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중에는 독후감을 적는게 부적절한 형식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노자를 읽고'라던가 '성경을 읽고'같은 독후감 제목처럼 '바가바드기타를 읽고'라는 제목의 글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러나 그래도 이런 독후감을 적을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여 수년전부터 읽어온 바가바트기타에 대해 여기 몇 자를 적어본다.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의 성전으로 본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서사시라는 마하바라타는 시의 일부다.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고대왕국에서 벌어지는 왕자들의 모험을 그리고 있으며 바가바드기타는 그 내용 중에서도 하나의 전쟁이 시작하기 직전에 벌어지는 대화부분을 말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아르주나가 전쟁을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기려면 자신의 스승과 친인척을 죽여야 하는데 죽기도 싫지만 죽이기도 싫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의 조언자이자 신의 화신인 크리슈나가 전쟁에 나가 싸우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가바드기타의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 바가바드기타는 이런 표면적인 줄거리와 거의가 아니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다. 간디는 바가바드기타를 실질적인 행동의 지침서로 생각하여 그가 고민될때마다 다시 바가바드기타를 읽으며 답을 찾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택의 순간에 어떻게 우리는 행동하고 선택할수 있는가 하는 질문의 답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에 국한된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행동과 선택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표면적 줄거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슈나의 답은 도대체 뭘까. 그는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이해의 길이고 또하나는 행동의 길이며 마지막은 믿음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모두 다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집착없이 자신의 일을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다시말해 크리슈나의 답이란 집착없이 응당해야할 일을, 남이 뭘하는가를 신경쓰지말고 내가 뭘해야하는가에 집중해서 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다.
바가바트기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단순히 그것을 내버림으로써 완전의 지경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모든 행동은 자연의 성에 의하여 이루어 지는 것인데 나라는 생각에 자아를 어지럽힌 사람은 그것을 하는 것은 나다 하고 생각한다.
깨달은 자는 이 세상에서 제가 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이라 생각하는 것이 없고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 없다. 일체의 산 것 중에 어느 것에도 그의 이가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라. 집착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데 이르기 때문이다.
잘하지 못하면서라도 제 의무를 하는 것이 남의 의무를 잘하는 것보다 낫다. 제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으니라. 남의 의무는 무섭기만 할뿐이다.
그러나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듯 바가바드기타는 요약될수가 없다. 집착하지 말라라는 말을 결론으로 내민다면 이젠 도대체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총알은 그자체가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박정희대통령이나 링컨을 쏜 총알은 풍부한 의미와 결과를 가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집착하지 말라는 문장이나 집착이라는 단어 하나를 그 혼자만 따로 생각하여 보통 통상의 생활에서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의미대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때 그것은 바가바드기타의 집착과는 별 관계가 없고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윌리엄 텔이나 뉴튼의 이야기들에서 그 이야기를 듣지않고서는 그 사과의 의미를 알 수 없듯이 말이다. 하나의 세계관이나 패러다임은 마치 둥글게 이어진 체인처럼 시작도 끝도 없어서 어딘가를 시작으로 지목했을때 나머지와의 관계를 다 지목해야 그 시작 부분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집착이라는 말은 보통 나쁜 것으로 말해지며, 어떤 사람들이 뭔가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할때 우리는 흔히 집착을 버리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케이크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케이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을 한다면 그말은 통상 그 케이크를 잊어버리고, 그 케이크에 대한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고 없애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통상적인 의미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을 누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집착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는 말은 바가바드기타를 포함해서 여러 장소에서 지적되어 졌다. 불교에서도 장자에서도 그런 메세지가 있다.
그중 불교에서의 유명한 일화는 이렇다. 여자를 접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수도승이 물길을 건너지 못하는 여자를 만났다. 한 수도승은 여자를 접촉하지 않는 계율을 지켰지만 다른 수도승은 그 여자를 업어 물을 건너 준다. 그리고 길을 가는데 첫번째 수도승은 계율을 어겼다고 두번째 수도승을 나무란다. 그런데 그 두번째 수도승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그 여자를 내려놓은지 오래인데 너는 아직도 그 여자를 내려놓고 있지 못하구나. 이것은 누가 그 여자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가에 대한 일화다.
그럼 진짜로 집착을 없애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접촉을 삼가하고 참으면 그에 대한 욕망이 줄어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집착이 사라지고마는 것은 크나큰 진리 혹은 신을 만남으로서 가능하다.
보통 이성적인 논의는 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끝장이 나고 마는 법이다. 신이라는 말에는 너무도 많은 선입견이 붙어있다. 그러니까 신이라는 말을 일단은 잊어버리는 게 좋겠다. 나는 신이라는 말대신 더 커다란 이야기나 문맥이라는 말을 집어넣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 나무로 만든 통로를 달리는 쥐가 있다고 해보자. 이 쥐가 갈림길을 만났다.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쥐는 고민한다. 그런데 그 쥐를 위에서 쳐다보는 사람에게는 그 고민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고민처럼 보인다. 미로에 갇힌 쥐는 위나 아래방향은 보지 않는다. 그 쥐는 통로를 이루고 있는 나무판을 부수거나 그것을 넘어서 그런 통로를 완전히 무시하고 달리는 길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답은 왼쪽이 아니라면 오른쪽이고 오른쪽이 아니라면 왼쪽이 되는 것이다.
