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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기억과 자아

by 격암(강국진) 2022.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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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30

기억은 우리의 자아 그 자체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까지를 기억이라고 부를 것인가에 따라 점점 더 깊은 범위에서 사실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을 이루는 수많은 세포들은 서로가 기억이라고 부를만한 관계로 얽혀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춤을 출 수 있다. 의식을 가지고 팔다리를 움직여 춤을 추거나 걷는다고 해도 우리의 뇌가 근육세포를 포함한 온몸의 세포들이 일일이 어떻게 움직여야 전체적으로 몸이 걷는다거나 춤을 춘다고 말할 만한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한 후에 명령을 내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로보트 팔에 존재하는 고작 수십개의 관절 모터의 작동을 조절하려고 해도 슈퍼컴퓨터로도 감당할 수 없는 계산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 몸안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물질들과 세포들은 가능한 모든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따라 지극히 제한적인 관계속에서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요즘은 진화의 과정이라고 불리는 길고 긴 과정을 거쳐서 계산이 아니라 그 긴 시간동안에 누적된 기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부분 자동인형이다. 요즘에는 인공심장을 달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걸 잘 보여주고 있다. 진짜 기계가 우리 몸의 일부를 대체해도 우리 몸의 나머지는 그것에 적응하여 살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것은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듯 기하급수적으로 무한히 빠르게 증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더 좋고 새로운 정보처리 방식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복잡하게 발전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단세포 생물은 물론 식물같은 생명체는 생명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처럼 보인다.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움직이는 동물의 경우에는 그 환경이 훨씬 더 극단적으로 짧은 시간동안에 변하기 때문이다. 나를 쫒아오는 맹수의 움직임은 계절의 변화보다 훨씬 빠르다. 따라서 제 자리에 서있는 나무와는 달리 달리는 동물은 그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환경에 맞는 방식으로 반응해야 한다. 즉 훨씬 더 복잡한 기억의 빠른 처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기억의 증식은 사회적 관계에 이르면 오히려 더욱 더 빨라진다. 야생 동물조차도 언어를 발전시키고 특히 문자를 쓰는 인간에 비하면 지극히 기계적으로 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사계절의 변화에 적응하고 서식지의 동식물 분포에 적응할 뿐이다. 인간은 식량을 재배하고 저장한다. 그것을 사회적 규모로 한다. 동물이 신화를 알고 역사를 알지는 않지만 인간은 그런 것을 안다. 인간은 그들을 통해 인간 개인이 전부 경험할 수 없는 시공의 영역에 까지 눈을 돌리는데 이는 인간이 그런 광대한 시공 전체에 적응하고 반응하려고 하며 개인이 아니라 날로 복잡해지는 사회적 환경에 까지 적응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동물도 종교는 물론 국가개념이 없고 시장개념도 없다. 

 

