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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새로운 생명과학에 대한 생각 1

by 격암(강국진) 2010. 8. 18.

10.8.16

%나는 새로운 생명과학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자주 그렇지만 이것은 쓰면서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에 비록 어느정도의 영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나자신도 뭘쓰게 될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므로 특히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는 분은 무시해도 될 것이다.

 

새로운 생명과학이란 무엇인가

 

먼저 새로운 생명과학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약간 써놓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새로운 과학이라고 하면 왠지 기존의 과학이 틀린 것을 지적하고 뭔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초우주적인 이론이라는 느낌을 주기때문이다. 나는 모든것에 대한 단일한 궁극의 이론 내지는 그것과 비슷한 이론은 아마 인간의 언어와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만들어 질 수 없거나 대단히 만들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설사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내가 지금 여기서 하려고 하는 것은 그게 아니거니와 그런 이론이 있다고 해도 그런 이론은 아마도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줄거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를 설명하기 위해 야구와 뉴튼 역학을 생각해 보자. 양자역학적인 효과가 무시되는 일상의 삶에서 질량을 가진 물체가 이동을 할 때 이것을 설명하는 아주 훌룡한 이론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뉴튼 동역학이다. 그러나 야구감독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철수야 타자가 공을 치거든 빨리 공의 속도와 무게 회전방향과 회전속도를 측정하는거야. 그리고 빨리 그걸 풀어서 포물선이 어디로 가는가를 보고 그리로 달려가서 그공을 잡는거야. 잡을때는 운동량을 잘생각해서 충격에 대비하도록해."

 

이렇게 하는 야구선수가 있다면 우리는 그런 야구선수를 바보라고 부른다. 아무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야구선수에게는 야구공을 잡는 나름의 원칙들이 따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공이 뜨면 공과 지표면과의 사잇각을 일정하게 만들면서 뛰면 우리는 공을 잡을 수가 있다. (이것은 GUT Feeling 이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야구에는 야구의 원리 혹은 야구의 이론이 있고 물론 그 이론과 원리는 야구를 잘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 이론과 원리는 물론 뉴튼의 법칙을 깨는 새로운 이론이나 원리가 아니다. 그러나 뉴튼의 법칙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야구의 원리는 또한 반드시 뉴튼 동역학안에 모두 포함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공을 잡았다. 1루와 홈중 어디로 공을 던져야 할것인가. 공을 잡는 자세는 잡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연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뉴튼 동역학이 결정해 주는가? 야구의 원리는 뉴튼의 동역학이 그렇듯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론을 그 상황에 맞춰 단순화한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론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이론을 써서 야구를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여전히 뉴튼 동역학은 일상생활에서 물체의 움직임을 예측하는데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같은 것을 우리는 경제학을 연구하거나 빵을 만들거나 자동차를 운전할때도 할 수가 있다. 경제학에는 경제학의 원리가 있고 제빵에는 제빵의 원리가 있으며 자동차운전에는 자동차 운전의 원리가 있다. 이들이 서로 만나고 중첩되는 곳에서 우리는 보다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하기도 하고 우리가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보게 되기도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우리는 하나의 단일한 원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며 사실상 무수한 다른 원리들이 각자의 범주에서 적용되고 그들이 서로 만나는 경계선에서 상호 모순되지 않도록 검증된다. 예를 들어 생명과학에서도 우리가 아주 작은 범위로 가면 그곳은 생물학이 화학과 만나는 곳이 되거나 화학의 경계선을 넘어가 버린다. 따라서 생명에 관련된 것을 연구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연구의 방식은 화학이나 물리의 방식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과학 고유의 원리란 존재하는가. 나는 이 부분에서 뭔가 거대한 빈자리가 있다고 느낀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새로운 생명과학이란 바로 이 빈자리에 대한 것이다. 

 

뭐가 문제인가. 

 

생명과학이란 생명을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경과학은 뇌를 이해하고 싶어서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늘상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과연 생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날아가는 야구공이나 달의 움직임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이라면 어떻게 다르고 우리는 정말 다른 시각으로 연구하고 있는 것일까?

 

물리학은 오랜동안 과학의 왕이었으며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점을 주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우리는 물리학적인 연구를 보면 우리가 과학이란게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지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물리학은 뉴톤시대이래로 이해한다는 뜻이 뭔가를 아주 분명히 했다. 그것은 대상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가 하는것이다. 어떤 것은 내부적 구조물로 설명하고 그 내부적 부속품간의 역학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날아가는 포탄이나 달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뉴튼 방정식을 풀면된다. 뉴튼방정식은 기본적으로 시간에 대한 변화를 나타내는 미분방정식이다. 

