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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죽음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10. 4. 24.

10.4.24

죽음을 생각하니 물방울에 대한 생각이 문득 난다. 물방울이 물안에 있을때 사방을 꽉채운 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물방울이 실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물방울이 표면에 도달했을때 갑자기 안과 밖이 뒤집어지고 이제 물이 실체가 되고 물방울은 그저 물안의 빈공간이 된다.

 

우리는 자 이제 태어나야지 하고 결심하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의식이란걸 가지고 보니 이미 나는 살고 있더라는 상황이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꽤 중요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아닐까. 이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고 뭔가를 이루는 나를 느낀다. 나라는 존재가 실체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희노애락을 느끼고 영광과 비참함을 가지고 겪으며 사물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목격하면서 크게 부서지게 된다. 숨이 끊어지고 나니 사람이란게 그냥 흙덩어리와 다를게 없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온갖 가치는 무엇일까. 그건 다 어디로 간것일까.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은 그저 물방울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 아닐까. 

 

죽고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감, 이 허무감을 극복하는 것은 인간의 큰일이다. 도망칠 수 없는 죽음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가치판단을 향해 끝없이 도전장을 던진다. 그래서 뭐 결국 죽고 말것을. 

 

김용옥은 논어강의를 하다가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동양의 사상등에서 나타난 죽음에 대한 다른 태도를 지적한 적이 있다. 서양은 영혼은 불멸하다라는 것으로 죽음의 허무감을 극복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죽는 것같지만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의 부활이고 모든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윤회를 말하는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윤회하며 결국 더 높은 상태로 진화해 간다는 것이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어떤 단일한 정체성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고 믿고 다만 혼과 백으로 인간을 구분하여 육신인 백은 빨리 흩어지고 보다 영적인 혼은 천천히 흩어진다고 생각할 뿐이다. 동양에서 죽음의 허무감은 역사성으로 극복된다. 즉 내가 죽어도 내가 만들어낸 영향은 남는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조상을 숭배하고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에는 인간이 나고 죽는 것에 대한 이런 태도가 그 뿌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상은 가문이라는 무한한 연속성을 가진 집단을 통해 세상에 그 영향을 남기는데 그것이 흩어져 부서지게 만드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동양적인 시각은 내 마음에 든다. 하지만 서양적인 것에도 배울 점이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하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맹신에 빠져서는 안된다.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져서는 안된다. 모든 것은 정의 할 수 없고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린 그림이고 도구다. 친구도 부모도 다른 모든 대단하고 평범한 사람들도 불멸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세상의 영향을 자기안에 포용하고 그리고는 다시 세상에 자신이라는 파문과 자국을 남기고 떠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불멸이고 다시 태어나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실체로 느끼는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그저 도구에 불과한 것, 그것 자체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세상 일체의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관념이라는 생각을 해도 결국 그것들은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백억이라던가 천억이라던가 몇십조의 돈이라는 것도 결국 수단에 불과하며 그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물질에 팔려 스스로를 잊으면 물질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물질을, 모든 사회활동을 허무한 것으로 무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필요하면 돈을 벌고 차도 타고 비행기도 탄다. 편리한 것인데 필요해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집착이다. 

 

단단히 자기 생활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는 인간은 아름답다.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의 이름으로 밖에 부를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아름답다. 제 아무리 잘 가꾸고 질서를 잡은들 그 질서는 결국 흩어지고 특히 죽고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원불멸은 아닐지라도 그런 삶이 왜 의미가 없겠는가. 

 

정약용은 나경이라는 노인과 뜬세상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 노인은 삶은 그저 떠다니는 것일뿐인데 귀양와서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정약용이 집주변을 잘 가꾸고 살아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정약용은 따지고 보면 떠다니지 않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그런 예들을 나열한 후 세상이 전부 이러한데 떠다니는 것에 상심할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이 세상에 모든 중요한 일들도 알고 보면 다 떠다니는 것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삶이 허무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끝없이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세상일의 허무성을 깨닫고 그 허무함을 극복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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