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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죽은 사람은 사람인가.

by 격암(강국진) 2010. 4. 17.

2010.4.17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기전에 심장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아니면 집이나 자동차 뭐든지 좋다.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기능하기를 멈춘 순간 이후 그것이 그것일 수 있을까? 즉 심장이 심장으로서 기능하기를 멈춘 순간 이후 그것은 심장인가? 집이 집으로 기능하기를 멈춘 순간 이후 그것은 집인가? 자동차는 어떤 가.

 

이것은 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매우 단순한 질문이다. 집은 벽돌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다 부서져있는 집의 잔해 속에서 벽돌을 찾아 이것이 집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정확히 말해 이것은 집이었던 것의 일부라고 해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말은 의미가 없다. 집은 이제 없다. 집이 집으로 기능하지 못하면 그건 집이 아니다. 너무나 간단한 것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도달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본질적으로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건 생각의 조각이고 추상적 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집이란 것은 오직 그 기능으로서만 존재한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집은 현재 그 기능이 그 물질의 집합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서 혹은 사고가 나서 그 물질이 흩어지고 부서져서 더이상 집으로서의 기능을 못하면 그것은 집이 아니게 된다. 

 

심장이 멈춘순간 심장은 심장이 아니게 된다. 심장은 그저 고기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차가운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되어있어도 인공심장이 심장의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심장이다. 생긴 것은 주전자처럼 생겼고 주전자로 쓰이라고 만들어졌어도 망치의 기능으로 쓰이고 있다면 그것은 망치이며 박스로 만들어졌지만 의자로 쓰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자다. 

 

우리가 기능으로서의 물건의 본질을 물질에다가 붙이는데 익숙한 것은 그것들이 오랜 동안 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관행이 생기기 때문이다. 망치는 대개 망치로 쓰이고 심장은 평생을 부지런히 뛴다. 집도 한번지으면 수십년에서 수백년을 간다. 그래서 물질과 그 사물의 본질적 기능을 동일시 하게 된다. 

 

이런 착각으로 인해 우리는 때로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같다. 본질을 놓치고 물질을 쫒아가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시신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그 사람의 기억때문이지 시신 자체는 이제 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사람으로서 기능하지 않는 물질이다. 

 

보다 중요한 질문, 보다 중대한 실수는 이것이다.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관행 특히 법과 같은 사회적 관행일 뿐이다. 심장처럼 생겼어도 피를 돌게 하지 않으면 심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으로 기능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남이 정해준 책에 씌여있는 도덕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것이야 말로 사람이 아니다. 남이 정해준 규칙을 스스로 가치를 느끼지 못한 채 따르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즉 내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그런 것을 존중하고 싶다고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람이 사람이고자 한다면 가치를 느낄 수가 있어야 한다. 가치는 책에 이것이 중요하다고 써있는 것을 공부해서 얻는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느끼는 능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정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그건 마음이 혼란되면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남이 하는 것을 반복하고 싶은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시스템의 부속품으로서 그저 남이 하니까 그대로 따라하기만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기를 멈추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계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할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출세와 돈이나 물질과 쾌락을 모두 포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 있고 그게 더 행복하며 그게 자신이 판단한 일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이 판단할 일이다. 자신이 느낄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힘을 무한히 믿어서 이데올로기로만 인간의 가치를 파악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멈춘다. 인간해방을 위한 이데올로기는 해방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인간을 격하시키며 결국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자동차가 편리한 것이듯이 이데올로기는 편리하고 좋은 도구다. 그러나 자동차는 차도에서만 몰아야 하듯이 모든 이데올로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만 이데올로기는 안전한 도구가 된다. 이데올로기를 절대진리로 파악하는 사람에게 이데올로기는 흉기가 되고 만다.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이 가진 삶의 본질은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약간 강조점을 주자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좋다라는 것은 가치를 의미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은 참 좋은 분이지만 나와는 이념이 달라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문장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참 좋은 분이지만 내가 가진 차와는 다른 차를 탑니다. 이념은 그저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이념때문에 포기하고 희생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이념을 넘어 내가 느낄 수 있는 어떤 가치를 그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생각보다 훨씬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걸 이념을 기반으로해서 우리는 서로 같이 갈 수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논리적으로 보아 이념은 같지만 어쩐지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가치를 느낄 수 없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은 이념이 같아도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거나 아예 사람이 아니다. 이념을 위해서 좋은 사람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아니라 이념을 봐서는 안된다. 사회가 좋은 사람으로 가득 찰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한 사회가 이룩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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