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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신경세포는 도대체 뭘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2. 5. 10.

12.5.10

생명적 관점 기계적 관점

 

생명의 본질은 정상성 동적 평형 (homeostasis)에 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프리고진이나 카우프만등 여러 학자들도 생명현상의 특징은 외부적 변화에 대해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나는 생명의 본질은 불확실성과 싸우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도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은 생명적이라기 보다는 기계적 도구적 논리적 관점을 가져서 이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논리적 기계적 관점이란 일방향적인 과정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 프로그램을 보라.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정해진 일을 정해진 순서대로 한다. 자동차의 기계도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엔진이 힘을 발생시키면 구동축이 이걸 전달하고 바퀴가 차를 앞으로 굴린다는 식이다. 

 

이러한 관점에는 각각의 구성 부분이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국소적으로 행동하는게 아니라 전체적인 목적을 위해 컨베이어 벨트앞에 선 노동자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수정하고 다음 단계로 보내는 시스템에 대한 생각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뇌과학 분야에서 우리는 시각신호처리를 공부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대개 빛이 망막에 맺히면 망막이 어떻게 그것을 전기신호로 바꾸며 그 바뀐 신호가 시상을 거치면서 어떻게 배분되고 바뀌며 다시 제일 시각영역에서 어떻게 배분되고 바뀌는가 하는 순차적인 변화를 하는 것을 연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은 기본적으로 일방향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각처리의 각 부분부분은 마치 어떤 필터를 가하는 것같은 일 혹은 컨베이어 벨트앞에서서 자동차를 조립하는 조립공의 일을 한다는 가정에 깊이 물들어 있다. 말하자면 각각의 기관은 어떤 전체적인 목적 -이경우에는 시각패턴의 인식 더 좁게 말하면 얼굴이나 문자의 인식- 을 해내기 위해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시각처리에 대한 연구가 백년에 가깝게 진행되었는데 뇌에는 소위 피드백연결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존재하는데도 기존의 연구는 대개 피드포워드적인 즉 순차적인 정보처리라는 관점에서 행해졌다. 해부학적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도 말이다. 물론 해부학적인 증거가 분명하므로 이 피드백의 영향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행해졌지만 뇌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순차적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논리적 기계적 시각의 결과는 뇌과학분야에 가득하다. 

 

헵의 법칙

 

다른 예를 들어보자. 뇌과학에서 아주 중요한 법칙중에 헵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두 개의 신경세포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그 연결방식을 바꿔가는가에 대한 즉 학습에 대한 법칙이다. 신경세포는 세포에 전류가 주입되거나 세포벽 주변의 이온농도가 달라지거나 세포벽 간의 전압차가 변화하면 이따금 그것에 저항하면서 소위 활동전위 혹은 스파이크라고 불리는 행동을 한다. 

 

그건 말하자면 개미가 많은 곳에 갔더니 개미가 점점 더 몸에 달라붙고 따라서 이따금 몸을 크게 털어서 개미들을 다 털어내는 행동과 비슷한 것이다. 몸에 달라붙는 개미의 양은 몸을 크게 털어내기 -즉 활동전위의 발생-이전에는 점점 쌓이기 때문에 이런 신경세포의 활동을 적분적인 행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 한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제 한사람이 몸을 털면 -아마도 그 사람의 몸에 있던 개미가 날아가 다른 사람 몸에 떨어지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도 곧바로 몸을 터는 경향이 생겨난다. 이런 경향은 점점 더 강해져서 사람 A가 몸을 털면 사람 B는 바로 몸을 털게 되는 데 이런것이 바로 헵의 법칙이다. 즉 인과적 성향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헵의 법칙을 보는 시각도 기계적 도구적인 경우 우리는 그런 경향의 변화가 전체 시스템이 수행하는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주로 보게 된다. 즉 기억을 하게 된다던가 특정한 시각패턴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생긴다던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전체 시스템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두 신경세포간의 연결변화를 컨베이어 벨트 앞에 길게 늘어선 노동자중에서 특정한 노동자가 행동을 바꾼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신경세포는 도대체 뭘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신경세포는 도대체 진짜로 뭘하고 있는 것일까? 신경세포는 전체에 대한 시각을 가질 수 없다. 다른 말로하면 신경세포의 학습규칙은 전체적인게 (global) 아니라 국부적 (local)이어야 한다. 기계학습분야의 인공신경망의 학습규칙은 대개 전체적이며 그 때문에 비생물학적이라고 비판받았다. 

 

헵의 학습법칙은 국소적이다. 하지만 관찰의 결과 이런 국소적인 학습법칙이 있다라고 말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도대체 그 국소적인 학습은 왜 일어날까를 국소적인 시각에서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국소적인 학습은 전체적인 목적을 위해서 일어나는게 아니라 국소적인 목적을 위해서 일어난다. 우리는 신경세포를 뇌의 일부로 보지만 사실 신경세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다. 신경세포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일을 하는 것이지 기억을 하거나 팔다리를 움직이거나 시각정보를 해석하기 위해 변화하는게 아니다. 

 

그럴때 우리는 다시 정상성 동적 평형 (homeostasis)으로 돌아간다. 즉 신경세포는 그저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할 뿐이라는 것이다. 세포는 일정한 세포막간의 전압차와 일정한 이온 농도를 유지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쭉 존재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런데 외부의 변화가 그렇게 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러니까 신경 세포는 일련의 연쇄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는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치 자꾸 개미가 붙으니까 개미를 털어내는 사람처럼 말이다. 개미를 계속 털어내고 싶다면 계속 팔다리를 움직여야 할것이다. 개미를 무지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렇게 하면 에너지 소모율이 너무 클수 있다. 말하자면 피로가 쌓여서 나중에는 팔다리가 아파서 그렇게 할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따끔 크게 털어내는 것을 반복한다. 

