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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전태일 평전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1. 7. 1.

전태일의 분신이 있고 40년이 흘렀다. 나는 요즘도 청년들이 전태일을 읽는지 궁금하다. 21세기에 전태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일하다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항의하면서 분신을 감행한 노동자다. 그는 제대로 학교를 다닌적이 거의 없었으며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면서 성장하고 나중에는 고된 노동조건에 시달렸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그냥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에 머물렀다면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한국이 낳은 불운한 천재다. 


전태일 평전은 그가 썼다는 수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수기를 읽어보면 이것이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 쓴것인지 아니면 학교는 아주 잠시 다녔을뿐 도무지 책한줄 읽을 시간도 없이 내몰렸던 사람이 쓴것인지를 착각하게 만든다. 그는 팔자가 좋을 무렵에도 한달에 2일밖에는 쉬지 못했고 나머지는 하루에 15시간의 근무를 하고 남의 일까지 도맡아서 했던 사람이다. 형편이 좋지 못했던 때에는 바다에 뜬 쓰레기를 주워먹으려고 하다가 죽을뻔할 정도로 완전히 거지 그자체였다. 더구나 그가 분신을 했을때의 나이가 22살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이룩한 정신의 수준은 그야 말로 천재의 그것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수기는 그가 단순히 무식한 22살의 청년이 아니라 확고한 자기 시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임을 알게 한다.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변호사는 전태일 사상이란 것을 설파하고 있거니와 이는 조영래 변호사의 시각이 많이 들어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과장이 아니다. 전태일은 학교에서 죽은 언어로 뜻도 모르면서 공부를 한 어느 학생보다 더 깊이 노동자를 둘러싼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 체념하고 뭐가 문제인지도 알지 못했던 시대에 그 상황에 대해 자기 몸을 불살라서 소리를 낸다. 그것은 당신들은 이게 보이지 않냐는 인간이 낼수 있는 가장 큰 소리였다. 후일의 세대인 우리는 그 의미를 실제보다 사소하게 생각할수 있다. 우리는 이미 전태일같은 사람들에 의해 그걸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지동설이 당연한 이시대에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은 너무나 알기 쉬운 일처럼 생각되듯이 우리는 전태일이 보여준 것을 쉽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건 그렇지 않다. 


전태일 평전은 가장 비인간적인 삶이 무엇이고 가장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동시에 보여주는 책이다. 전태일 일가의 불운한 삶을 통해서 인간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험난함 속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 나아가 없고 약한 주변사람에 대한 사랑을 잊지는 않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지, 무엇이 가장 인간적인 삶인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전태일 평전은 단순히 어떤 한 노동자의 삶에 대한 묘사를 넘어 전태일의 삶과 조영래변호사의 삶이 만나서 이뤄진 하나의 사상서다. 이 사상서는 많은 사람들을 각성하게 했고 오늘날의 한국을 현재의 모습이 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발휘했다. 


그 사상은 이렇게 정리될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그렇다. 전태일이 몸을 불살라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노동자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인데 어떻게 열서너살 먹은 여자아이에게 버스값정도밖에 안되는 돈을 주면서 몸을 다 망칠정도로 일을 시킬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런 아이가 몸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약을 먹여가면서 돈을 짜내다가 몇년후에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처분하듯 그냥 몰아내어 버릴수가 있는가. 


참혹하게도 우리는 어떤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대개는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러한 현실에 대해 가장 참혹한 부분은 그 차별받는 사람을 우리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왕따시키면서 놀리고 심심하면 두들겨 패는 것이 일상화 되다가 보면 우리는 종종 저 아이는 느끼는 것이 없는 존재, 즉 부끄럼을 모르고, 화도 낼줄 모르고, 아는 것이 없어서 자신이 받는 설음이 뭔지도 모르는 짐승같은 인간이하의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나같으면 저러고 도저히 못살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나같으면 저러고 못살텐데 저 아이는 참 잘도 견딘다. 둔해서 뭐가 뭔지 모르는 모양이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고생하던 노동자를 바라보는 형편좋은 사람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아들딸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을, 스스로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점점 저 노동자들은 둔해서 저러고도 잘 참고 느끼는 것없이 사는 모양이지 라고 멋대로 생각해 버린다. 전태일은 거기에 대해 노동자도 사람임을 외치고, 노동자도 가장 학식높고 부유한 사람들보다 더 깊고 풍부한 정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노동자도 피와 눈물이 흐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단 노동자가 사람이라는 것을, 교수나 재벌총수나 대통령과 다를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각성한 사회는 변화를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전태일과 전태일 평전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는 제아무리 내가 여기서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큰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극복되어야 할 한계를 가진 사상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 뿌리를 전태일이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노력했던 모범업체를 세우려는 노력에서 보게 된다. 이것은 왜 전태일이 죽을수 밖에 없는가하는 문제를 보여주거니와 나아가 21세기에 왜 노무현이 죽을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기도 하는 중대한 문제다. 