 

또한 물리학에서 이해를 한다는 것은 주체를 뺀 객체의 이해를 말한다. 즉 관찰자는 연구 대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누가 관찰하는가는 대상의 이해에 관련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철수가 한국에서 실험을 하건 지구반대편에서 제임스가 실험을 하건 그 결과는 같아야 한다. 재현성이 없는 것은 과학으로 말하지 않는다. 철수가 보면 항상 보이는 것이 제임스가 보면 항상 안보인다면 과학적 결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유령이나 초능력이 과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이유다. 

 

이렇게 관찰의 주체를 제외하고 연구의 대상이 홀로 존재한다는 가정을 전제한 과학은 양자역학에 이르러 수정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그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양자역학도 철수가 풀어도 제임스가 풀어도 같은 결과를 주며 미국에서 실험하고 한국에서 실험해도 같은 결과를 준다. 

 

그런데 생명도 이렇게 연구될수 있을까? 

 

나는 이제까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글을 몇개 쓴적이 있다. 거기에서 중심되는 내용중의 하나는 생명은 그것이 열려있다는 특징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생명은 변화하며 끊임없이 물질을 외부와 교환한다. 어떻게 보면 끊임없이 외부와 섞이고 있는 것이 생명이다. 물론 생명의 또다른 특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존재를 지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만 생명이 바위같은 것에 비하면 훨씬 빠르게 변하고 주변환경과 섞이고 그만큼 상호작용하는 존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생명이란 사실 엄밀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나라는 인간은 내가 항상 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태어난 이래로 많은 것을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며 성장해 왔다. 물질적으로 보면 나는 물질이라기 보다는 바다에서 일어난 파도 처럼 끝없이 재생산이 되는 파도에 가깝다. 그러다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나라는 인간을 수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 몸을 이루는 물질은 다 바깥 쪽에서 온것이다. '나'라는 인간의 정의가 시간에 따라 막 변하고 있다. 인간만 그런게 아니라 개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다. 

 

나는 어떤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명의 열린 성질 혹은 정의하기 어려움은 당장 나같이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한 배경을 가지고 생명을 연구하는데 혼선과 어려움을 준다. 예를 들어 뇌의 어떤 특정부분을 연구한다고 하자. 자동차 부품처럼 그곳만 쑥빼다가 연구하면 되는게 아니다. 뇌의 일부를 잘라다가 연구하면 그건 죽은 조직이지 뇌가 아니기 때문이다.

 

뇌에 대한 연구를 보면 눈이나 시상, 초기시각피질을 먼저연구했는데 이는 이런 부분은 거기에 들어가는 입력이 뭔지가 보다 분명하기 -혹은 그렇다고 믿거나 우기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곳으로 가지 말고 쉽게 이런 예를 들어보자. 말을 배우기로 한다. 그런데 나는 영영사전밖에 없다. 거기서 woman이 뭔지를 찾으면 영어로 설명이 나온다. 그 단어도 모두 모른다. 그래서 그것들을 찾으면 다른 단어가 나오고 결국 이 짓을 계속하면 모든 영어단어가 다나올것이다. 이런 식이면 단어 하나의 뜻을 알기위해서는 언어 전체를 다 알아야 할판이다. 

 

뇌의 연구도 이런면이 있다. 뇌의 부분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뇌의 부분부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게 그 부분의 자발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다른 부분이 그 부분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한마디로 뇌의 한부분을 알고 싶으면  다른 부분을 알아야 하고 결국은 뇌의 모든 부분이 다 등장하는 것이다. 즉 생명을 연구할때는 진공을 날아가는 질점처럼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을 가정하기 훨씬 힘들다. 물리학에서는 어떤 물건 혹은 어떤 시스템을 연구할 때 그 시스템 바깥의 것이 주는 영향력은 없다고 하거나 단순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과학에서는 이것이 안되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잘될 때가 있고 안될 때가 있다. 바로 화학의 영역에 가까울정도의 작은 영역으로 가면 물리적 화학적 방식이 좋은 결과를 준다. 니코틴을 뇌가 흡수하면 뇌의 신경세포에는 무슨일이 생기는가를 이해하려고 할때 우리는 뇌신경의 세포막이나 신경하나가 세상으로 부터 고립되어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면서 연구를 해도 충분히 좋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의 감정은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만들어 내고 조절하는가 하는 것을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연구하면 이렇게 잘되지 않는다. 데이터를 설명할수 있는 가능한 수학적 모델은 무수히 등장하고 제아무리 많이 실험을 가지고 데이터를 모아도 어느 모델이 맞는지 검증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계산 신경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다. 

