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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0. 10. 18.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1944년에 출간된 책이다. 저자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진정한 대안사회를 추구하고자 하는 일에 매진하는 형제자매들사이에서 자라났다. 그의 대표작인 이 책은 그가 거의 60이 다된 나이에 출간한 것이며 이후 그는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로 문화인류학적인 연구주제에 힘을 쏟았다. 


책의 서문에서 폴라니는 이책에 찬동하지 않지만 많은 격려를 해준 피터드러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피터드러커의 자서전에 따르면 폴라니의 미국이주를 도와준것도 피터드러커고 실제로 그가 거대한 전환을 집필하는 동안 많은 교류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피터드러커에 따르면 그의 형제자매는 모두 대안사회를 찾는 일에 매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즉 이 책의 저자인 칼 폴라니도 이 책을 쓴 후 대안사회를 발견하는데 이르지 못했으며 여러가지 인류의 공동체, 문명속에서 희망과 절망을 반복해서 느끼는 만년을 보낸것으로 말하고 있다. 

거대한 전환을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저자에 따르면 자기조정하는 시장이란 존재한적도 제대로 돌아간적도 없는 환상이며 미래에도 도달하지 못할 유토피아, 혹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상당부분을 역사에 투자한다. 짧게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살피기위해 서양의 근대를 보고 멀리는 문화인류학적으로 즉 인간이 보여준 여러가지 문명, 공동체의 형태속에서 과연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시장주의적인 인간이 거기 있는가를 찾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의 상당수는 이책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메세지가 매우 친숙한 것으로 들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상당수의 사람에게는 그 이야기들이 그야말로 듣도보도 못한 매우 낯선 것으로 들릴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이데올로기적이라서 그렇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타 종교에 대해서 잘모른다. 단순히 관심이 적다는 정도가 아니라 믿음에 서로 위배되기 때문에 서로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자유주의, 시장주의라는 믿음이 있는데 그걸 믿는 사람, 그런 이야기만 들은 사람들은 그것이 자명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믿음과 비슷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유주의라는 종교에 속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잘모르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단적이고 위험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유주의 시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거대한 전환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메세지를 이미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들었을 법한 일이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고전이라고 불릴정도로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그 메세지의 부분부분들이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여러형태로 사방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폴라니는 이 책에서 자유주의 경제, 시장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 대단한 경제학자들이 왜 엄청난 오류들을 범했을까를 논하고 있다. 



인간과 시스템.

이 책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느낌을 말하기 위해 절대적이고 옳은 부부생활이란 것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보자. 두 부부가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고 싶고 그래서 여러가지 지혜를 사방에서 구했다. 그렇게 배우고 정착시킨 규칙중에는 비록 아내가 전업주부로 가사를 담당하고는 있지만 주말이 되면 남편이 설걷이를 한다는 것이 있었다. 듣기에 좋아보이는, 적어도 큰 해는 없어 보이는 이 규칙은, 과연 좋은 규칙이 될수 있는 것일까. 몇가지 면을 생각해 보자. 

첫째로 이 규칙이 정해지면 마치 남편이 해야 할일이 주말에 설걷이를 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같은 효과가 난다. 즉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말에 설걷이를 한다라는 실천정신을 가지는 대신 주말에 설걷이를 했으니 난 할일을 다했다라는 식의 태도가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 규칙은 얼마나 잘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부엌정리가 얼마나 잘되있건, 설걷이가 얼마나 잘되어있건 간에 설걷이를 끝냈다라는 형식만 맞추면 대충 할일을 끝냈다는 태도가 생기기 쉽다. 

세째로 다른 부부가 이 규칙을 배워갔다고 하자. 그런데 그 부부는 이 부부가 화목하게 산다는 것에만 주목했을뿐 전업주부라는 것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그부부는 맞벌이인데 똑같은 규칙을 쓰면 과연 도움이 될까?

네째로 이 규칙이 문제를 발생시켜도 그걸 개정하는 일이 어려울수 있다. 

세번째와 네번째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세번째와 네번째의 성질은 그럴수도 있지만 안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부부라는 말을 사회나 국가로 바꾸면 대개는 그런면이 있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한 사회는 다른 사회가 가지는 성공의 메커니즘을 100%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규칙을 모처럼 베껴오지만 그것은 전혀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일수 있다. 그런데도 한번 규칙이 정착되고 나면 사회적 규칙의 개정이란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개정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다. 한국의 교육정책은 쉽게도 바꾸지만 사회적인 규모에 있을때는 정책의 전환은 전환과정의 비용때문에 그렇게 자주 행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예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과 시스템이다. 우리는 잘살기 위해서 어떤 시스템을 도입한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특히 인간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시스템이 모든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시스템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래의 책임감, 감정을 잊게 하는 면이 있다. 자신을 이러저러한 것으로 정의하여 고착시키고 만다. 

