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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시각과 청각 그리고 미래예술

by 격암(강국진) 2012. 5. 14.

12.5.14

눈과 귀의 차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모두 감각의 일종으로 비슷한데가 있는가하면 매우 다른 점도 많다. 예를 들어 보는 것은 우리가 디지털 카메라의 화소수를 따지듯이 수없이 많은 점들로 이뤄진 시각패턴에 대한 것이다. 이때문인지 우리 뇌는 아주 큰 부분을 시각정보를 처리하는데 쓰고 있다. 망막을 통과하면서 전기신호로 바뀐 시각정보는 시각처리과정의 단계 단계를 거치면서 선이라던가 움직임이라던가 얼굴을 인식하는 일에 쓰인다. 처리해야 하는 정보량이 많은 이 과정의 어려움은 아직도 패턴 인식에 관한한 인간이 기계보다 우수한 능력을 보인다는것을 보면 알 수있다, 감각중에서 시각은 말하자면 우리가 아주 큰 댓가를 치루고 어렵게 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때문일 테지만 시각은 청각에 비해 오히려 둔감한 면이 있다. 많은 댓가를 치루지만 시각정보처리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것처럼 빛이란 전자기파로 일정한 진동수를 가진 파동이다. 그리고 이 진동수 혹은 파장이 그 빛에 색이라는 특색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모든 가능한 주파수를 다 보는 것이 아니라 겨우 가시광선 영역 이내의 빛에만 반응을하며 그나마도 엉성해서 겨우 3가지의 빛정도만 인식한다. 이런 엉성함때문에 우리는 색의 혼합현상같은 것을 겪게되는데 예를들어 청색과 노란색을 섞으면 초록색으로 보인다던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쩌면 색을 섞으면 다른 색이 되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같은 일이 청각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색의 혼합이란 시각기관의 엉성함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귀는 소리를 듣고 소리란 물론 통상 공기의 진동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소리는 여러개의 진동수를 가지는 파동들의 합으로 생각할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빛과 소리라는 구분만 있을 뿐 파동을 느끼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시각과 청각은 별로 다르지 않다는것을 알게된다. 

 

그런데 귀는 눈과는 달리 그저 몇개 주파수만 느낄 수 있는게 아니다. 귀 안에는 달팽이관이라는 기관이 있어서 서로 다른 주파수를 느끼는 부분이 나선형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귀는 아주 넓은 가청주파수 영역을 가지고 있어서 몇헤르츠애서 몇만 헤르츠의 주파수를 따로 구분해서 듣는다. 이때문에 두개의 진동수를 가지는 음을 합쳐도 우린 그것을 다른 한개의 음으로 느끼는 일이 없다. 

 

노란색과 청색을 합하면 초록색이 되는 것은 눈이 귀처럼 다양한 주파수의 파동을 인식할 수 없기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청각이 시각처럼 둔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좋은 음색을 가진 피아노 소리라던가 배우의 목소리가 좋다던가하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같은 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단지 귀를 두개만 가졌기 때문이다. 정보채널이 두 개란 뜻이다. 반면에 눈은 수없는 화소들을 봐야 하니 채널 수가 훨씬 더 크다. 눈이란 말하자면 엄청난 수의 귀가 모여있는 기관이며 그때문에 생기는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로 하나하나의 귀는 아주 엉성한 그런 기관인 것이다. 

 

청각 매체

 

이런 시각과 청각의 차이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에서 나타난다. 음악에는 음색이 있고 감정이 대개 결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슬픈 음악이라던가 기쁜 음악을 말하고 소음에 민감하다. 청각신호가 우리의 내적인 상태를 쉽게 교란시킨다. 반면에 시각은 이렇지 않다. 슬픈 화소란 있지 않다. 