 

뇌의 한 부분을 연구하면 금방 우리는 뇌전체가 다 관련되어 있어서 연구의 어려움을 겪는다고 나는 말했다. 실은 현실적 어려움은 이것보다 더욱 크다. 왜 뇌에서 멈추는가. 뇌는 몸의 다른 부분과 떨어져서 홀로 존재하는 것일까? 보다 정확한 예를 들기 위해 살아있는 원숭이의 뇌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경우를 소개해 보자. 과학자들은 종종 살아있는 원숭이의 두개골을 열고 뇌의 활동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측정한다. 예를 들어 원숭이 뇌의 시각피질을 연구하고 싶은 사람은 원숭이를 마취시키고 억지로 눈을 열어 빛이 들어갈수 있게 한 연후에 이런 저런 조정작업을 거치고 그 눈에 물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뇌세포의 활동이 어떻게 되는가를 측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마취를 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연구하는 것은 마취된 뇌가 아닐까? 그것은 뇌세포는 아주 작은 것이고 깨어있는 원숭이가 이런 저런 행동을 하면 측정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뇌는 민감하고 뇌세포는 아주 작다. 숨을 쉬는 정도의 움직임도 신경세포의 활동을 측정하는 전극의 위치를 바꿀수 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깨어 있는 원숭이를 가지고 실험할 때는 그 원숭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도 결과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명을 연구할 때도 물리학적 과학연구의 조건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한다. 즉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주변의 영향으로 부터 최대한 고립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각 피질의 연구에서는 종종 조용한 환경에서 원숭이에게 다른 자극을 주지 않으면서 의식도 없게 만들고 시각자료를 보여주면서 자료를 뽑는다. 그렇게 주변환경이 제어되지 않으면 실험으로서 가치가 없어진다. 다른 사람이 실험을 하면 결과가 다를테니까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의 난점이 있다. 과연 하나의 생명은 그 생명을 둘러싼 환경으로 부터 완전히 고립되었을 때 그 환경이 인위적으로 완전히 거세되었을 때, 그렇지 않을때의 생명과 같은 생명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일까?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이전의 글에서 나는 풍선의 예를 든적이 있다. 토끼모양을 한 풍선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풍선 안쪽의 공기와 바깥쪽의 공기 그리고 고무풍선의 탄성이 각자 균형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풍선바깥쪽의 공기를 제거하고 풍선을 진공에 가져다 놓으면 혹은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진 상황에 놓으면 그 풍선은 터져버릴것이다. 즉 풍선은 풍선주변에 동그라미를 쳐서 외부와 고립된 것으로 볼 수 없다. 풍선의 성질은 풍선 내부 만큼이나 외부적 환경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DNA의 문제를 비슷한 문맥에서 생각해 보자.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DNA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리적 사고방식의 좋은 예이다. 그런데 이것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보다 간단한 예를 통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스위치가 많이 달린 빵만드는 기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1번 스위치를 누르면 밀가루가 나오고 2번 스위치를 누르면 물이 나오고 하는 식으로 여러가지 기능을 하는 스위치가 이 기계에는 많이 달려 있다. 이럴때 우리는 맛있는 케익을 만드는 방법을 스위치를 누르는 순서로 표시할수 있을 것이다. 1-5-7-2 . . .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경우 케익의 정보는 이 스위치의 순서표에 있다고 생각할수 있을까? 그렇다. 다만 빵만드는 기계를 우리가 완전히 알고 있을때 그렇다. 즉 케익에 대한 정보가 스위치의 순서표에 있는 것 이상으로 빵만드는 기계역시 케익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빵만드는 기계가 어떤 것인지 모르거나 그런 기계가 없다면 단순한 숫자의 나열로 케익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븐의 조작법이 오븐 그 자체는 아니다. 

 

여기서 스위치의 순서표는 DNA를 의미하고 빵만드는 기계는 DNA에게 주어지는 환경을 의미한다. 적당한 환경이 없으면 인간의 DNA는 결코 인간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엄마의 뱃속이라는 환경에 대한 이해가 합쳐지지 않으면 DNA는 인간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엄마뱃속이라는 환경 그리고 엄마를 둘러싼 환경은 다시 DNA와 결부되어져 있다. 여기서도 풍선의 안과 바깥처럼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호명하고 균형을 이루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져 있는 시스템을 보게 된다. 따라서 게놈프로젝트만 완성되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세상을 보다 깊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둘이 어떻게 작용반작용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생명을 연구할때 물리학적 과학의 조건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생명을 본래의 자연스런 모습과는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적당한 환경에서 떨어진 DNA, 일부로 잘라져 나온 생명, 자연은 본래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보다 자연스런 모습을 유지시키면 이번에는 물리학적 분석의 방법이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생명과학이 요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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