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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by 격암(강국진) 2011. 10. 31.

2011.10.31

부분과 전체는 양자역학의 아버지들 중의 하나인 하이젠베르크의 회고록내지 자서전의 형태를 지닌 책이다. 이 책은 김용옥교수의 형인 김용준교수가 번역한 책으로 서울대의 권장도서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나 자신에게 매우 깊은 감명을 준 책이기도 해서 많은 사람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곤 했다. 이 때문에 나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무렵에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하이젠베르크를 말하곤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 책은 매우 좋은 책이면서도 매우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책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로 이 책에 나오는 지식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의 아버지인 관계로 양자역학적인 사실들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물리학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에게는 많은 부분이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두번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본령은 형이상학과 윤리, 정치, 사회적 책임등 비물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즉 과학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철학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날에는 한쪽에 익숙하지만 다른 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종종 이 책이 읽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만약 읽기 쉬운 것을 좋은 책의 덕목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와 같은 것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며 어렵고 쉬운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 분명 많은 사람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책이 될 수도 있을텐데 내가 굳이 어렵다라는 말을 써서 잠재적 독자들을 겁먹게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흥분해 가면서 읽는 재미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 점이 바로 이 책의 핵심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면 우리는 하이젠베르크는 혁명적이론이라 불리는 양자역학의 아버지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보수적이며 책임감에 넘치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혁명과 변화를 꾀하려는 자는 기성의 질서와 지식에 대해 책임감과 성실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즉 이미 있는 이론, 기성질서로 최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끝에, 그러한 노력과 땀을 투자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변화와 혁명을 추구하고 말할 자격이 생기며 변화와 혁명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자이면서도 이런 문맥속에서 종교와 실증주의내지 실용주의적 철학에 대해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 미국식의 실증주의내지 실용주의철학은 하이젠베르크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양자역학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실용주의나 실증주의는 보어나 하이젠베르크에게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실증주의는 지나치게 우리의 시각을 제한해서 세상의 모든 것에게서 의미를 빼앗아 가는 경향이 있고 실용주의 역시 어떤 거대한 연관성에 대한 추구가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론를 추구하는 열정을 허무한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세상을 분리된 것으로 나눠서 각자의 경우에 대하여 적당한 관습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에게 종교와 과학을 분명하게 나눠서 이해하는 태도는 지속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과학적 발전을 그저 약간씩의 보정항을 첨부해서 근사치의 정밀성을 높여가는 공학적 개선과 비슷한 것으로 만드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한사람의 정신은 마치 그 논리적 무모순성이 꼼꼼히 점검된 수학체계 즉 뉴튼역학이나 유클리드기하학같은 이론들처럼 그 내부적 연관성이 확인되고 그 질서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태도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성실한 점검의 결과 부족한 것이 있을때 정신적 점프 즉 패러다임의 전환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하이젠베르크의 태도에 찬성하느냐 마느냐는 둘째로 치고 우리는 일단 그 성실성에 대해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양자물리학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여러가지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고 보고 듣고 그것들을 해석한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자기점검에 게으르다. 여성의 노동착취에 반대하는 젊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를 부려먹는 일에는 무관심하다던가, 탈세와 편법에 물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작은 의혹에는 크게 분개한다던가 하는 일을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이것이 과연 소수의 파렴치한 사람들의 일만이라고 할수 있을까. 그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있는 일일 것이다. 

 

부분과 전체가 복잡한 철학적 과학적 논의로 도배되다 시피한 책인데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에는 그러한 내용을 담은 전체의 형식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이젠베르크가 친구들과 동료학자들과 여러가지 논의를 하고 휴가를 보내는 방식에 대해 부러움을 표한다. 사실 전쟁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아 학교가 자주 휴교하는 상황에서도 도보여행을 떠나 플라톤의 철학이나 원자론등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고등학생들의 대화를 묘사하는 장면을 보면 존경과 부러움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이후에도 디랙, 보어, 파울리등과 세상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하는 장면 장면들을 보게 되면 그러한 논의 내용이상으로 그러한 삶의 형식자체에 매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책을 전부 읽고서 곰곰히 생각해 보면 하이델베르크의 삶은 어떤 신앙심깊은 수도사의 삶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그것이 반드시 통상의 기독교적 신과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이 세상의 모든것에 의미를 주는 전체적인 질서, 거대한 연관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찌기 플라톤의 책으로 부터 그리스사람들이 세상의 기본적 요소를 삼각형이나 다각형같은 도형으로 삼았다는 추상적인 내용을 듣고 의혹에 빠졌었다는 이야기로 그의 평생의 연구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책은 그가 평생 살아오면서 양자역학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세계대전을 통해서, 종교와 윤리에 대한 토론을 통해서 그같은 추상적인 원리를 찾고 싶은 소망에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으면 우리는 종교나 윤리, 가치에 대해 어떤 확정된 답을 얻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는 천재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철학자나 정치가나 종교인이 아니라 성실한 물리학자로 바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어떤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이론을 이 책에서 전개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여러가지 고민을 통해서 사람들이 쉽사리 빠질 수 있는 편견에 대해 저항하는 그의 모습을 그릴뿐이다.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주장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그 수단이 옳아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평화주의자이며 쉽사리 어떤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 역지사지에 능한 자신의 모습을 책속에 그릴뿐이다. 그것을 통해 뒷사람들은 생각을 하게 되고 다각적인 면에서 문제를 보는 자세를 가지게 된다. 

 

나는 책을 별로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에 읽고 그저 그의 낭만적 학문생활을 부러워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 충분히 좋았다고 느낀다.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에 읽었어도 나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 옛날 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하던 때 나는 내가 비로소 연구 커뮤니티에 가입하게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것은 주로 이 책때문이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세세한 과학적 철학적 논의를 따라가는게 아니라 그러한 것에 철저했던 인간 하이젠베르크를 느끼고 그 과정에서 마음을 단련하는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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