칼 폴라니의 주장은 이렇게도 말할수가 있다. 시장사회가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인공두뇌라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시장사회는 여전히 오토바이나 버스나 비행기 같은 것이다. 즉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듯이 항상 조종사가 있었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전설은 틀린 것이다. 시장이 저절로 인간세계를 움직이지 않는다. 이 세계가 돌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책임하에서 그런 것이다.

오늘날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잇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지면 좀 아프다. 그러나 오토바이면 죽을 가능성이 높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떨어지면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점점 더 거대해지고 빨라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을 보면서 우리가 그것이 조종간에 아무도 앉을 사람이 필요없는 자동기계라는 착각을 하는 것은 점점 더 위험한 일이 되는 것이다. 

착각의 기원 1 : 물리학적 세계관이 만들어 내는 운명론

시장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라는 생각, 자유로운 경쟁이 저절로 어떤 좋은 결과를 생산해 낸다고 하는 생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기본적인 감정을 파괴한다. 그러면서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빈부격차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아주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뉴스에서는 자주 나오지 않지만 누구나 마음속 저편에서는 알고 있는 그 사실을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는 신화는 무었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 사회는 어떤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늙고 죽는 것처럼, 우리가 날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신성한 법칙의 결과다. 우리 탓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런 기계론적 세계관은 물리학을 연상하게 한다. 이 세상은 여러가지 원자들로 이뤄져있고 이 원자들은 아무 생각없이 그저 자연의 법칙을 따를 뿐이다. 그것이 거대하게 모이면 열역학의 법칙들을 준수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개개의 원자나 분자는 온도라던가 엔트로피의 증가법칙에 비추어 예외적 존재는 될수 있지만 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일으킬수는 없다. 결국 개개의 원자들은 시스템 수준의 법칙에 대해 무력하다.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이런 물리학적인 법칙과 비슷한 법칙을 밝히겠다는 학문들이 경제학이나 사회학이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한다.) 이데올로기의 생산자들은 어떤 자명해 보이는 법칙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법칙이 피할수 없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났을때 어떤 인간들은 자유로워지고 어떤 인간들은 영원히 좌절해야 한다. 

인구론을 쓴 멜서스는 결국 생산을 늘려봐야 인구증가가 그 생산효과를 없애버릴것이고 굶어죽어가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피할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빈민을 죽이는 것이 빈민을 위한 일이 된다. 빈민의 생활향상은 오직 인구감소로만 이뤄질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빈민을 돕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 인구조절을 할수 있는 이성적존재가 못된다. 실은 오늘날에는 산업노동자계급이라고 쓰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이 자식을 마구 낳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논증때문에 자유로워 지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다. 부자들은 빈민들의 비참함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빈민들은 어차피 노력해도 뭐가 될일이 아니니 내 인생 내가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 진다. 법칙이 만들어지면 운명론자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린 이런 자유를 좋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멜서스의 인구론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고 해도 경제학 법칙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런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들리는 논의로 부터 우리는 탈출할수 있을까? 단순히 감정적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해가 필요하다. 글의 마지막에 쓰겠지만 나는 이것이 인간을 포함하는 생명이란 존재와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을 혼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착각의 기원 2 :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것이다. 

자유주의는 자유롭지 않다. 진정한 자유는 시스템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주의는 그저 자유라는 이름이 붙은 논리고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라는 시스템에 매몰되면 우리는 가장 자유롭지 않은 상태가 된다. 

칼 폴라니는 책전체에 걸쳐서 자유시장이라는 환상적인 말뒤에 있었던 시장개입의 예들을 나열하고 있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유시장을 믿었던 사람들은 그 행동에 있어서 결코 자유시장을 실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시장이라면 예를 들어 모든 종류의 독과점도 허용해야 한다. 이 독과점은 노동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독과점도 포함한다. 즉 모든 종류의 파업은 그것이 비록 사회전체의 운명과 시민생활을 위협하는 것이 될지라도 자유시장논리에 따르면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결국은 균형을 맞출것이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시장주의자들은 결국 자기들이 편한대로 행동하면서 그것이 자유라고 말한다. 자기에게 불리하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개입을 해야 하고 남이 비참한 현실에 처하면 그것은 엄숙한 시장의 법칙의 결과이므로 유감이지만 어쩔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파업때문에 부자가 파산하는 것은 극악한 범죄행위고 부자들 독과점으로 빈민이 굶어죽는 것은 자유경쟁의 법칙때문이다. 

