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7.14
머릿말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1962년에 초판이 나왔으며 이 책에서 논의한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이제 왠만하면 안들어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되었다.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점은 그만큼 세상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지금 다시 읽어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내가 이번에 그렇게 느꼈듯이- 상당히 같은 말을 반복하는 듯이 느껴질 것인데 이는 출간당시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점들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고 이제 우리는 그러한 시점이 받아들여진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이 씌여졌을때는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른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대였다고 하면 이 책때문만은 아니라고 해도 오늘날의 우리는 이 책에서 말하는 과학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 신 패러다임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논하는 저자가 패러다임의 변화에 기여했다라는 것은 어찌보면 재미있고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토마스 쿤의 과학논평은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과학사가로서의 시점이고 또 하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과학 혹은 지식전반에 대해 회의 하는 방식이다. 이 점은 칼 포퍼같은 철학자의 입장과는 다른데 철학자는 무엇이 옳은가라던가 과학이라 불리는 것은 어때야만 하는가라는 규범적 시점에서 이야기한다면 토마스 쿤은 어느정도 역사적 변화를 보면서 좋건 나쁘건 역사는 이렇게 변해 왔다라고 서술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올바른 정치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과 올바른 정치란 역사속에서 어떻게 정의되고 추구되어져왔는가 혹은 실존하는 정치란 어떤 것인가의 차이다. 그러나 토마스 쿤은 인식론적인 관점속에서 왜 과학은 이럴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점도 많이 논했기 때문에 후기에 보면 기술적 묘사와 규범적 주장을 섞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고 한다.
비약을 요구하는 과학발전
그렇다면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이 말하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학적 발전이란 조금씩 개량되어져 일어나기 보다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물리치고 세상에 대한 전혀 다른 묘사를 만들어 내는 비약으로 일어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왜 이런가 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그건 복잡성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기를 둬본 사람이라면 장기에는 이런 저런 전술이라는게 있다는 것을 알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우리는 그 전술에 따라 일단 진영을 가다듬는 일을 한다. 그런데 전술을 개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전술을 조금씩 조금씩 끝없이 개량해 나가는 과정인가? 그럴 때도 있지만 진정한 전술의 개량은 비약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두 개의 다른 종류의 전술은 둘 다 상당히 강력한 전술이라고 해도 완전히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하나의 전술에서 또다른 전술로 우리가 방법을 바꾼다고 할 때 그것은 작은 개량이 아니라 완전히 전혀 다른 곳으로 비약하게 된다.
우리는 같은 것을 등산을 하기 위한 등산로를 찾는다던가, 자동차운전을 배운다던가, 공부를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찾는등 우리가 아는 수없이 많은 일들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 핵심은 바로 복잡성에 있다. 여러가지 세부적 구조를 가진 복잡한 시스템은 각각의 부분들이 다른 부분들의 역할에 의존하게 된다. 자동차에서 타이어의 위치는 자동차 차체의 모양에 따라 결정되는 식이다. 그러므로 전체 시스템의 개량을 노릴 때 우리는 대담한 변화가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해결책으로 이끄는 일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전이를 한다던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서 코페르니 쿠스의 천문학으로 전이를 하는 것은 큰 비약이 필요하다.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애매하게 쓰이고 있고 그 점을 비판받는 일도 있는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내 생각에 저자 자신도 자신은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순환논법적으로 쓰고 있다고 말하므로 패러다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말로 정확히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책을 읽거나 패러다임에 대해 논하는 사람의 글을 읽어서 패러다임이란게 뭔지를 배우고 느낄 수가 있는데 이는 패러다임이 책과 글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쓰이는가를 봄으로서 이뤄진다.
엄밀한 논리적 전개란 패러다임에 명확한 정의를 주고 그 정의를 기반으로 해석적으로 패러다임의 특징을 논하는 것이며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저자가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은 이 책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것인데- 하나의 패러다임안에 있는 한 다른 패러다임으로 비약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일관성의 문제를 겪는다거나, 주어진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신뢰를 잃게 되고 그런 상황이 바로 패러다임의 위기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의 과학적 이론이나 패러다임은 칼 포퍼가 말하듯 반증적 실험에 의해 반드시 포기되지는 않는다. 왜냐면 항상 거기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비정상적 관찰이나 실험이란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며 그것은 항상 미래에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도 설명되어지는 것이 가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현재의 패러다임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는 확실한 증거인지 아니면 단지 과학자들이 수수께끼를 푸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언제나 확실하지 않다. 사실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푸는 문제가 있다는 것은 현재의 패러다임이 모든 문제를 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러다임의 위기상황이 벌어지면 기존 패러다임에서 말하는 여러가지 개념이 문란해 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기되고 그것이 과학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면 옛 패러다임은 폐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런 좋은 예는 위에서 말한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의 전환 같은 것인데 고전역학은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양자역학은 하나의 존재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해석을 만든다.
