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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진화론, 이기적 유전자 그리고 의혹

by 격암(강국진) 2011. 8. 24.

11.8.24

진화론의 중요성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진보, 자유주의, 시장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등에 의해 움직여 지는 사회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로 오늘날 현대인이 살아가는 방식의 핵심에 있는 것이 진화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진화론이 등장했을때 사회적 충격이 있었듯이 진화론에 대한 어떤 반증이나 반론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지구가 들썩거릴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진화론이 틀린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는 식의 기획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화론에는 명확히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나는 이것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도킨스의 의견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적자생존과 자연선택

 

우리가 진화론에 대해 가장 많이 말하는 두가지 말은 아마도 적자생존이라는 것과 자연선택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무엇일까. 도킨스는 우수한 유전자에 대해 말하면서 이음동의어의 반복이라는 말을 한다. 즉 생존에 도움이 되는 유전자를 우수한 유전자라고 말했을 때 우수한 유전자는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문장은 실질적으로 같은 말을 두번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똑같은 말을 적자생존이라는 말에서 그리고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에서 행하고 있다.

 

도대체 적자라는 말이 뭘까. 도킨스는 이기적과 이타적이라는 말을 정의함에 있어서 이기적 유전자란 개체의 생존가능성을 증가시키는 유전자를 말한다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하면 번성하는 유전자는 이기적이다라는 말은 실질적으로 같은 말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간단하게 이기적인 유전자에 대해 말한 연후에 그는 보다 복잡한 경우를 탐구하면서 이 경우도 왜 그것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이타주의가 아니고 이기주의인가를 말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정의에 따르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개체의 생존을 증가시키고 결국 유전자의 번성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이는 일이 된다.

 

이런 논의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피드백이 있는 환경이다. 그는 게임이론등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여러가지 예를 들고 있지만 실은 그런 설명의 세부사항을 따르기 전에 보다 중요한 출발점의 점검이 필요하다. 즉 결과적으로 유전자의 번성을 촉진하는 것이 이기적이다라는 정의를 따르면 오늘날 번성하고 있는 유전자들은 모두 이기적이다라는 결론은 처음부터 자명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강자나 생존자의 논리다. 사회적 승자가 적자생존의 논리를 말할 때는 종종 자신은 더 뛰어나서 생존하는 것이고 뛰어나지 못한 너는 도태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든 승리하고 번성하면 나는 잘났다고 할수 있으며 실은 그런 결과가 순전히 운에 따른 것이라도 그렇게 해석되게 된다. 그런 논리는 단지 승자들의 얼굴에 금칠을 한번 더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존한 자가 적자라고 말한 후 나는 적자이므로 생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번성하는 나라의 국민은 이기적이라고 정의하면 이기적인 국민들이 있는 나라가 번성한다고 말하게 된다. 그런데 그 국민들이 사회적 협력을 통해 번영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러면 그러한 양보조차도 실은 이기적인 이유로 행해진 것이므로 본질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하게 된다. 무의미한 반복의 계속인 것이다. 

 

선형적 이론과 복잡계

 

리처드 도킨스의 논의를 읽어보면 우리는 익숙한 선형적 이론과 단순한 평형에 대한 논의를 거듭해서 만나게 된다. 선형적 이론이란 바로 어떤 요소가 조금 더 이러하면 그 결과는 조금 더 저렇게 될것이다라는 식의 논의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결과가 우리가 조건을 조금 바꿨을 때 조금 바뀔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만은 않는다. 좋은 예가 바로 날씨예측이다. 날씨예측은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내일의 날씨예측을 듣는다. 그러나 시간간격이 길어지면 예측은 잘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시스템이 비선형적이라서 그렇다. 약간의 차이가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거의 같은 조건이었는데도 내일의 날씨가 전혀 다를 수 있다. 

 

똑같은 것을 우리는 역사에 대한 설명에서도 발견한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보면 이래서 저래서 역사는 이렇게 흐를 수 밖에 없다고 쉽게도 이론과 설명을 만들어 내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현재의 역사적 흐름을 예측하는 것에는 매우 무능하다. 실제로 우리가 경제적 변화를 관찰해 보면 그것은 예측불가능한 비선형계임이 금방들어난다. 경제가 비선형인데 역사는 선형일 수 있는가? 

