떤 고정된 시나리오를 따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한마디로 흐름을 타는 것에 실패한다. 이것은 그들이 실제로 우둔하다기 보다는 거꾸로 그들이 과학적 수학적 사고에 매우 우수하고 잘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가 그들이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예를 들어 나는 이렇게 묻는 것이다. 우리가 뇌를 '이해'한다거나 인간의 몸을 '이해'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생명을 '이해'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고정시키고 격리시키고 100% 이해한 후에 우리자신을 들어 내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일찌감치 등장시킨후 그 상대와 나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고 어떻게 '흐름'을 탈 수 있는가 하는 부분에 관계를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병을 치료하는 경우

 

예를 들어 우리가 병을 치료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병을 치료할때 물리학적 방식의 대처는 이렇다. 그 병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고 그 병의 실체를 알아 그 환부를 도려내고 그것을 죽이는 약을 쓰는 것이다. 

 

반면에 흐름을 타는 대처법이란 사실 새롭지 않은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병원에서는 경험을 통해 습득되어서 이미 행해지고 있다. 병을 치료하려고 뭔가를 하면 몸은 여러가지 다른 증상을 보인다. 그리고 그 증상은 다시 억눌러 져야 한다. 다시 말해 병과 몸은 한칼에 잘라낼 수 있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의사는 여러가지 판단을 해야 한다. 증상중에 어떤 것을 먼저 없애야 하는가. 이런 처방을 하면 몸은 어떻게 반응할 것이며 그럼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수히 물리학적인 접근방식이 객관적 상황의 파악이라고 생각하면 실제 현장에서 발휘되는 의술은 환자의 몸과 의사가 서로 번갈아 수를 쓰는 바둑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고칠수 있는 병과 고칠수 없는 병이 절대적으로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어떤 수순을 따라 대응해 주는가에 따라 몸의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흔히 한의학은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애초에 병이 나지 않게 하는데 중점을 두고 양의학은 사람이 죽어갈 정도가 되면 그걸 숨쉬고 살아있을수 있는 수준으로 돌리는 것에만 신경쓴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에는 진실이 들어있다고 나는 믿는다. 양의학은 보통 병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걸 고치는 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병의 존재를 전제하는 순간 기본적으로 그 병은 마치 진공을 나르는 질점처럼 홀로 존재하는 객체로 인식된다. 관계는 사라지고 객체화된 병을 죽이는 일반적 방법에 촛점이 간다. 이런 지적 태도가 양의학의 그런 특징을 불러 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의사는 -현실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듯이-  환자와 '관계'를 맺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나는 의사가 아니므로 현실적으로 이 차이가 얼마나 큰차이를 나타내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 그러나 두명의 의사가 있다고 하자. 하나의 의사는 각 병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치료하면 된다는 기계적 메뉴얼을 외우고 진행시키는 의사며 또하나의 의사는 소위 '감'에 많이 의존하는 의사다. 이 의사는 정확히 자신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자신의 경험에 따라 이러저러한 경우는 이런 저런 순서에 따라 대처해야 한다는 직감을 발휘하며 그것을 믿고 행동한다. 

 

나는 전자의 경우를 바로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합리주의자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후자의 경우는 만약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다시 말해 환자가 사망했을 때 진짜 의료사고로 간주되기 쉽다. 법정이나 일반인들의 지적 이해는 '감'따위는 인정하지 않고 왜 메뉴얼대로 행동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의사를 메뉴얼대로 행동하는 기계로 만들었을때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메뉴얼화가 강해질수록 바로 데이트에 나가서 '흐름'을 타지 못하는 무능한 과학전공학생의 경우를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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