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정인보의 양명학연론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0. 8. 30.

위당 정인보는 조선말인 1892년에 태어난 분으로 한학을 공부하고 조선계몽운동에 힘쓰신 분이다. 이 책은 1933년에 출판되었는데 동아일보에 33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글들이라고 한다. 책은 7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져서 1. 글을 쓰게 된 까닭, 2, 양명학이란 무엇인가, 3, 양명본전, 4. 대학문, 발본색원론, 5. 양명문도 ...  6. 조선의 양명학파. 7. 후기.의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요점중의 하나로 서두에서 강조해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왜 양명학에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연전에 공자가 죽어야 이나라가 산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도 있는 마당이며 사람들이 논어 대학따위는 거의 보지도 않는 세상에 유학도 아니고 그 지류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는 양명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애초에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 답은 이렇게 말할수가 있겠다. 위당정인보가 1933년에 조선의 학풍과 당시의 조선인들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한 것을 21세기인 지금에도 우리는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조선에서 예의범절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따지던 주자학자들을 가장 극렬히 비판하고 비웃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실은 그 주자학자들과 정확히 같은 길을 가면서 다른 길이 있는지, 다른 뭐가 중요한지, 주자학자들과 자신들이 뭐가 같은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정인보의 책을 읽으면서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전에 양명학이란게 어떤 것인지 유교의 다른 갈래인 주자학과는 뭐가 다르길래 비교되는 것이며 조선시대에서 사문난적으로 엄격하게 금해진것인지를 조금 이야기해야 하겠다. 나는 유교에 그다지 지식이 많지 않으므로 이것은 대부분 위당 정인보의 책을 읽으면서 파악한 것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내가 파악한바로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주자학은 심리학에 양명학은 윤리학에 대응된다는 말로 어느 정도 설명될수 있을 것같다.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일단 이렇게 시작해 볼수 있다는 것이다. 주자학이든 양명학이든 모두 심성수양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주자학은 연구의 대상을 마음 바깥의 것으로 돌려서 일종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연구와 이해끝에 마음의 수양을 이룬다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양명학은 모든 사람은 이미 자기 내부에 옳고 그른 것을 알수 있는 양지를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따르지 않고 미혹되어 있으므로 문제가 생길뿐이라고 본다. 따라서 자기수양을 함에 있어 외부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으며 자기의 진짜 마음을 들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양명학이 주자학과 의견을 달리하는 대표적 구절이 바로 대학의 격물치지 ( 格物致知 ) 이다. 주자는 격물을 객관적 세계에 대한 이해로 보았고 양명은 격물을 마음을 바르게 한다로 보았다. 즉 치지에 이르기 위해 주자의 경우는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쪽으로 나가고 양명의 경우는 마음속의 혼란과 혼돈을 바로잡는 것으로 주장한 것이다. 


나는 왜 이것을 심리학과 윤리학이라는 현대적 용어들에 대응시켰으며 언뜻 듣기에 고루하게 들리는 이런 논의에 관심을 두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객관적으로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윤리와 당위를 제공해 줄수 있는지. 이것은 과연 진화심리학이나 현대 우주론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지침을 줄수 있는가 하는 현대적 질문과도 닿아 있는 것이다. 


얼마전에 나는 장회익 최종덕의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책을 읽은 소감에서도 이 문제를 말한 적이 있다. ( http://blog.daum.net/irepublic/7887897 ) 과연 우리는 과학이론이나 세상에 대한 사실명제들로 부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가치명제를 얻을수 있는가? 다시말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그런 논의로 부터 우리는 뭘 배울수 있는가?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 일반인들이 이런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 심하지 않으며 그런 고민에 대해 자주 소개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따분하게 들린다면 자신이 노예나 로보트가 된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자주하는 말이지만 윤리의 문제란 옳다고 알려진 것, 좋다고 알려진 것을 따르는 문제가 아니고 뭐가 옳은것인지를 뭐가 좋은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알수있는가 하는 문제다. 윤리의 문제에 대해 고민이 없다는 것은 남이 나에게 준 규칙대로만 산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노예에게 그런 교육을 시키겠는가? 그냥 정해진 규칙은 '원래' 그런거니까 그런 근본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지 말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윤리적 고민이 없는 사람은 노예나 로보트라고 말해도 좋을것이다. 이렇게 볼때 이런 문제들이 단순히 따분한 옛날 일에 대해 떠는 것이 아니라는것을 알수가 있다. 