 

만약 외부적 변화도 일정하다면 즉 환경에서 주어지는 전압이나 세포 안팍의 이온농도변화가 일정하다면 세포는 거기에 적응할 것이다. 그래서 행동전위를 만들어 낼 필요없는 즉 가장 조용히 살아가고 에너지 효율이 좋은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실제로 변화없는 환경에 우리의 신경세포는 적응을 하고 곧 반응이 없어진다. 

 

그런데 환경적 변화가 리듬을 탄다고 해보자. 2Hz로 반복되어 파도가 몰려오는 것처럼 전압의 변화가 온다. 그러면 이 세포는 그 리듬을 탈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는 유수풀에서 파도를 타본 사람은 안다. 리듬을 타지 않으면 때때로 당신은 크게 파도에 영향을 받는다. 즉 정상적인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 파도에 밀려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성 동적 평형을 유지하기 어렵게 한다. 

 

환경적 변화가 이렇게 주기적이라면 쉽다. 하지만 이 리듬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제 파도가 3Hz로 오다가 10Hz로 오다가 하는 식이다. -개미의 예로 본다면 개미가 우하고 몰려오다가 한동안 없다가 그런 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포는 리듬을 타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진다. 

 

뭘해야 할것인가. 그것은바로 다른 세포를 '보는' 것이다. 다른 세포의 리듬에서 이 세포는 앞으로 다가올 환경적 변화를 예측할 수가 있다. 다른 세포가 활동전위를 만들어 내면 이 세포는 바로 활동전위를 만들어 낼 준비에 들어간다. 파도가 몰려온다는 즉 환경적 변화가 몰려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핵심은 미래 예측

 

뇌라는 기관자체가 사실은 환경적 변화를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익숙한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는 신경조직이 없다. 인간의 뇌가 큰 것은 생각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오래 오래 장기간 걸어다니기 위해 뇌가 커졌다는 주장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간은 치타처럼 날래지는 않지만 마라톤을 할 수 있는 장거리 선수다. 운동량이 적은 때문인지 사람들의 믿음과는 반대로 현대인의 두뇌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움직인다는 것은 환경적 변화가 크다는 것을 말한다. 환경적 변화가 크면 그걸 어느정도 예측할 필요가 있다. 예측을 해야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이런 경험을 한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다음 번에도 계단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계단이 있는데도 이제 계단이 끝났다고 생각한 경우다. 우리가 계단의 존재유무에 대해 착각을 일으킨 경우 그 계단은 통상 무시할 정도로 작은 높이인데도 우리는 대개 크게 비틀거린다. 

 

사람이 뭘 보고 반응을 일으키는 데는 0.7초가 걸린다는 말을 들었다. 생각보다 우리는 느리다. 혹은 생각보다 놀랍도록 빠르다. 1초도 안되는 순간에 감각정보를 분석하고 뇌과 근육에 명령을 내려서 몸이 행동에 들어간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초단위보다 빨리 변하는 것이 많다. 우리 몸이 끝없이 예측을 해내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걸음도 못걷고 컵도 잡지 못할 것이다. 

 

세포는 뭘하는가. 세포도 예측을 해야 한다. 바로 정상적인 동적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세포는 거대한 시스템의 목적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그저 자기도 하나의 생명으로서 주어진 환경속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다른 세포가 하는 일을 보고 그 때문에 활동전위를 생산해 낸다. 

 

맺는말

 

여러 동물의 무리를 보면 때로 스스로를 희생해서 전체를 살리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사자가 나타났을때 소리를 친다던가 뛰어오른다던가 하면 사실은 자신이 공격당할 위험이 클것이다. 그냥 조용히 숨어서 도망가면 사자가 다른 동물을 먹는동안 자신은 살아남을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이기적인 본능'을 가진 동물의 무리는 결국 어떻게 될까? 쉬운 사냥감으로 사자에게 전부 잡아먹히고 멸종될 것이다. DNA를 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이타적인 본능'을 가져서 사자를 보면 뛰어오르는 동물은 스스로는 좀 더 위험해져도 전체 무리의 안전성이 올라간다. 동물들은 서로 서로 연결되고 위험이 나타났다는 신호는 급속히 무리 전체로 퍼져서 무리는 모두 피난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얼굴인식에 아주 많은 투자를 한다. 우리의 뇌는 얼굴인식에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사방에서 우리는 얼굴 모양의 것을 찾아낸다.  또 얼굴의 근육은 다른 부위에 비하면 아주 세밀하다. 이것은 인간들이 여러가지 표정을 통해 정보를 나누는 동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에는 몸매 이야기도 많이하지만 우리가 얼굴이 잘생긴 사람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이유가 클것이다.

 

방에 한무리의 인간이 있다. 전체의 분위기는 급격히 번져가고 그것이 우리 개인에게 큰 영향을 준다. 우리도 사자를 피하는 동물무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뭘 하는가. 신경세포가 하는 것을 한다. 바로 불확실성과 싸워서 존재를 유지하는 즉 정상적인 동적평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회를 하나의 기계나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것은 생명으로서의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것일수 있다. 그것은 다시말해 죽고 싶지 않은 것같은 우리의 본성들에 반해서 행동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졌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며 심지어 죽게 하기도 한다. 

 

지구상에 걸어다니는 것은 로보트가 아니라 생명들이다. 긴 진화과정이 보여주는 실험의 결과하나는 많이 느끼고 예측하고 반응하는 생생한 개체가 많은 집단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근대의 비극은 개인을 똑같은 것으로, 반응이 필요없는 것으로 만드는 시스템에서 생겨났다. 마치 지나치게 안정적인 환경속에서 죽어가는 신경세포들이 결국 치매환자를 만들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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