물론 이에 크게 기여한 것은 기록능력의 발달 즉 문자의 발달이다. 기록하기에 우리는 기억하고 기억하기에 우리는 다른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직접 쓰고 읽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기술이 존재하는 사회의 일원이기에 기억이 남아있고 그 기억이 더 복잡한 언어를 만들고 전체적으로 동물사회를 능가하는 진짜 문명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사회조직은 오직 그에 걸맞는 기억능력과 그로 인해 가능한 합리적인 분배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천명의 인간이 힘을 합쳐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한다고 해도 거기서 나오는 결과물을 합리적으로 분배하지 못한다면 그 천명의 인간은 늑대나 고릴라가 그렇게 하듯이 서로 싸워서 더 작은 집단으로 나눠질 것이다. 인간만이 사회적인 생명체는 아니지만 기억력의 차이가 그들이 만들 수 있는 사회의 크기와 복잡성을 전혀 다르게 한다.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의식현상이다. 의식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아직 과학적으로 정확한 정의도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양이가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심지어 타인들이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식이라는게 뭔지를 은근슬쩍 자기맘대로 정의하고 있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뇌파에서 특정 주파수의 움직임이 어느 임계점 이상인 상태를 의식이 있는 상태로 부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주관적 체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날마다 이 의식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잠이 들고 의식이 사라지며 아침에 깨어나면 의식이 돌아온다. 잠은 인간만 자는 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많은 생명체가 의식체험을 할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이 뭔지에 대한 과학적 정의가 없다는 것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술을 먹고 깨어난 다음날 당신은 지난밤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마치 그때 이미 당신의 의식이 사라졌던 것처럼. 하지만 물론 멀쩡히 말하고 걸었던 당신의 그때 상태를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머리 하나에 의식이 하나일거라는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뇌를 양쪽으로 분리하는 수술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관찰해보면 마치 두 개의 의식이 하나의 몸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즉 왼쪽 뇌가 알고 행동하는 것을 오른쪽 뇌가 모른다. 그렇다고 할 때 정상인의 뇌에서는 의식이 하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혹시 뇌 안에서는 수없는 자아들이 동시에 존재하는거 아닐까? 실재로 그런 증상을 보이는 사례도 있지 않은가. 또 의식은 있거나 없는 것일까? 의식은 여러가지 레벨이 있어서 절반쯤 깨어있거나 90%쯤 깨어있는 것과 같이 연속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어쩌면 원숭이처럼 문자사용 이전의 인간은 잠을 자고 있지 않을 때에도 현대적 의미에서는 의식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의식은 문자의 사용과 함께 깨어난 것이 아닐까? 의식은 자아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은 관련이 있지만 이런 질문들은 적어도 아직은 과학적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찌기 파동방정식을 발표하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써서 유전자 연구를 예언한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의식에 대해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의식은 새로운 기억, 새로운 정보와 관련되어 있다. 즉 어떤 행동이 자동적으로 행해진다면 그런 행동에는 의식현상이 관여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고 그것이 불규칙적이 될 때 우리는 의식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예는 숨쉬기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숨을 참을 수 있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 숨쉬기는 무의식적인 행동이 된다. 의식은 주변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잠든 상태에서 우리는 주변을 모르게 된다. 그런데 어떤 감각 자극이 변하지 않고 반복되면 그 자극 역시 우리의 의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며 그것들만이 우리의 의식 수준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글을 주의 깊게 읽은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이 글에서 기계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기계라는 말은 이제까지 생명의 일부가 아닌 것, 나의 일부가 아닌 것, 변하지 않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지극히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진자를 보면서 그것이 살아있다거나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기계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진 기억이란 기계같은 것이 아닌가. 이 기억과 생명 나아가 자아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은 두 개의 극단에서 행해질 수 있다. 하나의 극단에서 생명은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 구분되지 않으며 우리의 자아는 우주 전체에 퍼져있다. 이 경우 모든 것은 불확실하며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반대쪽 극단에서 우리는 무한히 작고 순간적인 존재이며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기록을 남기는 그 순간에만 살아있다. 우리의 자아는 바로 그 순간과 그 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슈뢰딩거는 우리가 말하는 인간은 실제로는 우리의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의식은 새로운 경험으로 이제까지의 나를 초극할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과 만나서 과거를 초극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억에 따라, 타고난 본성에 따라 사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자기 초극에 있다. 그래서 나는 문자 사용 이후의 인간을 단순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믿는다. 인간은 사이보그 1이 된 것이다. 새로운 생명체로 초극한 것이며 새로운 레벨의 의식이 깨어난 것이다. 갑자기 기억량이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컴퓨터의 발달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그 사이보그 1은 사이보그 2가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량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둘러 이런 부분으로 나아가기 전에 앞에서 말한 두 개의 극단에 대해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마치도록 하자. 먼저 우주 전체에 퍼져있는 자아라고 하는 첫번째 극단에 대해서다. 내가 생명현상에 대해 말할 때 예로 드는 것이 파도다. 우리가 바닷가에 가면 여러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본다. 그때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파도인지 정확히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대충 파도는 셀 수 있고 분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물론 엄격히 말해 그런 생각은 환상이다. 세상에는 바다가 있을 뿐 분리가능한 파도는 없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무생명을 가르고, 생명체들도 이리저리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은 엄격히 말해 환상이다. 파도는 생명체가 아니고 당신은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환상이다. 당신이 하나의 생명이라면 그럼 당신 몸에 존재하는 세포들은 뭔가. 그건 죽어있는가? 그것들이 생명이라면 당신이 나라고 말하는 그 생명은 또 뭔가? 그런데도 당신이 살아있다면 그럼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회도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주로 사회적 관행에 따라 어딘가에 근거없는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선을 또 긋고서 그 선의 바깥쪽에 대해서는 관심을 잃어버리고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법칙이라고 믿는 것이 실은 그저 기억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고 그냥 그것들을 고정된 것으로 여긴다. 매일 아침 밥을 주는 부모가 있으면 우리는 밥은 그냥 법칙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반복된 자극은 의식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밥을 주는 사람의 존재를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리비를 내면 언제나 청소를 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차차 청소는 그저 법칙적으로 저절로 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우리를 재정의 한다. 우리는 우리가 법칙이나 무지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그은 선 뒤에 있는 곳은 우리의 자아와 관련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과정은 동적평형을 가지고 유지된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우리가 기억하고 신경쓸 대상을 선택하기도 하고 우리가 기억하고 신경쓰는 대상이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한국인이므로 한국역사를 관심있어 하기도 하지만 한국역사를 알기에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작은 세상에 살면 우리의 자아는 작아진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우리의 자아는 커지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작은 세계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 작은 구멍만으로도 그것은 보기 어려울만큼 달라진다. 자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떤 제한된 시공간안에서는 쓸모있고 적합한 선택이며 집중이지만 언제나 다른 규모에서 보면 의미를 잃는 임시적인 선택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 자아에는 한계가 없다. 분리란 환상이다. 