자유주의라는 말에 속은 사람들은 눈앞에 뻔히 보이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시장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거기에는 복잡한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규칙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것이 말이 되지 않는 논리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 애초에 자유주의의 기본논리는 자유로운, 자연법칙, 경제법칙에 따르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자연히 달성되는 균형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위적 개입은 개인들의 탐욕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비판된다. 이런 논리에 따라서 빈민들의 가난은 부자들이 배가 터져죽을 지경이라도 부자들이 죄의식을 느낄일이 아닌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법칙때문이고 법칙을 어겨봐야 더 비참한 미래가 오니까. 이런 관점에서는 자유를 지킬 개입이나 규칙이란 차가운 불처럼 자기 모순적인 단어다. 

칼 폴라니는 경제학의 선구자들은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환경속에서 경제학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스피넘랜드법이라는 구호법이 만들어 낸 참상을 말한다. 스피넘랜드법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구호법으로 한마디로 말해 무차별적인 최저임금을 제공하는 구호법이다. 

무차별적인 최저임금의 지급이란 바람직한 것같은데 왜 이것이 참상을 만들어 냈을까하는 점은 다음 단락의 주제로 남겨두기로 하자. 한가지만 말하자면 이것은 일해서 먹고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구호물자로 먹고사는 사람들로 추락하는 환경을 만들어 냈다. 아뭏튼 이 구호법하의 영국은 아주 비참했고 이때 진화론적이고 물리학 법칙적인 인구론 적인 주장들이 나온 것이다. 즉 인위적인 구호는 가난을 해결하지 않는다. 인간은 오히려 배고픔으로 내몰릴때 일하게 되므로 마치 섬안에 있는 개와 염소가 그 수의 균형을 맞추듯이 자연스런 경쟁상태속에 인간이 밀어넣어질때 가난한자는 가난에서 탈출한다는 것이다. 혹은 굶어죽어 없어지거나. 어느쪽이든 극빈자는 준다. 어쨌건 인위적인 개입은 없어야 한다. 그것은 이길수 없는 싸움을 해서 문제를 더욱 나쁘게 만든다는 것이 이시대의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이 시대는 인위적인 구호법이 비참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영국사람모두에게 아주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존재해 왔던 것은 지금 존재하는 것은 자유시장이 아니고 복잡한 규칙을 가진 시스템이다. 폴라니는 노동, 토지 그리고 화폐에 중심을 두고 시장주의의 실패를 말한다. 결국 시장주의적 인 사고를 쫒아갔던 모든 나라에서는 참극이 벌어졌고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방어 대책이 생길수 밖에 없었다. 먼저 부를 쌓은 선진국들은 오로지 식민지에서만 냉혹하게 시장주의적 법칙을 강제하는데 이는 물론 시장주의의 실패가 만들어 내는 참상을 자신들이 겪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폐를 보자. 세계 1차대전 이전 전후의 유럽에서는 화폐가치를 지킨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이었다. 자기조정을 하는 시장을 믿는 사람들에겐 자유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유지한다는 것이 경제적 번성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신념이 있었고 그런 믿음에 따라 각 나라들은 금본위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본질적으로 이런 시대에 정부는 어떤 경제적 간섭도 해서는 안된다. 경제적 논리에 따르면 수출입의 불균형은 자연스런 디플레이션이나 인플레이션을 만들고 그것은 다시 제작원가에 영향을 비쳐 수출입의 균형을 저절로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아주 간단한 논리다. 돈이 나라밖으로 빠져나가면 돈값이 비싸지고 그럼 물가가 떨어진다. 물가가 떨어지면 생산원가가 낮아지니까 수출할 물건도 싸지게 되서 결국 수출이 늘고 돈이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각 경제의 여러 부분들이 이런 '자연스러운' 변화를 견뎌낼수 있는가가 문제다. 변동의 폭이 너무 크면 수출하는 회사가 그냥 도산해 버릴것이다. 수출입불균형에 따라 본래는 임금이나 전반적 물가가 예민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날 그날 임금을 그날 그날의 국내통화량에 따라 다시 계산하는 방식이 아니니까 그렇다. 물건값이 폭락해도 임금은 약속한 대로 줘야 하니 회사는 그런 충격속에서 도산하기 쉽다. 

