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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내가 인식의 연구에 관심이 있는 이유

by 격암(강국진) 2013.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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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잘하고 충분히 만족스럽게 하는 것과 어떤 것을 하고 싶은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생기지 않는 쪽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차이를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잘하건 못하건 우리는 어떤 것을 왜 하는가를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우연히 잘하게 된 어떤 것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인식의 연구에 관심이 많다. 인식의 연구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당연히 여러가지로 연구되는데 그 이유는 의식이나 인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도 그리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라는 나의 소신에 따라 인식이나 의식이 뭐냐에 답하기 보다 우리는 왜 그런 것을 알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집중하는 것이 이글에서는 옳다고 본다. 그것이 왜 나는 의식이나 인식을 이러저러하게 연구하고 싶은가 하는 것을 명백히 해줄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우리는 왜 그런 것을 알아야 할까.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이해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변해 왔다고 믿는다. 고대 제국을 만들어 낸 정복군주는 도량형을 통일하는 일을 하곤 한다. 같은 도량형에 따라서 뭔가를 측정하는 일이 거대한 제국의 존립에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세금을 낼때 같은 양을 내라고 해야 할것이니까 그렇다.  


뉴튼의 물리학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는 국경도 심지어 저 별에서도 통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은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마법적인 힘이었다. 이슬람교도가 사는 곳이나 기독교인들이 사는 곳이나 불교도인들이 사는 곳에서 서로 다른 물리법칙이 통용되는게 아니라 모두가 같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이 세계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대한 통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뉴튼의 물리학이 만들어 지고 발달하는 과정은 요정이나 귀신의 세계를 사라지게 하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이 지나치게 성공적이었을런지는 몰라도 성공적인 과정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든 생명이 같은 구조를 가진 DNA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진화론의 시각에서 생명을 볼 때 세상은 달라보인다. 우리는 개나 고릴라를 거대한 진화의 나무가지 위에서 파악하게 되고 멸종해 가는 동물들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왜 인식과 의식을 이해하고 그 밑에 있는 원리를 알고자 하는가. 그것을 이해함으로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게 되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될거라고 나는 믿는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문화가 있고, 여러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인류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은 여러가지 관찰한 사실 속에서 어떤 패턴을 찾아내고 문화나 인간의 마음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어떤 법칙이 있는가를 찾는다. 그러나 그러한 법칙찾기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정리하는 것이며 적어도 아직은 커다란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지는 못했다. 그 관점의 전환이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뉴튼의 물리학으로 바뀌는 과정이며,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뀌는 과정이며, 수많은 관찰을 통해 자연의 사실들을 수집하던 박물학이 유전공학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우리는 인식의 이해에 따라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이렇게 고통받고, 이렇게 기뻐하면서 살게 되는지에 대해, 왜 세상이 우리에게 이렇게 보이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어떤 지적인 추구도 이런 질문에대해 최종적인 답을 주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의식의 아래에 있는 법칙에 대해 알게 됨으로해서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모두가 서로 다르면서도 모두가 서로 통하는 세계를 만들어 가는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역사를 보면 인간의 세계는 차차 거대한 통합을 추구해 왔다. 지금 우리가 가진 역량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는 세계공동체를 탄생시키는 것은 먼일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시간 스케일로 보았을 때 그리 먼일도 아니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다른 학문도 그렇지만 과학도 인간공동체의 크기에 따라서 발달했고 다시 과학이 우리가 어느정도 규모의 공동체를 안정화 시킬수 있는가를 결정해왔다. 그들은 상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시대는 새로운 학문을 요구하고 있다. 이미 여러 철학자들이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바 있다. 우리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세우고 그 위에 새로운 과학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전자통신의 발달이후 세계는 급격히 좁아지고 있다. 수명이 연장되고 상거래가 추상화 되면서 전에는 없던 많은 질문들이 등장하고 있다. 부동산 거품이나 채권거래가 일어나고 꺼지는 속력이 점점 더 과거의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수 없는 수준이 되어간다. 20세기초의 대공황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세계가 이만큼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세계는 더 크게 출렁인다. 이런 출렁임이 조만간 거대한 경제적 파국을 만들어 낼런지 아니면 그럭저럭 버티어 갈런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버틴다고 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버티기만 한다면 결국 인간은 파멸적인 참사를 계속 겪거나 아니면 새로운 질문앞에 서야 할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새로운 사회를 재건하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중세 종교의 시대에서 근세 과학의 시대로의 변화처럼 큰 변화가 요구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의 기본에는 인식, 의식, 가치, 윤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의식 변화를 기술하는 정량적 방정식이 우리가 의식에 대해 알고 있는 여러가지 것들을 통합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물리학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 예를 들어 경제학문제를 풀어낼수 없듯이 그런 법칙을 찾아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문제가 알아지는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나오고 나서 우리는 태양의 에너지 원이 뭔지, 생명의 안정성을 주는 분자의 안정성이 어디에서 나오게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변화를 기술하는 정량적 과학은 지금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그게 뭔지를 상상해 본다는 것은 가치있고 즐거운 일이다. 비록 실질적인 진보는 백여년 뒤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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