 

물론 우리는 어지럽고 정신없어 보이는 방안에 앉아서 짜증이 생긴다던가 하는 일을 겪기는 한다. 분홍색 벽지가 우리를 좀 더 흥분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각적 혼란보다는 청각적 혼란에 훨씬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가 칠판을 손톱으로 긁어대는 소리를 내는 것을 상상해 보라. 혹은 시끄러운 트럭소리나 공사판에서 콘크리트를 부수는 소리를 생각해 보라. 그런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저분한 연구실에서 마음의 평정을 느끼며 연구를 하는 과학자는 많지만 소음이 넘쳐나는 연구실을 생각하는 장소로 선호하는 과학자는 없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청각적 혼란에 훨씬 민감한 것이다. 플레이보이가 되는 첫번째 조건은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멋진 목소리라는 말이 있다. 그것도 이때문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청각이 소리를 통해 감정의 상태를 느끼게 하는 능력이 있는것은 우리의 언어 생활과 깊은 연결이 있다. 결국 감정이란 인간의 상태이며 소리에 불과한 음악에 감정을 결부시키는 것은 언어생활속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즉 우리는 수화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시각적 신호가 아니라 주로 소리로 즉 말로 소통한다.  인간의 언어전통은 분명 말이 먼저고 문자생활이나 수화가 쓰이는 것은 나중에 나온 것이며 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도 먼저 음성언어를 배우고 나중에 글을 배운다. 즉 우리는 음성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상태를 알아내는 훈련을 먼저 하는것이다. 다른 사람이 화가난것인지 슬픈것인지 우리는 그 목소리를 통해 느껴야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것이 모두 후천적으로 학습된것은 아닐것이다. 분명 사람은 후천적으로 한국어나 영어같은 통상의 언어를 배우지만 원시적인 선천적인 언어는 우리의 본능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마치 뛰는 법을 배운적없는 망아지가 태어나자 뛰듯이 우리는 어떤 소리는 슬프다던가 어떤 소리는 화가 난다던가 하는 의미를 선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같다. 

 

시각적인 경우에는 인간의 표정이 감정을 전달하는 좋은 예가 된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우는 것을 통해 즉 인간의 표정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낸다. 그리고 이것도 학습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다. 연구자들은 다른 문명과 접촉한 적이 없는 오지의 인간들의 표정도 대도시의 보통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표정을 짓는 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같은 포유류인 개같은 동물도 인간의 감정을 읽을 수 있고 많은 인간들은 개의 감정을 자신이 읽을 수 있다고 느낀다. 

 

정리해보자면 다른 인간의 감정상태를 소리를 통해서 느끼는 능력이 소리에 어떤 감정적 특색을 부과한 것같으며 이러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선천적인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후천적인 것이다. 그래서 헤비메탈이나 클래식 음악은 듣는 사람에 따라 음악일때도 있고 고문일 때도 있다. 

 

음악발전의 역사란 인간들이 추상적인 소리를 통해서 어떻게 서로 감정과 의미를 전달했는가에 대한 역사라고 할수도 있다. 자유라던가 민주주의라던가 히피 같은 인간언어의 많은 단어가 추상적이고 애매한 의미를 가진다. 음악은 더더욱 추상적인 언어로 단어의 나열로 이룩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음악이 없었다면 청소년기에 자살하고 말았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시각 매체

 

이에 비교하면 시각매체쪽은 음악과 같은 수준의 힘을 달성하지 못한게 아닌가 하고 조심스레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민감성에 대한 개인차도 있을 것이므로 일률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림이 인간을 휘어잡는 강도는 음악에 비하면 약하다. 

 

앞에서 말한 시각과 청각의 차이에 의해 청각에서 시간에 해당하는 것이 시각에서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 즉 청각은 시간축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이고 시각은 공간축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이다. 소리가 시간에 따라 변해가면서 음악을 완성해 감에 따라 우리는 깊은 감동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이 음악안에서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한다. 그렇다면 시각적 효과로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 아름다운 물건이나 인간을 사실대로 그려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소리로 말하자면 예쁜 목소리를 녹음하여 그대로 재생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림도 물론 현대에서는 추상성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음악의 추상성이 훨씬 효과적인 것같다. 