저자가 분명한 정의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들의 나열로 패러다임을 암시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의 철학과 관점에 따라 그쪽이 보다 위험하지 않은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정확한 정의를 만들고 시작하는 것은 하나의 패러다임에 갇히게 되는 문제를 만들고 더구나 그것은 그때 당시의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에 갇히는 문제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말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뭔가를 잘 설명하는 방식은 -그러나 어느정도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는 방식은- 패러다임을 하나의 언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영어를 쓰는 사람에게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한다고 하자. 엄밀하게 가르치려고 한다면 우리는 단 하나의 단어도 가르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친구는 프랜드가 아니고 자유는 프리덤이 아니다. 하나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 단어가 가진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문맥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아내와 와이프는 다른 말이다. 그들은 다른 사회에서 다른 의무와 권리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친구가 뭔지를 영어로 정확히 설명한다는 것은 한국어 전체에 대한 이해 혹은 한국 사회와 역사 전체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따라서 친구란 프랜드다라고 정의식으로 제시하면 착오가 생길뿐 아니라 결국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불분명한 정의를 가지고 단어들을 가르쳐주고 그 단어들이 서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는가를 경험하면서 친구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느끼도록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을 이해할 때 패러다임이 세상을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가 눈내린 초가집을 보고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것이 '집'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이 '짚'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지붕이 있고 눈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 안다. 이 과정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과정은 이미 어떤 그 하부적 대상을 안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 두 개의 의자가 있다고 하자. 서로 모양이 다른데 왜 우리는 그것을 모두 '의자'라고 할까. 그 이유를 답하는 것이 질문의 핵심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것인데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만 그걸 의자라고 한 집합으로 만든 것이 언어고 인간의 발명이란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조를 모두 포기하고 나면 우리는 관찰이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적 내용의 양은 거의 무한한 것이다. 하나의 컴퓨터 그림파일을 생각해 보자. 그걸 픽셀단위로 일일이 색과 위치를 말하면 그 그림파일의 내용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눈내린 벌판의 초가집 사진이다라는 한문장으로 말할수도 있다. 이 정보량의 압축에는 언어구조가 작동하는 것이고 언어를 개입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사고자체가 불가능하다. 너무 많은것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가정없는 사고란 불가능하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어떤 패러다임을 따르고 있는지를 인식하기란 쉽지 않고 그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도 어렵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의심없이 믿고 있는 사람에게 그 패러다임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그 패러다임이 보여주는 것만 있다고 생각된다. 그 패러다임을 탈출하는 것은 반증의 증거를 기반으로 하여 설득되는 일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직관과 느낌에 따른 것이거나 외부적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외부적 권위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긍정하는 쪽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일단 패러다임을 탈출하면 세계는 전혀 달라진다. 대학교수와 학부생이 한국어로 이야기하다가 영어로 대화를 한다고 하자. 말을 바꾼 것뿐인데 두 사람간의 관계가 전혀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그 차이는 곧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혁명적 변화와 사회
이러한 혁명적 성격을 분명하게 만드는 것은 과학자 사회로 불리는 집단이 등장하게 되어 더욱 그렇게 된다. 언어도 그렇지만 과학도 혼자 힘으로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집단에 의해서 연구되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 집단은 하나의 패러다임을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은 신진 과학자 집단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된다. 교과서는 과학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기억나지 않는 고대로부터 자연법칙은 이렇게 존재했다고 가르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력법칙은 뉴튼이 만든 것이지만 중력은 우주탄생때부터 존재했다고 이해된다. 과거의 유명과학자가 한 말이나 이해를 왜곡해서 그들을 현대적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만든다. 그리고 물론 기성과학자 집단은 권위를 발휘하여 자신들의 패러다임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열등하다거나 의미없는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변화를 이렇게 설명해 보자. 세상이 온통 마차만 쓰이고 있었을때 누군가가 혼자 힘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하자. 우리는 이 사람의 생각이 순식간에 퍼지고 세상에 의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초기의 자동차란 마차에 비해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마차가 쓰이는 세상은 마차가 가지는 문제점을 여러가지로 보완하는 시스템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자동차가 등장한다고 해도 적어도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쓸모없는 물건으로 인식하게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도로와 주유소가 지금의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본다. 당연히 사람들은 개솔린을 사기가 쉬우며 차가 고장나면 고치기도 쉽다. 그런게 없는 세상에서 자동차란 기괴한 장난감 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차시스템에 중독되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자동차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전체 인구의 반은 영어를 쓰고 반은 한국어를 쓰는 상황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므로 급속히 해결해야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변화가 시작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퍼지면 과거의 패러다임은 급속이 잊혀지고 비판받고 어리석은 것으로 인식된다. 이제 자동차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 마차따위를 타려는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 변화는 소수의 개인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일군의 사람으로 번지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사람이건 일군의 사람이건 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이 초기의 집단이 기성집단의 압력을 견뎌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그렇지 못하다면 패러다임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새로운 시각은 없어진다. 그렇게 되어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전체 사회로 퍼지고 과거의 패러다임은 사라지게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 대하여