따라서 종국적으로는 영국, 미국을 따라 모든 나라들이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조절하는 시스템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나면 시장은 전혀 자유가 아니다. 중앙은행의 존재는 자유시장주의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시장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자유주의의 세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온갖 법칙이 존재하는 -오히려 전보다 훨씬 규칙이 많은- 새로운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봉건제나 노예제가 있던 사회와 차이가 없다. 

이러한 점을 쉽게 긍정하고 물론 그렇다, 우리는 단지 보다 좋은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시스템은 전의 시스템보다는 좋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처음에 예를 들었던 한 부부의 이야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좋은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좋다는 건 뭔가. 우리는 시스템을 보다가 인간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칼 폴라니는 책을 마치면서 결국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그에 맞는 시스템을 찾아야 한다는 논의를 한다. 즉 시장주의가 전제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틀렸다는 것이다. 시장주의는 인간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이기적 존재로 생각하는데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던 것은 결코 경제적 이익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다 사회적인 것이었다.

칼폴라니가 찬사를 보내는 오언을 비롯한 다른 여러 계몽주의자들은 빈민을 구제하는 빈민들의 소규모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실패한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이런 저런 구조의 건물, 이런 저런 규칙을 가진 시스템을 만들어 빈민들이 서로 돕고 잉여 생산을 해낼수 있다고 믿었다. 오언의 경우는 좀 예외적이지만 사람들의 시도를 보면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인간은 이러저러하게 행동하게 되어 있다라는 것에 대해 너무 단순한 접근을 한다. 

인간은 항상 합리적이지 않으며 서로 다른 동기로 움직이며 단순한 경제적 동물이 아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그 환경을 바꾸기도 하고 그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존재다. 한 무리의 위선자가 모인것이나 가치관적으로 잘 정돈된 사람들이 모인것이나 결국 시스템이 똑같으면 결과가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인간을 너무 좁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빈민들을 어떤 로보트같은 객체로 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빈민들 개개인이 피와 살이흐르는 자유의지를 가진 매우 복잡한 인간, 변해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그들은 이렇게 하면 저렇게 행동할것이라고 단순화한다.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단순한 인간을 전제한 시스템이 단순한 인간을 만든다. 

실은 스피넘랜드법이 영국에 있었을때 빈민이라는 말은 기득권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을 말하는것이었다고 한다. 산업혁명이 완결되기전에 직업을 가지고 떳떳히 일하는 노동자 계층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질 않았고 귀족적 계급 아니면 모두 그저 빈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빈민을 위한 시스템도 자기힘으로 먹고살고자 하는 의지와 긍지가 있는자와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타락한 구제불능의 빈민을 서로 구분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시스템은 종국에는 일해서 먹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두 타락하게 만들어 파렴치하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규칙이나 시스템에는 역설이 있다. 그 시스템이 더 넓은 사람들을 포괄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시스템이 거꾸로 그 많은 사람들을 똑같이 행동하게 만든다. 모든 여자와 남자를 여자이거나 남자라는 이유로 똑같이 대우하면 모두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 똑같은 사람으로 계속 인식하면, 그들은 똑같아진다. 스스로 정신적으로 깨우치지 않고 태만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데- 그렇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세세한 규칙을 만들어 사람들을 복잡하게 구분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이제 거기엔 자유가 없다. 일단 그 규칙에 제시하는 좁은 어느 공간에 배치되고 나면 그 공간에 몸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 성긴 시스템에는 어느정도 자유가 있지만 세세한 시스템에는 자유가 없다. 스스로 자신을 둘러싼 시스템을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다음에는 그렇다. 

역사적으로 보아 폴라니의 책을 단순하게 말하면 스피넘랜드법의 실패로 나타난 그 반대의 자유시장주의도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다시 인위적 개입을 하는 스피넘랜드법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유시장주의를 지켜내야 하는 것일까? 적당히 중간에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시스템이 존재하는것일까? 

오늘날에도 우리는 세계화, 도시화라는 이름으로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본다. 이런 질문은 그저 한가하게 과거의 어느 시점에 대한 잡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의 문제이며 여러 작은 지자체의 문제이며 가족의 문제이고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는 물리학적 법칙같은 것의 존재를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감정적으로 맞서서는 안된다. 그것은 문명회피내지 파괴주의, 대책없는 낭만주의자들의 반응이다. 인간은 원자가 아니다. 인간은 수학적 기호도 아니다. 생명체는 정확한 정의가 없다. 

