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죽음에 대하여 2

by 격암(강국진) 2010. 5. 16.

10.5.16

요즘은 공기방울의 비유가 내마음속에 자주 떠오른다. 그래서 반복이 되고 말지 모르지만 인생과 생명과 공기방울에 대해 다시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물속에서 공기방울을 보면 그 공기방울은 실체처럼보이고 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공기방울이 서서히 위로 떠올라서 물표면에 도달한 순간 우리는 대단한 존재의 반전을 목격하게 된다. 즉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한 공기방울이 사라지면서 환경이랄까 공기방울의 바깥을 채운 물이 실체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공기방울이 터지는 순간 공기방울이 있던 자리는 물이 없는 자리가 되고 만다. 공기는 '허상'이 되고 물이 '실체'가 된다. 

 

나는 어떤 신비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리학적으로는 신비할것이 없다. 공간이 있고 물분자가 있는 곳이 있고 공기분자가 있는 곳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공기방울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시각으로는 물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공기방울로 보이고 물밖으로 나오면 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물안에서 물은 희미한 존재감이 있고 물밖에서 공기는 역시 희미한 존재감만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생명의 나고 자라고 죽는 것을 연상시키며 어떤 직관적 호소력을 가진다. 여기 어떤 사람이 죽는다. 우리와 함께 울고 웃던 사람, 야망을 가지고 슬퍼하기도 좌절하기도 기뻐하기도 했던 그 사람, 우리가 사랑하거나 매우 미워했던 그 사람이 죽었다. 죽고나면 이제 그 사람이 남긴 시체는 그저 흙덩어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분명 저 시체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로 간것인가. 

 

이러한 느낌에 빠지는 것은 우리가 인간과 인간이 대화를 하고 인간이 자연을 개척하며 인간이 아닌것, 생명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아주 희미한 존재감만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은 아닐까. 그리하여 하나의 인간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그 존재를 다하고 시체하나만 덩그라니 남겨놓고 공기방울 꺼지듯 사라졌을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생각하면서 어떤 충격을 받는다. 인간이 제사의식을 가지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가진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죽음을 목격하면서 흔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산 자를 위해서 우리는 죽음이 주는 충격을 어떤 식으로던 해소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종교, 굿판, 장례식, 무덤, 가문이나 영혼의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죽음의 과정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가득 차있는 어떤 존재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분명 저 움직이지 않는 시신은 그 존재와 다르다. 그런데 그럼 그 존재는 어디로 간걸까. 결국 죽고나면 모든것이 허망한 것인가? 우리의 존재도 연약한 공기방울 처럼 퍽하고 터지면 사라지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런 거라면 도대체 가치는 뭐고 윤리는 뭔가? 

 

죽음에 대한 고민은 흔한 것이지만 이것이 공기방울의 비유와 결합할때 우리는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홀로 허공을 나르는 입자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이 변화하는 과정의 일부로서의 우리다. 공기방울은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보기나름에 따라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이어진 물이다. 두개의 동떨어진 공기방울은 우리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물 안에 생긴 두개의 구멍이다. 그 두개의 공기방울은 오른쪽 콧구멍과 왼쪽 콧구멍이 서로 독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독립적일 것이다. 

 

물안에 있을때 공기방울이 자신은 실체라고 생각하고 사방에 가득찬 물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에게 환경은 그저 그 존재가 미심쩍은 엷디 엷은 공기같은 것이다.그러나 나를 뭐로 생각하는가에 따라 실은 실체는 그 환경이며 나라는 것의 존재야 말로 엷디 엷은 공기같은 것일 수가 있다. 

 

죽음은 생생히 존재하는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인 동시에 그저 희미하게만 존재하는 것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하루 하루를 오늘이 이 세상에 있을 마지막 날인것처럼 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이 뭐건 이런 말을 들으면 왠지 어떤 좋은 효과가 느껴진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관념적인 것은 전혀 가치를 두지 않는 배금주의자나 세상 모든 것은 다 허무하다는 허무주의자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배금주의자에게는 자신이 들고 있는 물질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여줄 것이고 허무주의자는 모든 것이 안개같기만 했는데 세상의 것들이 죽음앞에 갑자기 또렸해 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공기방울이 터지기 직전, 공기방울이 물표면에 닿아 터진 직후에 공기방울이 눈이 있어 뭔가를 본다면 그것은 거대한 하나 일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 공기방울이 터지면서 세상에 대해 열리듯이 죽음은 우리의 존재를 열어 자연과 하나되게 만드는 과정이다. 우리는 시체를 남기지만 그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이 세상 모든 것과 하나가 된다. 

 

죽음앞에서 우리는 내 것이라면서 끌어다 모아놓은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존재가 지워지기 직전에, 우리는 삶과 죽음을 한꺼번에 보고 생각하게 된다. 허무한것도 없고 실체도 없다. 그것은 실체가 허상이 되고 허상이 실체가 되는 순간이다.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뭐가 그렇게 허망하다는 것인가. 

 

매순간 우리가 죽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다면, 우리가 고정되고 영원한 존재라기 보다는 임시적이고 연약한 물속의 공기방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마도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여러가지 비본질적인 계산에 혼란되거나 그저 살아오던 습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 내가 해야만 할 일에 대해 좀 더 확실한 감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죽음에서 살아돌아온 사람들이 종종 지혜로워졌다는 말을 듣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은 매우 유익하다. 그것은 무한한 지혜의 샘물이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