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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새로운 생명과학에 대한 생각 3

by 격암(강국진) 2010. 8. 20.

10.8.20

생명과학의 원리

 

이제까지 말했던 것을 정리해 보면 새로운 생명과학의 원리라는 것은 '우리는 생명을 연구할 때 그 생명이 무엇인가를 물어서는 안된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그것과 어떻게 관계하고 상호작용하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썼다고 해서 기존의 물리학적 연구와 시각이 틀린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런 시각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인류의 문명은 그에 기반하여 크게 발전했다. 내가 말하는 새로운 생명과학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우리가 물리적 도구와 기계를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야구와 물리학이 다르듯이 우리는 환원주의적 시각에 근거한 것과는 다른 성취를 이런 새로운 시각을 시도해 봄으로서 얻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는 뇌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뇌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의식은 우리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인간은 다른 인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질문을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물리학적 연구와 두가지 면에서 크게 다른데 하나는 연구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가지고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뇌와 의식과 인간이 뭔지 미리 가정하고 아는 것처럼 연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미지의 블랙박스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하나는 물리학적 연구에서는 관찰자 혹은 연구대상이 상호작용하는 대상을 가급적 분리시키지만 생명과학에서는 적극적으로 그 실체를 인정하고 사고의 중요한 기반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환자가 이러저러한 질병에 걸려있으니 이 질병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혹은 이 질병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환자는 그 환자를 접하는 의사를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로 포함하는 이러저러한 환경안에 존재하는데 이 환자는 이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환경은 이 환자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묻는 것이다. 환자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런 반응에 대해 어떤 반응이 주어져야 하는가. 이런 접근이 과연 기존의 방식으로 내리는 진단과 치료보다 보다 정확하고 빠른 진단과 치료를 줄지는 나도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상호작용을 말하면서 결코 환자나 의사 각각의 개체의 본질을 탐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과의 상호작용을 생각할 뿐이다. 이것은 문제안에 본질적 불확실성을 포함시키는 것이므로 이런 연구는 기존의 물리학 연구처럼 엄밀성을 가질 수가 없다. 이런 종류의 연구가 만들어 내는 것은 아마도 정신적 자전거 같은 시스템일 것이다. 그 시스템은 정해진 메뉴얼대로 기계적으로 저절로 움직여 지지 않는다. 어떤 환자가 치료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 시스템은 다만 인간을 보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가 연구하는 대상인 생명체와 관찰자간의 민감하고 폭넓은 상호작용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생명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

 

나는 생명과 같은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생명과 관찰자인 생명체가 그것과 강한 유대를 맺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과학적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것을 늘상 느끼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당신은 그 사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어떤 감정적 가치적 유대 혹은 감정이입을 느끼지 못한다고 할 때 과연 그것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일까? 그 사람과 관계를 전혀 맺지 않으면서 그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은 마치 거울앞에서 서 본적이 없으면서 그 거울 앞에서 서면 뭐가 보일지를 연구하는 것과 같다. 

 

가난해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을 보면서 아무런 감정적 영향력을 느끼지 못하면서 난 그 학생의 행동을 이해해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식을 잃은 부모는 물론 슬플테니까 하는 식으로 어떤 원리 원칙에 기반하여 자식잃은 부모에게 물론 자식을 잃어버리셨으니 슬피시겠지요, 이해합니다라고 말할 때 정말 이 사람은 뭔가를 이해하는 것일까?

 

물리학적인 과학은 가치나 감정적 요소를 최대한 사라지게 만든다. 내가 말하는 생명의 연구는 적어도 일정부분 그런 것을 포함시킨다. 객관적 연구가 아니라 그것과 관계를 맺고 그 일부가 됨으로서 상대와 나를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기존의 과학과 인문학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어떤 것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시나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는 것과 비슷한 과학이라는 것이다. 