전태일은 노동자들에 의해 운영되어지는 모범업체를 세우고 싶어했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보수를 제공할뿐만 아니라 좋은 작업조건을 제공하고 나아가 교육도 시키는 그런 업체였으며 그러면서도 수익을 올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업체였다. 방대한 사업계획서를 세우고 여기저기에 그를 위한 돈을 마련하려고 노력했으나 전태일은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분신자살로 돌파구를 마련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인 조영래는 그 스스로가 이것이 애초에 될리가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자본가가가 여기에 투자할 것인가. 누군가가 투자한다면 그는 투자를 하는게 아니라 그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투자로서 즉 다른 업체와 경쟁해서 살아남을수 있는 존재로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전태일의 사업계획은 어림없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기 때문에 전태일은 죽을수 밖에 없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진정한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게 필요하다. 혁명적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사람들이 사는 방법, 세상의 질서 자체를 바꾼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정의를 보다 확실히 실현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삶의 방식과 경쟁하여 이길수 있는 방식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혁명이란 서양의 중세에서 근대의 합리주의로 넘어오는 것같은 것을 의미하며 고려시대의 불교국가가 조선의 유교국가로 넘어가는 것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동학혁명같은게 진정한 혁명의 시도다. 그것은 반드시 선이 악과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선과 악은 이미 주어진 시스템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한계는 그가 악덕 기업주를 선한 기업주로 대체하는 것만을 꿈꿨던 것에 있다. 그는 노동자를 대접하고 보호해 준다는 선함을 꿈꿨지만 동시에 그런 기업이 경쟁력을 어떻게 가질수 있는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계획은 성사될수 없었다. 


그 자체로 새로운 혁명의 길을 완전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성공한 예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혁명같은 것이 뭔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완전히 감이 없는 사람을 위해 우리는 두가지 예를 생각해 볼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생활협동조합과 개신교 교회다. 


전태일이 꿈꿨던 것에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협력하고 신뢰해서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부분이 없었고 기업주와 노동자의 관계만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와 노동자간의 관계는 부수적이고 사소한 것이며 문제는 기업주에게서만 발생하고 있다. 기존의 시스템을 넘어서는 신뢰와 새로운 가치가 없으므로 투자가 존재할수 없고 새로운 동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협동조합에는 그게 있다. 개신교 교회에는 그게 있다. 공동체가 되려는 노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개신교교회는 한국에 우후죽순 처럼 불어났다.


혁명이란 하나의 종교적 개종과도 같은 것이다. 새로운 가치로 완전히 새로운 삶의 질서를 꾸릴때 완성될수 있다. 그렇지 않을때 개혁이 있다고 해도 시스템에 존재하는 악은 결국 더욱 교묘한 형태로 돌아올 뿐이다. 전태일 이후 40년이 지났지만 한국인들의 자살률이 세계최고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여지듯이 말이다. 이제 누가 누구를 어떻게 억합하는지는 더더욱 보기 힘든 것이 되었고 사람들은 무엇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채 삶을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협동조합이건 어떤 종교건 21세기의 한국을 바꿔가기에는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물론 기독교, 유교, 불교등 여러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흡수 포괄해야 할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에는 대개의 경우 비이성주의의 유산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직화된 지식 혹은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과학과 이성주의의 힘은 전보다도 엄청나게 크다. 


오늘날 과학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일없이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문화적 개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낭만적 사고로 시스템에 저항해 봐야 그 궁극에는 목숨을 던짐으로서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정점으로 하는 일밖에는 남지 않는다. 도시의 삶이 인간을 죽인다고 해서 시골로 산으로 피신해 봐야 결국 아마존의 원시부족이 현대문명인들에게 일종의 구경거리처럼 되듯이 경쟁력을 잃고 사멸해갈 뿐이다. 우리는 더욱 과학적이 되기 위해서, 과학을 넘어서기 위해서, 과학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체하고 초극할 필요가 있다. 여러 종교는 물론 자신들이 현대과학을 넘어서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과연 얼마나 깊은 고민끝에 그런말을 하는 것일까. 


그런 가운데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 가야만 혁명은 이룩되는 것이다. 혁명은 나쁜 기업가가 좋은 기업가가 되는게 아니다. 혁명은 양반과 쌍놈이 있는데 양반이 없어지거나 쌍놈이 양반되는게 아니다. 국민 모두가 강남의 좋은 아파트에 살수 있게 되는게 아니다. 기존에 말하던 기업가라는게 없어지는게 혁명이다. 양반도 쌍놈도 없어지는게 혁명이다. 삶의 방식이 달라져서 전국에서 아파트가 아닌 새로운 주거환경에서 살게 되는게 혁명이다. 


나는 결코 종교를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 개종과 같은 혁신이 없고서는 모든 개혁은 결국 더 교묘하게 문제를 숨기는 도피일 뿐이다. 그것은 가치와 윤리의 문제고 뭐가 삶에서 중요한가에 대한 생각의 문제다. 그걸 기본부터 재구축하는게 혁명이다. 자잘한 시스템의 개혁은 한계가 크다. 


예를 들어 아이들교육에 있어서 성적을 공개하는게 좋다던가, 공개하면 나쁘다던가, 대학입시 시험이 쉬워야 한다던가, 어려워야 한다던가, 체벌이 필요하다던가 나쁘다던가 심지어 평준화를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대학등록금이 반값이 되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논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항상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안에서 더 교묘하게 곤란에 처하는 사람이 있다.    


체벌은 나쁘다. 하지만 체벌을 포기하고 학생을 규칙대로 정학시키거나 가르치기를 포기하는건 좋을까? 대학등록금이 반값이 되건 안되건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낀다면, 그런 가치관 속에서는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장학금을 주거나, 보수좋은 알바자리를 만들거나, 실제로 등록금을 공짜로 만들거나 말이다. 그렇지 않을때 젊은 세대를 수탈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아이는 시스템이 키우는게 아니다. 어른들의 가슴이 키우는 것이다. 


노동쟁의도 그렇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런 법을 만들거나 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까. 기업이 그냥 그런거 안 따지는 외국으로 옮겨가는 것이나 불평안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왕창들여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 장기적으로 대안이 될까?


 21세기에 전태일 평전을 읽는 것은 여전히 좋은 일이다. 젊은 세대에게도 그렇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왜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일이거니와 세상을 바꿔나갈 혁명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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