폴라니는 여러가지 인간계층으로 사회현상을 보는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면 사회적 변화속에서 그 계층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여러가지 개념의 실체도 그렇다. 우리는 시장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볼때 거기에는 이런 저런 시장이 있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노동자 계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과거를 보면서 거기에는 노동자계층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피타고라스의 원리나 수소원자가 수천년전에도 지금과 똑같이 존재했을것이라고 믿을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허공에 던진 공은 허공속에서 스스륵 없어지지 않고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훨씬 성긴 정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은 그렇다. 

인간이란 로보트가 아니다. 정해진 입력에 출력을 내는 기계가 아니며 인간이 이러저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훌러가는 강물색깔을 보고 강색이 이렇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생명체는 다 그렇다. 풍선이 진공속에서와 땅의 기압하에서 서로 다른 모양을 가지듯이 생명체는 안과 바깥이 정확히 구분되고 정의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땅이나 자연환경, 사회적 환경과 인간을 쉽게 떼어내서 자동차 조립하듯 새로운 규칙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면 그안에서 인간이 번성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따라서 어떤 법칙을 상정하고 운명론적인 자세를 취한채 자기 책임을 잊어버리는 것은, 특히 오늘날처럼 기계문명이 발달된 시대에 그렇게 하는 것은 ,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손잡이를 놓는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스템이 근사할수록 그 시스템이 붕괴할때는 그 비극이 더욱 클것이다. 

맺는말

거대한 전환은 실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6백페이지 이상의 책이며 책의 두께이상으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기 때문에 책의 제대로된 요약이란 가능하지 않다. 그럼 책의 본래 두께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써야 할것이다. 그래서 손가는대로 떠오르는 가장 중요하다 싶은 이야기를 주로 썼다. 

앞에서도 조금 말했지만 이책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고전이 모두 그렇듯이 이 책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고 각 개인에게 모두 중요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책이라서 그렇다. 시스템이란 뭔가, 인간이란 뭔가, 자유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뭔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것은 답이상으로 이런 고민거리의 주제를 이 책이 제공해 준다는 점인것 같다. 

이 세상에 누가 입을지 모르는데 몸에 꼭맞는 옷이란 존재할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때문에 변하기도 하는 존재라서 궁극의 시스템이란 존재할수 없다. 시스템은 계속 바꿔가야 한다. 

자동차나 비행기는 편리한 기계지만 어린애나 미친사람의 손에서는 흉기나 자살도구가 된다. 자동차를 몰려면 그에 어울리는 조중사가 있어야 한다. 내가 이책을 읽고 다시금 확인한 내 시각은 이렇다. 인간은 인간이 감당할수 있는 정도의 복잡성과 힘을 가진 시스템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들이 나아가 인간사회가 모두 성숙되지 않으면 더 강력한 시스템은 비극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우리의 변화보다는 사회나, 시스템의 변화에만 너무 메몰되어 있다. 이상주의에 불타는 사람들중에는 궁극의 시스템을 가져오면 우리가 천국에 살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그렇게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저주하거나 그렇게 시스템을 바꿨는데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시스템을 보면서 인간 자체에게 좌절한다. 

자유시장주의자들도 이런 이상주의자들중의 하나다. 자유시장이 들어서지 않으면 그것을 막는 사람들을 탐욕스런 인간들, 사회적 악, 어리석은 인간으로 본다. 자유시장이 들어섰는데도 잘움직이지 않으면 이번에는 자유시장을 위협하는 사람들의 탓으로 보거나 인간자체가 본래 썩어빠져서 잘살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진보주의자들은 변화는 항상 댓가가 따른다는 것, 인간은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 자신들이 굳게 믿는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 실은 매우 천박한 것이라서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시스템은 바꿔야 하지만 시스템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 불완전성은 언제나 성숙하고 책임감있는 인간들이 직접 메꿔야 한다. 

그런 이상주의자들은 과거에도 있지만 지금도 있으며 시장주의에 찬성하는 사람중에도 있지만 반대하는 사람중에도 있다. 행복한 부부는 좋은 규칙에 도움을 받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규칙을 넘어설수 있는 인간일때만 그 규칙은 그들을 해치지 않는다. 행복은 규칙의 지배하에 생기지 않으며 행복한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속의 소리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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