질문은 다시 주자학으로 돌아간다. 과연 주자학에서 하듯이 이리저리 충이니 효니 예의 범절이니 하는 것을 따져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정한 지침을 구할수가 있는가? 이 규범이란 것은 글로 씌여진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꼭같이 적용되는 객관적인 것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양명학은 그럴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확히 앞에서 말한 남이 정해줘서 불러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윤리학이 아니라고 하는 말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정인보는 이런 주자학만을 절대적인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조선시대는 수백년간 내내 문구의 해석과 예의범절에 대한 부질없는 논의로 세월을 보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객관적 세계에 대한 탐구가 서양의 경우처럼 기술이나 과학으로 번졌더라면 실용성이라도 있을 터인데 마음을 객관적으로 파고들어 부질없는 체계와 규칙만을 공부하니 실은 마음공부도 되지 못했다고 정인보는 말한다. 


뭐가 마음공부인가? 양명학은 느끼고 통하는 것을 강조하며 지행일치를 강조한다. 지행일치란 아는 것이 곧 행하는 것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느끼는 것이 아는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면 더 잘 이해가 될듯하다. 여기서 안다는 것이란 단순히 지식을 알고 법조문을 외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는것이란 느끼고 통하는 것이다. 진정 느끼고 통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리가 없다는 것이 지행일치다. 


다시 말해 효니 충이니 하는 것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부모와 자신의 나라에 대해 애틋하게 느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애틋하게 느끼는 마음이 있고 나면 행동은 반드시 그리고 저절로 행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 사람은 효를 행해야 한다라던가 애국자가 되자라는 말을 어떤 규칙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따를 뿐이라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양명학은 진정한 애국지사를 만드는 것이며 이렇기 때문에 양명학은 고정된 규칙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실용정신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정인보는 한마디로 조선이 이렇게 본질을 빼먹은 공부를 해왔기에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지식만 많고 자세한 것만 좋아하는 매국노를 키운 것이다.  


정인보는 조선시대의 양명학자를 논하는데 있어서 첫번째로 최명길을 논한다. 최명길이 실제로 양명학자였는가는 둘째문제고 그가 논한 최명길의 행적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 지는데가 있다. 최명길은 인조반정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지만 인생이 기구했다고 하며 그의 인생이 가장 기구했던 때는 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전후라고 한다. 정묘호란에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자, 최명길은 청나라 사절을 홀로만나고 화의를 맺었다. 병자년에는 청나라 군대가 한양땅으로 처들어 오자 다시 최명길은 자기가 시간을 벌어보겠다면서 청나라를 만나서 시간을 끈다. 정인보에 따르면 임금이 금위군 20명을 내주었는데 모두 성문을 나서자 마자 도망가고 청나라 진영에 홀로 도착했다고 한다. 


최명길은 임금이 다시 위기에 처하고 도저히 전쟁에 가망이 없자 화친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길가능성이 없으므로 화친의 주장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깨자는 말을 먼저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최명길은 화친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그 일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는데 조선의 원조를 요구한다. 이번에도 최명길은 나아가서 화친은 맺었지만 그들을 도와 명나라를 공격하는것은 의리가 아니니 자기가 막겠다고 나선다. 이렇게 명나라와 뒤로 밀서를 보내 교섭하던중 그일이 발각이 나자 최명길은 또다시 홀로 압록강을 건너서 청나라로 간다. 그리고 임금도 다른 신하도 이일을 아는 사람이 없고 전부 자기가 저지른 일이라고 우기니 오히려 청나라 사람들이 최명길의 용감함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명에 대한 의리가 어쩌고 하면서 나라가 망할 처지에 있는대도 청과 화친하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실리를 위해 화친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최명길이었고 그런데 이번에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최명길이었던 것이다. 이런 최명길을 두고 "온갖 시비를 도맡아 가지고 정성을 다해 나라를 구하려고 하니 무던하도다. 참으로 무던하도다."하고 칭찬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최명길은 명에 대한 의리라는 문구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잊는 것도 아니고 의리를 잊는 것도 아니게 상황상황마다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대로 행하면서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양명학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그 소감을 말하다보면 이글이 하염없이 길어질 것이므로 몇가지 점을 지적하고 이 책을 본 소감을 마쳐야 겠다. 첫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우리는 조선의 성리학자들과 다른가 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자면 차라리 수학공식을 외우고 공학이나 과학을 공부할 것이되 만약 인문학에서 느끼고 통하는 바가 없다면 그것은 백해무익한 것이 아닐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요즘 유학을 논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글의 문맥에서 곰곰히 생각해 보면 21세기의 성리학자들은 그대로 있다. 그들이 유학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수학이나 과학 같은 엄밀한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음이 통하는 것이 없이 그저 지식과 숫자를 늘어놓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우리가 조선시대에 장례를 어떻게 치르는가를 놓고 싸우는 것을 두고 비웃지만 실은 훗날에는 한국 사회는 종교가 뭐니 신자유주의니 사민주의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들이 뭔가하는 논쟁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으로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주자학적인 연구가 부질없지는 앉지만 본질이 빠지면 안되듯이 그런 논의가 부질없지는 않지만 옳고 그른 것을 느끼고 국민과 하나가되는 통함이 빠진 논의는 하나마나한 것이 아닐까? 