 

뇌과학의 경우

 

우리가 뇌를 연구하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내가 기술한 원리들에 따르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뇌와 어떻게 직접적으로 '유대'를 맺고 상호작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BCI(brain-computer-interface)라는 분야에서 연구되는 것을 연상시키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런 연구에서는 내가 말하는 의미로는 인간이 빠져 있다. 뇌의 상태가 어떤 기호로 전환된다. 그런 프로세스에서 관찰자는 외부에 있으며 모든 것은 엄격히 정의되어 있다. 우리가 타인의 뇌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유대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런 연구에서 우리는 BCI에서 쓰는 기구를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며 컴퓨터의 보조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내가 워드 프로그램을 써서 글을 쓰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뇌를 이해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뇌와 내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상호작용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그 뇌가 다수의 사람과 동시에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것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 우린 뭘 추구하는가.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을 추구한다. 이를 테면 알츠하이머 혹은 치매는 주요 뇌질환중의 하나로 이 병의 원인을 알아내고 치료법을 찾는 것은 신경과학분야의 커다란 숙제중의 하나다. 간질병이나 헌딩턴 병같은 신경관련 뇌질환들은 암도 조기진단하고 고치는 시대에 이해하지 못하는 병으로 남아있는데 이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뇌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방향은 알츠하이머라는게 무엇인가를 알아내서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기술한 생명연구에서의 문제점등의 이유로 진전이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그래도 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있으며 그런 연구는 그 나름대로 성과를 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시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환자가 병원에 입원해서 이런 저런 수술을 받고 약을 먹는다고 하자. 치료의 핵심은 이것들로 인식되기 때문에 여기서 다른 것들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환자가 어떤 책을 보고 어떤 티브이프로그램을 보며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고 그 병원의 병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내가 앞에서 기술하는 것은 말하자면 사랑에 가득찬 엄마의 간호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엄마는 아픈 자식이 이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 모두 민감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반응을 한다. 환자인 자식은 이런 엄마를 환경으로 둔 상태에서 상호작용하면서 때로는 크게 차이가 나는 회복세를 보인다. 이것은 엄마와 자식이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저 돈받고 애정없이 일하는 간병인이 거의 똑같은 일을 하는 것같아도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뇌에서 직접적으로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보를 인간적으로 그리고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말이나 미묘한 행동에서의 변화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이 우리가 알고 있는 수술이나 투약이 되고 말아서 겉으로는 차이가 없어보일수 도 있지만 이런 방식의 연구는 분명 병에 대한 회복과 치료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다른 뇌 혹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수준에 있어서 큰 차이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맺는 말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되는 것이 좋겠다. 오늘날 인문학은 죽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인간과 인간사이의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같다. 세상이 점점 더 빠르고 점점 더 복잡하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나 무선 통신은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물질적 발전은 정체되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방식의 소통이 필요하기 때문에 20세기에 들어서 이런 것들이 발명되고 널리 쓰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린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치 못할때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는 낭비되어 진다. 환경문제도 우리는 같은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동식물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가치적으로 감정적으로 유대를 맺을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뇌과학의 예를 들때는 결국 BCI 류의 예를 들기는 했지만 나는 그런 기술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핵심은 나에게 있다. 새로운 생명과학은 관찰자를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생명체를 볼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거기에서 반사된 나 자신의 모습이다. 즉 유대와 소통을 위한 나의 정립과 변화가 핵심적이다. 나는 지금 정신상담과 비슷한 치료를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훨씬 더 그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더 많이 연구된 것을 말할 뿐이다. 특정 약물을 주입해서 특정 병을 치료한다는 식이 아니라 환경전체가 인간과 접속해서 환자를 바꾸는 것이다. 어쩌면 환자의 상태와 약물들을 포함한 환자의 환경과의 관계를 인공지능적으로 처리해서 미묘하게 끝없이 처치를 바꿔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물리적 이해로 세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말한 새로운 관계의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정말 아는게 너무 없다. 말하자면 혼자서 살면서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꼬마가 이제야 세상과 친분을 만들기 시작하는 단계랄까. 세상의 무지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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