 

또다른 극단에서 보면 자아란 오직 살아있는 그 시공안에서만 존재하는 현상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아란 의식이고 이제까지의 기억을 초극하려고 하는 존재다. 어제와 오늘이 정말 똑같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살날이 정말 뻔하다면 우리는 이미 살아있지도 않다. 살아있지도 않은데 자아는 어디에 있고 그게 뭔가? 내가 살아있다던가 자아가 있다던가 하는 것은 그저 착각이 아닌가? 

 

스스로에 대해서 이런 지적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남을 볼 때는 다르다. 우리는 정확히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진자는 살아있지 않은 기계라고 생각한다. 진자가 자아를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눈에는 정말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만 세상에 있는가? 스스로 새로운 가능성은 모두 버리고 그저 습관대로 기억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세상에는 단지 음식을 먹고 그걸로 똥을 만든다던가 쌓여 있는 돈을 써버린다던가 심지어 주변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살아가는 것같은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언젠가는 그 사람들도 새벽 아스팔트에 생긴 서리나 저녁노을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에 비하면 어떤 기억과 어떤 관행에 사로잡혀 바둥거리면서 살뿐 뭐하나 감동하고 깊이 보는 일없이 바쁘게만 살아가는 그 모습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개나 원숭이도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삶을 말할 때 살아있다는게 그런 건 아니지 않은가? 

 

결국 우리의 자아는 찰나의 순간에 어떤 한 지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가슴이 뛰고 온몸에 닭살이 돋고 감동의 눈물이 흐르는 그 순간 우리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진짜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순간을 위해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물질이 아니다. 우리는 진화의 첨단이며 현상이다. 그것이 우리의 자아다. 

 

기억은 우리의 전부다. 새로운 기억은 새로운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기억은 우리와 하나도 관련이 없다. 우리는 그 기억을 넘어설 때만 존재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의식을 가지고 깨어있는가? 그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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