양명학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 가슴에 조용히 물으면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정신에서 보면 본질은 어디로 보내고 복잡한 역사적 사회적 지식을 늘어놓아 뭐가 옳은지 그른지를 오히려 알수 없게 만드는 지식인들은 전부 조선을 망하게 한 조선의 성리학자같은 사람들이다. 


말장난이 세상에 너무 흔하다보니 청문회에서 위법과 범법이 어떻게 같은가라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유학에 침을 뱉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성리학자들과 같은 일을 하지 않는가? 그저 여기저기서 엄밀한 과학도 못되는 것을 읽고 모아다가 거대한 지식덩어리로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과 말싸움하고 다른 사람들을 꼼짝도 못하게 하는 일에 신경쓸뿐 진짜 본질은 완전히 잊혀지지 않는가?


내 생각에는 사회개혁이란 좋은 사람들이 좋은 문화를 퍼뜨리는 것이 핵심이다. 각자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서로 연결되어 어떤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사회개혁이다. 한무리의 위선자들이 모이거나 울분과 피해의식에 가득찬 불행한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기발한 시스템에 대한 생각만 가지면 살기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거짓이다. 


양명학 자체에 대한 나의 인상으로 이글을 마치도록 하자. 내 생각에는 양명학을 진짜로 하는 사람은 양명학에 빠지지 않을 것같다. 양명학의 진수는 양지가 내 안에 갖춰져 있어서 성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양지만 찾으면 내가 곧 성인이라는 것이다. 양명학은 메이지유신때 일본의 혁명을 정당화하는데 쓰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런 탈권위주의적 시각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 양지면 된다. 심지어 공자도 필요없다. 선불교에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있는데 비슷한 것이다. 공자도 필요없다. 대학도 가져다 버려도 된다. 글자가 핵심은 아니다. 공자도 버릴수 있는데 하물며 양명의 말은 어떻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모든 권위를 버리라고 하면 어떻게 양지를 찾는가. 양명학에서는 실천을 강조한다. 일상의 생활에서 매일 매일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고 선택을 한다. 산에 들어가서 자기만 파는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양지가 밝혀질수 있도록 자신을 속이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윤리적으로 보았을때 우리의 마음은 더 많은 것을 채워넣는게 아니라 더 많이 비워질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그냥 바보같이 멍청해지면 되는게 아니다. 이해를 해야한다. 천둥이 뭔지모르면 우리는 그것을 하늘의 노여움으로 알수 있다. 그러나 천둥번개의 과학을 이해할때 그런 착각에서 벗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을 얻은 것같지만 동시에 부질없는 집착과 어둠에서 벗어난 것이며 마음을 비운 것이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상식, 우리의 문화적 관습, 우리가 세상을 보는 사고 방식들에 대해 그냥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할때 우리는 점점 더 마음을 비우게 된다.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이 전부 임시적인것, 도구적인것, 환상인것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양지는 아마 이럴때 밝혀질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마음을 채우고 혼돈되게 하는 생각들은 5백년전과 지금이 같지 않다. 5백년전에는 주자의 학설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어서 그걸 비워내기 위해서는 공자에 대한 새로운 주석을 읽는 것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 마음은 배금주의나 계급이론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미움등 다른 것으로 차있다. 그러니 진짜 양명학을 하자면 양명학자들이 이야기한 것말고 다른 것도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진짜 양명학자는 양명학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것이다. 


위당 정인보는 암울한 일제시대에 이런 공부를 하고 책을 쓰면서 조선을 망하게 한 병통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정인보를 읽는 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높인다. 서양에는 훗설이 있고 듀이가 있지만 우리도 정인보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현상학이나 실용주의에 대한 나의 공부는 매우 피상적이므로 이런 비교는 대단히 무리한 것일수 있으나 객체적 세계의 한계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양명학은 일맥상통하는바가 있는것같다. 해방이 되었고 한국은 이제 빈민국도 아니다. 대학이 전국에 수없이 많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위당이 1933년에 쓴 글을 우리는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 매우 답답한 일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