그러나 모두가 과학자인것도 아니고 과학도 아닌 과학의 역사를 읽고 배운다는 것은 이 책을 읽는 개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관련된 전공자가 아니라면 심하게 말해서 나는 유명한 고전을 한권읽었다고 자랑하는데나 쓸모가 있을뿐 아무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만약 개인적 차원에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없다면 말이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의 연구방식이나 과거와 현재의 과학에 대한 논의는 엄밀히 말해 과학자가 아니라면 피부에 닿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중 과학서는 물론 그나름의 의미도 있으며 재미도 있는 것이지만 대중과학서를 읽는 것과 과학을 직접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아이스크림 그림을 본 사람과 그걸 먹은 사람의 경험의 차이만큼 다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논하는 여러 과학자의 연구방식은 실제로 과학연구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추측만 가능할 것인데 그것이 어떤 왜곡을 만들어 내어 이 책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면이 분명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선가게 주인에게 이 책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책의 주된 의미는 바로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는 것에 있다. 패러다임이란 여러층위에서 정의될 수 있지만 우리가 뭔가를 알거나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기본배경이다. 패러다임을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같은 과학적 이론으로만 이해하면 그런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일반인들은 자신은 어떤 패러다임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패러다임이란 끝없는 차원에서 존재하며 일반인이 피해갈 수 없는 기본적 차원에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토마스 쿤은 시각적 혼란의 예를 과학적 발전과 대비시키면서 진리란 무엇인가를 논한다. 어떤 그림은 보기나름에 따라 오리처럼도 보이고 토끼처럼도 보인다. 과연 이세상을 올바로 보는 방식은 무엇인가. 이 세상안에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지는 구조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것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모든 것이 우리마음에 따라 생긴다는 상대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세계 그자체는 인식될수 없다. 우리의 인식과정 사고 과정 그자체가 사실을 선택하는 과정이기때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면 세계에 대한 인식 그 자체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아야 한다. 자신의 패러다임이 뭔지를 인식하는 만큼 패러다임은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처럼 하나의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때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상은 그 패러다임의 노예로 강력한 제약에 빠져서 살게 된다.
무엇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은 엄밀하게 논리적인 것이 될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의 사고와 말은 모순적이고 애매모호하게 들릴 수 밖에 없는데 그 사람이 내 패러다임을 정확히 따르면서 대화해서 내 패러다임의 한계를 나에게 가르쳐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뉴튼역학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공간이 휘었다던가 시간이 늘어난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사람이 자기가 가진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개념을 붙들고 놓지 않을려고 할 때는 그렇다.
패러다임은 우리가 가진 무지를 숨긴다. 패러다임은 어느 쪽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느 쪽은 의미가 없는지를 알게 모르게 정의해 주기 때문이다. 물리학방정식만 푸는 사람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당황할 것이다. 물리적 방법이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있어서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리적 교육은 거꾸로 그런 주관적이고 사적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당신의 아내가 어떤 기분인가보다 태양의 무게를 측정하는 일이 훨씬 중요한 일인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
암시되어진것처럼 토마스쿤은 과학을 전공하고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과 접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은 과학이론도 막시즘이나 민족주의처럼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같아 보인다. 그리고 거꾸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우리가 사회적 변화에 대해 가지는 이해가 어떻게 변화하는 가를 토마스 쿤의 책을 통해서 이해하게 되는 면도 있다.
당신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믿는다면 그래서 그 이데올로기가 이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로 나쁜지에 대해 어떤 설명을 준다면 -그것이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싸움이든, 환경문제든, 자유시장의 문제든, 민족 정체성의 문제든- 그 이데올로기는 당신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주목하게 하거나 무시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믿는지를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게 좋다. 보이지 않는게 항상 더 중요하다. 우리의 무지가 존재하는 경계선이 어디에 있는지, 왜 나는 지속적으로 그걸 보지 못하는지를 사색하는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물론 과학자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닐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복잡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여러가지 미디어가 주는 내용은 증가하면서도 어떨 때 오히려 그 불확실성은 더욱 커 보인다. 이같은 것은 우리가 모두 어떤 패러다임의 계곡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을 크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개인적 행복이나 생활의 만족감의 향상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원에서 패러다임의 문제를 인식하고 끝없이 고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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