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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뇌과학에 대한 잡담의 기록

by 격암(강국진) 2015. 2. 14.

15.2.4

오늘은 리켄의 연구원으로 있는 지인 그리고 츠쿠바대학의 조교수로 있는 지인을 연달아 만나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잡담을 했습니다. 그 주요주제가 되었던 것은 뇌과학이었는데 내가 늘상 하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기억이 살아있을 때 몇자 적어놓습니다. 

 

과학 프로그램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통상 정의입니다. 즉 이것은 이것이다라는 정의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도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간단히 답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한 논문에서 사랑이란 곧 섹스라고 했다고 해봅시다. 물론 이 경우 그 저자는 나는 사랑은 섹스가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섹스는 사랑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변명해도 적어도 그 논문안에서 사랑은 곧 섹스라는 정의를 도입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사랑이 여러가지 측면이 있는데 그걸 나눠서 한 측면 한 측면 분리해서 연구해도 된다라는 것은 하나의 가정입니다. 또한 여러가지 측면 중 섹스를 연구하는 것이 과연 중요한 선택인가 하는 것도 가정입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사랑이란 곧 섹스라는 정의를 도입하고 나면 좋은 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뭘 해야 할지를 비교적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란 곧 섹스니까 섹스의 빈도수나 만족감을 통해서 사랑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가 각각 어느 정도나 사랑이 넘치는 사회인지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정량적 측정이 도입되어야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객관적 증거라고 말하며 과학적 연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통상의 예에 따라 이것이 과학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거나 과학이 아니라고 말해지거나 객관적 증거가 없다라고 비판당합니다. 

 

같은 문제는 여러 학문분야에서 다양하게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에서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처음부터 가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경제학적 으로 사회학적으로 인간은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한다라던가 쾌락의 양을 극대화하려고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합리적인 선택이란 것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인공지능의 획기적인 발전이 있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만 어떤 공학적 발전이 있든지 간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한가지 질문에 부딪힙니다.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기계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1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 답이 3이라고 말하는 계산기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틀린 기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라고 답하는 기계가 옳은 기계이며 그렇게 답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 곧 계산기나 컴퓨터의 개발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같지만 실은 인간이 답은 2라고 말하는 기계가 합리적인기계라고 선택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좀 더 복잡한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여기 두대의 로봇이 있습니다. 우리가 첫번째 로봇은 합리적인 로봇이고 두번째 로봇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합리성에 대한 선택이 됩니다. 튜링테스트라고 알려진 실험도 이런 선택의 예입니다. 인간이 기계와 대화를 해서 기계인지 인간인지 말할수 없을 정도라면 그것은 인공지능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합리성의 정의가 뭔지 그런게 있을 수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뱀의 합리성과 인간의 합리성은 같은 것일까요? 만약 우주 어딘가에 외계인이 있어서 그 외계인이 인공지능을 만든다면 그 인공지능로봇은 그 외계인의 합리성을 흉내낼텐데 그렇다면 그게 우리 눈에 합리적으로보일까요?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해서 틀린 답을 주는 로봇은 고장난 로봇일까요 아니면 제대로 된 로봇일까요. 

 

요지는 결국 어떤 복잡한 방법이 동원되어도 결국은 인간이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하게되는 문제를 피할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천만배빠른 컴퓨터가 등장해도 이 질문의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합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답하는 문제는 뇌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답하는 것과 완전히가 아니면 거의 같은 질문입니다. 즉 궁극적으로 말해서 어떤 학문을 해도 그 학문은 뇌과학이나 인간학이 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정보가 축적된 현대는 그 궁극에 점점 다가가고 있어서 실제로 뇌과학과 경제학을 융합하려는 노력따위는 이미 이뤄지고 있습니다.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는 다른 문제지만 말입니다. 인공지능의 연구도 뇌과학과 떨어질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마찬가지 문제에 부딪힙니다. 뇌란 혹은 인간이란 이것이다라는 과감한 가정을 도입하지 않으면 우리는 뭘 측정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 가정을 도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이것은 뇌나 인간의 한 부분이다라는 말로 얼머부립니다만 이런 환원주의적 가정이 문제가 없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뇌과학에 있어서 획기적인 진전을 이뤄내기 전에는 답할수 없는 문제이며 사실은 이런 가정이 문제가 있는 것같다라고 느끼는 사람은 많다라고 생각합니다.

 

뇌과학분야의 대부분을 차지해 온 것은 실험분야입니다. 이론적 분야에 있어서 획기적인 진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뇌과학은 뉴튼 혹은 데카르트 이전의 물리학이나 다윈 이전의 생물학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말은 인간 혹은뇌는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이해를 줄 수 있으면서도 과학적 프로그램이 될 수 있는 추상적 접근이 제대로 이뤄져 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짜 발전을 위해서는 형이상학이 정리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못할때 상표에는 사과파이라고 써있는데 그 안에는 오렌지가 들어 있는 것같은 일이 벌어지기 쉽습니다. 

 

뇌가 곧 인간의 연구라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평생 신경과학이나 심리학을 연구한 과학자는 과연 그들의 배우자나 연인들을 그런 분야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잘 이해할까요? 그 답은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균적으로 말하면 일반인들보다 오히려 못하다고 하는 것이 답일 것입니다. 왜냐면 현대에 전문적 연구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특화된 분야에 집중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과학자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뇌의 시신경분야를 평생 연구하는 과학자는 뇌과학자입니다. 그는 시각정보처리가 뇌의 기능중 일부이며 그렇게 연구해 온 자신의 삶에 대해 보람을 느낄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면 우리가 뇌를 연구하는 일이 발가락이나 췌장을 연구하는 것보다 즐겁고 신비한일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대개 뇌는 곧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합리성, 지성, 인간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뇌의 연구를 각별히 더 신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시작하고서 실제로 연구를 하면 영영 작은 곳에서만 맴돌더라 나는 이게 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뇌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인간에 대한 진실은 거대한 측정기계나 실험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 있다고 느낄수 있습니다. 인간을 진짜로 경험하고 느끼는 일은대학이나 연구실 안에서는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거대한 시스템으로 변한 학문의 세계는 이미 여러가지 방식으로 인간을 해체해 놓고 너무 많은 가정과 가정을 쌓아올려서 인간과 직접 대면하는 것을 오히려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뉴튼은 종교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시대에 드물었던 진짜 종교인이었죠. 서구 중세 말기의 종교는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신과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세상을 직접 관찰하고 신의 위대함을 말할 절대적 법칙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 뉴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현대 학문의 복잡함은 거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은퇴할 나이가 된 노년의 과학자들은 좀 더 순수한 종교적 동기같은 동기로 과학을 시작했습니다만 요즘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명성이나 돈이나 직업적 안정성따위를 과학을 하는 이유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신세대가 학문을 하기로 했을때의 동기가 과연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은 질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화된 종교처럼 세속화된 과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과학이 진정한 과학의 발전을 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부르노의 화형이나 갈리레오의 종교재판을 겪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는 비과학적이며 주관적이라는 비판을 통해 누군가를 형틀에 잡아 맬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진짜 발전을 위해서 말입니다. 진짜 발전이란 결국 인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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