 

진화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진화역사를 늘어놓고 이것은 이래서 이랬고 저것은 저래서 이랬으며 이 유전자는 이러저러한 장점이 있어서 번성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기는 쉽다. 또한 단기적으로는 옳을 것이다. 그러나 긴 시간간격에서는 우리는 진화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뭐가 좋은 유전자인지 뭐가 좋은 특성인지 모른다. 역사란 우리가 지금 축구를 하는것같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농구를 하고 있는 상황으로 급변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그래서 축구선수의 재능이 좋은 것같았는데 갑자기 쓸모없었던 농구선수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도킨스는 그의 책에서 이러저러한 특징은 당연히 도움이 될것이므로 이렇게 저렇게 번성하게 된다는 식의 설명을 끝없이 늘어놓고 있다. 우리는 언제 시스템이 비선형적 변화를 크게 만들어 내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결과적으로 번성하고 살아남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좋은 유전자가 살아남는다는 말은 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한 이음동의어의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

 

원자론과 유전자 중심론

 

도킨스는 그의 책의 제목을 불사의 유전자로 할것을 그랬다고 말한다. 그의 책의 핵심적 메세지는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이 일어나는 수준이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자 수준이라는 것이며 유전자는 실질적으로 불멸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논의는 원자론이나 뉴튼 역학같은 고전적 과학이론 특유의 특성을 보인다. 원자론의 특징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이 세상의 변화는 표면적인 것이고 착각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무한한 수명을 가지고 변하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원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 원자들이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불변하는 자연법칙에 따라 섞이고 상호작용하는 것이 현실세계라는 것이다. 도킨스의 시각은 원자를 유전자로 대체하고 뉴튼법칙을 다원의 자연선택의 원리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바로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은근슬쩍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처음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마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변화하지 않는 법칙이고 변화하지 않은 요소이지 우연한 요소나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론에 따르면 우리가 원자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그리고 그 원자들을 움직이는 자연법칙을 아는 순간 이세상에는 불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의 원자의 환경을 이루는 것들도 다 원자들이다. 이러한 성질때문에 뉴튼역학은 엔트로피의 법칙이나 진화론과 모순되거나 그것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뉴튼역학적인 시각으로 보면 세상은 질점으로 이뤄져 있고 그것은 그저 열역학적 죽음의 상태 다시말해 가장 잘 섞여있는 엔트로피 최대점의 상태로 접근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더욱 더 복잡한 상태로 진화해가는 생명이 가득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주 특이한 행성에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대부분의 공간에는 생명이 없는데 지구에는 생명이 있다. 이것은 로또에 맞아 엄청난 부자가 된 사람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또에 맞을 확률이 없으므로 인간의 삶이란 대개 무일푼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말은 맞지만 본인은 사실 로또에 맞은 사람이니 엉뚱한 말이다.  

 

도킨스는 비록 상호작용이나 되먹임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을 가하고 있지만 그가 생각하는 세상은 선형적인 세상으로 결국 어떤 특정한 유전자 개개의 성질에 따라 전체 세계가 결정된다. 환경의 역할은 매우 단순화 된다. 그러나 환경의 역할을 더욱 강한 것으로 인식하면 이제 좋은 유전자, 우수한 유전자가 살아남는다던가 그 환경에 잘적응한 유전자가 잘살아남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유전자의 작용은 환경자체를 바꾸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어떤 환경을 창조하고 그 환경에서 어떤 결과를 보일것인가를 우리가 쉽게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범죄를 잘 저지르는 사람이 사회를 치안이 나쁜 곳으로 만들면서 그런 치안이 험악한 곳에서 잘 살아남는 범죄자가 우월한 인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실은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치안이 좋은 사회를 만들어 번성하는 사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화의 의미

 

역사에 대해 그러하듯이 우리는 마치 미래를 예측할수 있는 것처럼 이러저러해서 진화가 일어났다고 말할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과거를 보고 거꾸로 이유를 가져다 붙일 뿐이고 우리가 왜 이런 특성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화의 과정을 알게 됨으로해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좀 더 잘 알 수는 있지만 우리가 적자이기 때문에 생존했다는 식의 설명은 오만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컴퓨터 자판을 쳐서 쓰고 있다. 인간의 손이란 컴퓨터 자판을 쓰기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생존 나아가 나의 유전자를 번성시키는 것일까? 돈 잘 벌어 사회적으로 성공한 야구선수의 신체적 특징은 어떤 유전자의 성공이라고 말해야 할까.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따질 수 없고 따질 수 있다고 해도 종종 그것을 뒤집는다. 

 

인간이 지능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 나는 한가지 설명을 들은적이 있다. 인간의 두뇌는 단순히 오랜동안 지구력을 가지고 달리기를 할수 있기 위해 이렇게 커졌다고 한다. 그 지구력으로 사냥감을 쫒아가기 위해 두뇌가 커졌는데 커지고 보니 인간의 발달된 인지능력은 문명을 만들고 총을 만들어 총을 가지고 사냥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두뇌를 발전시킨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 유전자는 총을 만드는 방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연히 그렇게 사용되었을 뿐이며 만약 인간이 원자폭탄전쟁으로 자멸한다면 인간의 두뇌는 결국 인간종족을 멸망시킨 나쁜 유전자의 의미를 가지게 될것이다. 

 

어떤 대상과 그 환경을 구분하는 것은 진화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힘들게 한다. 우리는 환경을 떼어내면서 그 안쪽의 것은 그 환경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마치 위쪽이 없어도 아랫쪽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환경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망각한다. 많은 것은 그저 원래 그런 것이다. 하지만 대상과 환경이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진화란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근사적으로만 옳을 뿐 절대적으로 옳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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