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의식과 의지

by 격암(강국진) 2016. 5. 14.

16.5.14

의식과 의지

 

공포영화같은 곳에 나올 법한 장면이 있다. 무선으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거실을 달리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문득 그 자동차에는 배터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그 자동차는 원격조정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놀란 당신이 자동차에게 말을 걸자 자동차는 바퀴에서 나는 소리로 당신과 간단한 대화를 시도한다. 이쯤 되면 당신은 이 자동차가 귀신이 들린 자동차 즉 의식을 가진 자동차로 생각되기 시작할 것이다. 

 

의식이란 의지의 문제다. 우리는 굴러가는 공이나 바람에 열린 문을 보면서 공이나 문에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대개의 경우 그 공이나 문이 움직이는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이나 바람같은 외적인 원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에서도 외적인 원인내지 의지를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떤 물체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졌으며 따라서 의식을 가졌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는 물론 다른 인간들이다. 그 인간들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지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적어도 전부 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이란 이해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의식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태엽을 감은 장난감 자동차나 프로그램을 가진 로보트는 조금 더 복잡하지만 의식이 이해의 문제라는 것을 더 확실히 보여준다. 그런 종류의 것들은 때로 굉장히 복잡한 움직임을 외적인 연결없이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과 그 움직임을 결정하는 의지에는 단지 시간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탈길 위에서 공을 놓으면 공은 비탈길을 내려간다. 그러나 그것은 공이 의지나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을 비탈길 위로 가져간 의지가 시간차이를 두고 실현되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장난감 자동차나 프로그램을 가진 로보트도 외적인 의지가 시간차이를 두고 실현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구분에서 우리의 이해라는 주관적인 요소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실은 정해진 외적인 의지가 시간차이를 두고 실현되고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너무나 정교한 나머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의식 혹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것으로 판정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주관적인 이유는 우리의 이해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몇천년전의 인간이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보는 기계들을 본다면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나머지 그 기계들이 영혼이나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사실 오래된 종교에서는 나무며 물이며 바람이며 번개등 모든 것들이 실질적으로 자기의 의지를 가진 존재로 파악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는 이들과 다를까. 우리가 지금 당연히 의식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어떤 것들은 실은 우리의 이해가 증대됨에 따라 그렇지 않은 존재로 파악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대해 우리가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튜링 테스트와 박테리아같은 가장 간단한 생명체들이다. 튜링은 기계가 인간과 대화를 나눠서 인간을 속일 수 있는가 하는 테스트를 고안했다. 그렇게 했을 때 인간이 지금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기계인가 인간인가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 기계는 지성을 가진 것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말한 것에 기반하자면 어떤 기계를 의식이나 의지를 가진 기계로 불러야 하는가에 대한 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설사 속았던 경우라도 장막을 없애고 우리의 대화상대가 컴퓨터였다는 것을 보게 될 때 이것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장막을 없애고 우리가 상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잘 모를 때 우리는 그것을 의식과 자기의지를 가진 존재로 느꼈는데 이제 그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많은 이해를 하게 되었고 따라서 의식을 가진 존재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은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장막의 어느 쪽에 있는가에 따라 즉 우리의 이해의 정도에 따라 같은 것을 보는 우리의 느낌은 달라진다.

 

의식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나 고릴라가 의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한다. 그리고 동물을 넘어 나무나 이끼도 의식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제기 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누가 옳은가 이전에 이 세상을 의식이 있는 존재와 의식이 없는 존재로 나누는 기준선이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원자나 DNA가 의식을 가진 존재일까? 혹은 어떤 존재는 스스로는 의식을 가졌다고 믿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박테리아같은 간단한 생명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수록 그것은 이제 생명이라기보다는 물질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자기 의지를 가지고 돌아다닌다고 믿었던 축구공이 그저 평범한 축구공으로 변하는 것같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박테리아수준에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우리는 인간도 실은 의식따위는 없으며 물질에 불과하게 보이는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문제의 주관성이 이중으로 확대되는 것을 느낀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관찰의 주체가 가진 이해의 수준이다. 이 수준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관찰의 주체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두번째는 우리가 뭔가를 이해했다는 판정 자체가 실은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 과대망상증 환자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 환자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기는 그것을 전부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에 빠져 있다고 하자. 그럴 때 이 환자의 눈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의지를 잃어버릴 것이며 따라서 모든 인간들도 단순한 로보트로 보일 것이다. 즉 이 우주에서 의지나 의식을  가진 것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는 없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이웃사람들은 영혼없는 마네킹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의 수준은 고정된 것이 아닌데 그 이해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도 사실은 또다시 주관적인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는 우리가 피해왔던 질문을 정면으로 던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가 나는 의식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 내가 의식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가? 우리는 정말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가? 의식과 이해의 관계에서 보면 우리가 스스로를 의지와 의식을 가진 존재라고 믿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와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게 된다. 

 

즉 우리가 세계를 볼 때 그 감각신호는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의지를 가진 존재를 가정할 때에만 설명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고개를 돌려 90도쯤 되는 방향으로 시각을 돌린다고 하자.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세상이 그 반대방향으로 휙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감각신호를 나라는 존재가 머리의 방향을 돌렸다라는 가설위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실재로 그렇게 움직였다라는 가설에 기반하여 이해한다면 우리의 감각신호는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뇌란 주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움직임이 없는 나무는 뇌가 없다. 걷고 달리는 동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그에 따라 반응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걷거나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물은 잘 발달된 감각기관으로 많은 외부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합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까를 예측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물론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없지만 이 예측이 움직임의 위험도를 수용가능한 수준으로 낮춘다. 그럴 수 없을 때 움직인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는 의식을 가진 존재란 우리의 감각신호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낸 최상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신호를 나라는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나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 중의 다수는 이미 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가설이 필요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무는 자아가 없을지도 모른다. 역시 그런 가설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의지와 이해의 문제이며 뒤집어 말하면 선택과 무지의 문제다. 우리가 의지를 발휘할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할 필요가 없다면 우리의 자아는 점점 더 희미해질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더 이상 사랑과 신비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것이 이미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내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면 자아는 점점 더 희미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는 곧 의지이며 무지와 지식의 경계 앞에서만 존재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