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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노자를 읽고 : 합치는 힘의 소중함

by 격암(강국진) 2011. 11. 9.

바가바드기타에 대해 어제 썼는데 이번에는 노자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자. 물론 바가바드기타처럼 그 내용을 전부 말한다기보다는 노자에 대해 한자락의 말을 해서 노자에 대한 감상을 한줄기 남기는 정도가 될것이다.

 

 

 

 

 

나는 노자를 상당히 여러번 읽었다. 노자를 좋아해서 노자의 번역본을 여러권가지고 있기도 하다.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로 시작하는 노장 1장에서 노자 81장까지를 틈틈이 여러번 읽었던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잠시 생각을 해봤다. 내가 노자에 대해서 한마디만 하자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그것은 노자는 합치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과학을 포함한 서구의 환원주의 지식이 잘 보여주듯이 모든 지식은 그 본질이 나누고 분류하는 것에 있다. 실제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곳에서도 구체적으로 뭘하는가를 들여다보면 결국 데이터를 분류하는 능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인공지능이다. 잘 분류하면 그것이 좋은 지능이고 잘 못 분류하면 그것이 나쁜 지능인 것이다. 너는 중국인 나는 한국인하는 것도 분류고 너는 고릴라 나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위와 아래, 뜨겁다와 차갑다, 아름답다와 추하다는 개념이 모두 그렇다. 

 

이렇게 나누고 분류하는것이 안다는 것의 시작이고 지식의 시작이다. 그런데 유명한 노자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도라고 표현된 도는 영구불멸의 도가 아니고 이름지어 표현된 이름 또한 영구불멸의 이름이 아니다. 

 

즉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구불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편리한 지식을 주고 도구가 되지만 그것은 그것나름의 문제가 있다. 나누는 것은 서로간의 차이만을 보게 만들기 때문에 물체들, 사람들간에 일종의 원심력만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원심력만 있고 구심력이 없다면  그런 물체는 산산히 부서져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우리가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이라는 분별을 만들어 내면 그 분별에 따라 차별이 생기고 차별은 조선민족이라는 집단안에서 구심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너는 짐승이요 나는 사람이다라는 차별을 만들어 내는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은 얼마든지 죽여도 되고 인간생명만 중요하다라는 식의 생각을 믿기 쉬워진다. 

 

이것은 단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짐승간의 차별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국민소득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우리가 얼마나 부자인가를 측정한다던가 우리가 소유한 돈을 가지고 우리가 얼마나 부자인가를 측정한다고 할때 그러한 분별, 그러한 견해가 그 자체로 뭔가를 잊혀지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이 것이 중요하면 저 것이 안 중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구심력은 나누는 것으로 만들어진 분별을 지우고 잊게 하는데서 만들어 진다. 즉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나눠지지만 사실은 나눠진 것이 아니라 이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어짐을 잊지않고 만물을 이으려고 하는 사람은 구심력을 발생시키는 고마운 존재다. 그사람은 이게 이거고 저게 저거다라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보다는 우리가 모두 하나이며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일깨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이 사람은 의식적으로 하는 일은 오히려 없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의식적으로 한다는 것은 지성을 발휘하고 논리를 발동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나누는 행위고 합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농민은 이러하고 노동자는 이러한데 독재자는 이러고 자본가는 이런다는 식의 논법은 노자의 사고가 아니다. 그런 나누는 힘은 죽이는 힘이다. 나누는 힘은 죽이는 힘이고 합치는 힘은 살리는 힘이라 나누지 않는 시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하면서 모든 것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정신이다. 

 

노자의 유명한 문구는 대도무문이라 도를 따르는 사람은 큰 길을 가건만 세속의 사람들은 빠른길, 샛길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의 사람들은 나누고, 계산하는 것의 득만 생각할뿐 해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발한 방법은 때로 편하게 모든 일을 이루는 빠른 길인것 같으나 그 길 속에서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쉽고 실은 더더욱 큰 위험속에 우리를 집어넣는 일이 되기 쉽다. 머리를 돌려 계산을 한번 할 때마다 우리는 실은 어떤 것을 무시하게 된다. 어떤 계산도 세상 모든 것을 포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산에만 자꾸 의존하다보면 계산은 모두 잘맞는데 지나고 보면 나에게 남은게 없는 이상한 일이 생긴다. 

 

길게 보면 결국 기발한 방법이 아니라 큰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누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도를 따르는 사람을 비웃기 마련이다. 그래서 도는 미련한 사람들에게서 비웃음을 받고 도를 따르는 사람은 나만 홀로 우둔하고 멍청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노자가 말하는 정치도 그래서 나누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노자의 한구절을 인용해 보자

 

통나무가 잘리고 쪼개져 흩어지면 그릇들이 되는 것이니 

성인은 그것을 이용하여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는도다.

그런고로 큰 정치는 쪼개지 않는 법이다.

 

인간사회가 평안한것은 그 근본이 인간들의 조화에 있다. 그런데 그 조화에 자꾸 지식을 가져다대기만 할 뿐 합치는 것을 잊으면 인간사회는 지식때문에 더 잘살게 되는게 아니라 지식때문에 더 불행해 진다. 자본주의란 것이 만들어낸 피라미드만 봐도 우리는 그걸 알수가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다고 하는 것이 극소수의 사치를 부리는 사람을 제외하고 나면 끔직한 삶을 사는 사람을 엄청나게 늘리게 되는 일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아무 것도 나누지 않는 것은 그럼 어떤 것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위인가.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아니라 집착없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사실 세상은 끝없이 변하는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게 없다. 우리는 지적인 판단에 빠지고 어떤 값싼 이데올로기에 빠지는 대신에 나누기 전의 상태에 머무르고 그 중간을 지켜서 우리가 응당해야할 일을 느껴서 그렇게 하는 것. 그게 무위다. 흥하면 망하는 것이고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선약수라 물처럼 자기를 필요로 하는 낮은곳으로 흐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무위의 행위다. 

 

그러자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통상의 상식이나 다른 사람들의 계산과는 다른 길일수도 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 

 

무위의 논리나 무위의 과학이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심력이 없으면 원심력이 모든 것을 망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것이다. 즉 우리가 무위의 정신을 마음속에 가지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지킬수 있는 힘이상으로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지식과 논리에 의해서 처리하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즉 가장 발달된 과학문명은 오직 그에 상응하는 구심력을 발휘하는 힘과 같이 존재할때만 자기 파괴적인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구를 보면 서구는 기독교 신앙이 너무 강하던 시대에 과학문명이 자라나왔다. 기독교라는 구심력이 있기에 과학문명은 사회를 망가뜨리지 않고 개개인의 정신을 망가뜨리지 않을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쇠하고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서구사회는 문명적 위기를 겪게 된다. 끝없이 분별하는 힘은 잔혹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극한까지 밀어부친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런 위기속에서 동양문명에 도움의 손을 뻣는다. 인도의 신비주의나 동양의 불교가 서구에서 인기를 끈지 백년이 훨씬 넘었고 1960년대의 히피운동도 그런 동양문명에게 의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유명록커가 인도를 방문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근간에 사망한 스티브잡스도 인도에서 신비주의 그루를 스승으로 모신 일이 있다고 한다.

 

지금 세계가 문명의 종말이니 자본주의의 쇠망이니 하는 이야기에 빠져있다. 신뢰의 붕괴란 결국 지나치게 나누는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럴때 우리에게 있는 합치는 힘의 전통을 우리는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우선 먼저 그것으로 우리의 정신을 하나로 뭉쳐둘수 있고 그것으로 가족을 지킬수 있고 그것으로 한국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합치는 것의 소중함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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