이 쥐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가 이 쥐와 같았던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대개 옛날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만 초등학생일 때나 청소년이었을 때 일기를 썼던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일기를 꺼내어 다시 읽어보면 우리는 한마리 쥐와 같았던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면 유달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도 그런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난처한 선택의 순간에서 어쩔 줄 모르고 분노했고 뭔가에 집착했었다. 우리는 마치 어리석은 쥐처럼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수 많은 선입견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한 제약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우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좌절했으며 분노도 했다. 한마디로 우리의 세계는 좁았던 것이다.
집착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선택들이 그것을 한다와 안한다 둘중의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한다는 것의 의미 혹은 우리가 뭔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를 더 큰 틀에서 이해 할 필요가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뭔가를 하건 하지 않건 그게 핵심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여자를 접촉하는 것에 대한 계율을 노예처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왜 여자를 접촉하는 것에 대해 계율이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단 이해가 있고 나면 거기에는 지켜야 할 법이 없다.
피아노가 정말 가지고 싶었는데 그걸 가지지 못해서 죽을 것같은 것은 아직 인생이 굉장히 넓고 복잡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피아노를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은 잘못된 것이 없고 심지어 그걸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에도 잘못된 것이 없지만 성숙한 어른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본후에도 안된다면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계속해 나갈 것이고 미숙한 어린애는 피아노에 집착해서 종국에는 피아노를 가질 수 없다면 내 인생을 모두 파괴하겠다는 식의 행동을 보일수 있다. 어린애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어린애는 아직 삶에는 그가 경험하지 못한 놀라움이 아주 많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미로에 갇힌 쥐처럼 왼쪽 아니면 오른쪽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집착을 없애는 것으로 돌아가보자. 진짜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는 더 큰 문맥, 더 큰 이야기를 봐야 한다. 하나하나의 법, 하나하나의 사물에 대해 모두 분별을 없이 하고 더 큰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파악할때 우리는 하나 하나의 집착들을 모두 없애게 된다. 결국 모든 집착이 사라지는 단계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거대한 질서와 문맥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가능해 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그것은 이제 말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에 기반해서 그것이 설명되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말할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것일 때 우리가 그 이름을 뭐라고 부르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도라고 부르거나 불성이라고 부르거나 태초의 혼돈이라고 부르거나 궁극의 불확실성이라고 부르거나 우리의 무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성을 넘어 있는 것이며 오직 우리의 영감, 직감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것과 접하게 된다.
집착을 버리는 길은 집착이란게 뭔가를 이해하는 길이며, 세상과 접촉하고 행동하면서 세상의 풍부함을 느끼는 길이고,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길이다. 눈앞에 분명히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있어도, 우리가 스스로를 미로속의 쥐처럼 느끼게 되는 파국이 우리앞에 있어도 그것은 우리의 무지에 따른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있을때 우리의 정신은 소모되지 않고 헤매지 않으며 우리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마음이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물론 현실에 있어서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담배나 아이스크림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족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이 이왕이면 남들보다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는가?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도 현실에는 집착이 된다. 어떤 때는 어떤 사람이 지금 존재하는 대로의 그 사람이 아니고 조금만 다른 사람이었면, 정말 조금만 달라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하고 쉽게 아프지 않게 세상을 살아갈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도우려고 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이 안타까운 나머지 그나 그녀를 바꾸기 위해 어떤 인위적인 것을 하려고 할때 상황은 사실은 더 나빠질 수 있다. 세상에는 자식을 다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한다면서 그 자식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공부를 시키는 부모가 있다. 세상에는 자신의 연인을 사랑한다면서도 그 연인을 바꾸려고 괴롭힌 나머지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한국을 사랑한 나머지 한국을 바꿔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결국 한국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그 한국에 대한 원망에 빠지고 마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사랑하면서도 집착하지 않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평생에 걸쳐 노력한 어떤 결과물에 대해 집착하지않고 그것이 그저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적당한 수준을 넘어 거기에 집착하지 않지 않고 쉽게 손을 털 수 있을까. 재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 차라리 쉬울 것이다. 필생의 작업이란 뒤집어 말하면 그가 그만큼 그것을 사랑하고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치 자식처럼 말이다. 그렇게 사랑한 것을 집착하지 않고 버리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쉬울 리가 없다. 열심히 살면서 집착하지 않기란 마찬가지로 어렵다.
바가바드기타는 그래도 말한다. 최선은 집착하지 않고 행할 수 있을때 생긴다고. 결과에는 상관하지 말라고.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넓혀나가고 집착을 덜어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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