 

우리가 만약 시각신호로 더 세밀하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낼수 있었다면 우리는 말이라는 음성언어대신 어떤 시각적 패턴을 언어로 먼저썼을지 모른다. 말하기보다 글쓰기를 먼저 배우는 세상이란 생각해보면 기묘하긴 하지만 말이다. 추장이 엄숙하게 수화로 말하면 그 손끝이 떨리는 것에서 사람들은 추장의 감정을 생생하게 읽어내는 그런 세상이다. 

 

시각패턴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좋은 예는 물론 문자다. 우리는 사랑이라던가 죽음이라던가 하는 단어를 보면서 그에 대응하는 정서적 반응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에게 - 나자신을 포함하여- 추상화는 그저 추상적일 뿐이다. 아마도 시각적 정보해석의 훈련이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사이에서 추상화의 의미를 느끼는 능력이 따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클래식음악같은것도 아이들에게 처음들려주면 무섭다같은 반응이 나오곤 한다. 나도 어렸을 때 베토벤 음악만 들으면 머리가 아프던 것이 기억난다. 추상화를 이해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음악도 훈련에 의해 능력을 길러야 그것을 감상할 수 있다.음악이나 추상화는 각각 매우 추상적인 언어이며 그 언어들을 습득한 사람만이 그 언어가 전달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미래 예술

 

추상예술은 모두 우연히 생겨난 효과를 이용하는 것이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용하니까 그렇다. 예를 들어 슬픈 목소리라는 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슬픈 첼로소리라는건 자연의 소리는 아니다. 그런데 자연에 존재하는 신호가 아닌 신호에 대해 우리는 감정을 느낀다. 마치 자연에 없는 물질에 대해서도 맛을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하여 어떤 추상적인 표현을 찾아내어 강렬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 책 한 권보다 한 곡의 음악이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같은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지 않던가?

 

이제까지도 예술이란 과학기술의 힘의 도움을 전혀 안받은 것은 아니다. 전자기타는 그야말로 기술의 결과물이니까. 그러나 이 도움의 정도가 미래에는 훨씬 더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다. 뇌신호를 읽어내는 기술이 발달하면 우리는 온갖 종류의 신호가 우리의 뇌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알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어떤 감각신호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예술을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환각이나 착시 환청에 대한 연구는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으며 자기 몸이 어디에 있는가를 어떻게 느끼는가와 같은 것을 연구해서 의도적으로 유체이탈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내는 실험도 행해졌다. 이런 연구들이 종합되면 말 그대로 환상적인 체험을 하게 해주는 예술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청각, 시각, 촉각에 후각 심지어 미각까지 동원한 5감예술도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도움없이는 너무나 복잡한 매체일테지만 체계적인 과학연구의 도움을 받고 거기에 재능있는 사람들의 영감이 합쳐진다면 -예술분야가 항상 그런것처럼- 그런 예술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종합예술이라는게 있기는 하지만 과학과 예술은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결합할 수 있고 그것이 더 큰 효과를 만들어 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날수 있다. 록큰롤이 소리로 된 마약이라는 표현을 믿는다면 과학으로 무장하여 그것보다 몇백배 강력한 정서적 효과를 주는 종합예술이 가능하다고 할 때 그런 예술은 예술인지 세뇌의 도구인지 폭탄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될 수있다. 화끈한 액션영화를 한편보고나면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머리속이 세탁기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같은 느낌을 받고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말하자면 초보적인 것이 아닐까. 록큰롤이 세상을 바꿨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어쩌면 미래에는 과학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고도의 추상적 예술이 세상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비틀즈는 과학자일지도 모른다. 이런건 실현시키려면 돈이 많이 들겠지만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 한편을 만드는데 이미 우리돈으로 몇천억을 투입한다.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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