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는 하버드대학의 철학교수이자 저명한 수학자로 버틀런트 러셀과 함께 수학의 원리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 책의 처음에는 화이트헤드 사후에 그에 대해 전미국대법관이었던 펠릭스 프랭크 피터가 쓴 소개글이 있는데 그는 화이트헤드를 그가 알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대학교육에, 특히 하버드대학의 교육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인물로 기억한다고 말하고 있다. 화이트 헤드는 과정철학으로 20세기에 가장 저명한 철학자중의 하나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책은 왜 읽어야 하는가.
화이트헤드가 이 강연들을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90년에서 백년전쯤의 일로 그 내용을 보면 주로 미국에 대해서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이렇게 낡은 옛날의 이야기를, 그것도 남의 나라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그가 미국의 수학교육이나 고전교육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는 부분은 잘 새겨들으면 나름대로 배울 부분이 있지만 동시에 한국의 교육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책을 읽지 않은 한국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소개하고 싶어졌다. 그것은 백년전의 듀이가 그렇듯 화이트헤드도 21세기 한국사회의 교육이 어디에서 잘못되어져 있는지 아주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책은 대개 매우 난해하다. 특히 그의 대표작 과정과 실재는 매우 난해해서 도올 김용옥은 그가 알고 있는 책중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행한 여러강연을 주로 모아놓은 것으로 다른 책에 있는 그런 난해함이 별로 없다. 철학의 난해함을 피해서 화이트헤드의 사고를 따라가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좋은 소개서가 되지 않을까 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는 교육의 목적은 교양과 전문지식을 겸비한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하며 특히 교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교양이란 사고력의 활동이며 아름다움과 인도적 감정에 민감한 감수성인데 교육이란 특히 이런 교양을 배양해 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화이트헤드의 소개는 자칫 그의 의견을 지루하고 형식적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들리게 만든다. 우리는 우선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교육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이며 혹은 인간 사회가 모두 하나의 유기체 혹은 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옳다.
하나의 유기체나 생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생명의 성장에는 리듬이 존재하며 상호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리듬과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안에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생명을 지켜보는 따뜻한 시선을 잊지 말 것을 거듭 말하고 있다.
즉 교육이란 자동차 부품을 가져다가 조립해서 하나의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과정같은게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려고 하는 하나의 생명체가 보다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주는 것이며 이런 과정은 같은 원리가 반복적으로 적용되게 되어 4계절처럼 리듬을 가지고 반복되어지는 것이다. 교육에는 규율도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자유도 있어야 한다.
교육의 3단계
그는 우선 헤겔의 정반합이라는 것이 마음에 썩드는 리듬의 표현이 아니라고 말하고 스스로 로맨스의 단계, 세밀화의 단계, 일반화의 단계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성장의 단계를 말한다. 헤겔의 정반합이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지는 것이듯 그의 3단계도 인생에 한 번 있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인식의 단계-데이터 축적의 단계-일반화의 단계로도 말할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인식의 단계란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는 단계다. 이것은 우리의 세계가 확장되어지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고 하나의 유기체가 자기의 벽을 허물고 보다 더 큰 유기체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단계로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연애나 고전읽기나 과학이나 어떤 스포츠의 세계가 매력적이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고 해보자. 전에는 그것들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신은 문득 그것들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것은 당신이 요즘 스스로의 삶이 지루하다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혹은 당신은 이제 그런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로맨스의 단계고 인식의 단계다.
세밀화의 단계는 그 인식이 계속되어 더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단계다. 로맨스의 단계 혹은 인식의 단계에서 당신은 서투른 초보자일 뿐이며 아직 과거의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경험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얻지 못한다. 책읽기라면 당신은 아직 어느 책이 재미있는지 어느 책은 재미없는지 감을 잡지 못해서 어떤 때는 재미를 느끼지만 어떤 때는 시간만 낭비하고 말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밀화의 단계 혹은 데이터 축적의 단계에 이르르면 당신은 이제 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당신은 빠르게 정보를 축적한다.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실패는 사람들이 주로 교육이 세밀화의 단계와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즉 교과서나 책을 통해 많은 지식을 한꺼번에 주입받는 행위가 교육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밀화의 단계는 로맨스의 단계를 거친 경우 통쾌하고 즐거운 것이 된다. 그리고 유기체의 성장의 경우는 빠르게 몸이 부풀어 오르는 단계다. 그러나 이런 세밀화나 데이터 축적은 영원히 계속될수 없다. 결국 경험의 양이 너무 많아지면서 당신은 이제 혼돈을 느끼게 된다.
일반화의 단계는 말하자면 지식압축의 단계다. 세밀화의 단계를 통해 배운 것들은 일반론적 이론을 통해 압축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까지 축적한 경험과 지식들을 모두 일반론적인 이론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는데 성공하고 나면 개개의 경험들은 일반론적 지식의 한 예에 불과하게 되고 다시 혼란스런 머리는 정돈을 이루게 된다. 이 일반화의 단계가 오랜동안 지속되면 다시 사이클이 시작된다. 삶은 지루해지고 우리는 다시 새로운 것을 인식하고 흥미를 느끼는 로맨스와 인식의 단계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최소한의 것을 최대한 가르쳐라
화이트헤드는 최소한의 것을 가르치되 잘 가르치라고 말한다. 그것은 학생이 너무 많은 지식과 자극에 노출될 경우 그 안에 있는 새로운 것을 인식하고 흥미를 가지는 로맨스의 단계로 들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숨은 그림찾기책에 월리를 찾아라라는 것이 있다. 그림안에는 월리가 있지만 너무나 많은 다른 그림들이 있어서 우리는 월리를 좀처럼 찾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지식이 학생에게 보여질 경우 학생은 거기서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진정한 성장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잘 가르친다는 것은 최소한의 것들이 가지는 상호관계와 결과에 대해 여러모로 공부하게 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일반화의 단계를 생각하면 쉽다. 배워서 지식이 증가했지만 그것을 여러모로 공부하고 되집어봄으로해서 머릿속에서 일반화가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각각의 지식이 그저 각각 외워야 하는 머릿위의 짐처럼 존재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체화되게 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생명이나 유기체를 거론하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다. 교육이란 어떤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고 교육시키려는 주체와 그 대상이 서로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다. 즉 학생이 배워야하고 배우고 싶어질만한 것을 느꼈을 때 꼭 필요한 만큼 그것을 제공하고 소화하게 만드는 과정이 교육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모든 학생들은 서로 다른 리듬을 가지고 공부하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 이상적이다. 다만 교육현실상 완벽히 그렇게 하지 못할 뿐이다.
그는 생생한 예를 보여주면서 추상적인 것을 너무 많이 가르치는 것에 반대한다. 아이들은 접촉을 통해 배운다라는 샌더슨의 말이 교육의 진리라고 말하면서 그는 배우려고 하는 대상과 직접적으로 가까운 접촉을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감각적으로 느끼고 생생한 일상의 예를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배우는 사람이 유용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외국어의 중요성
화이트 헤드는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가 함께 작동해서 이뤄내는 효과를 강조하면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언어가 각종 중요한 책들을 읽고 이해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러가지 언어를 알고 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친숙한 사고방식과는 다른 것을 접하게 만듬으로서 최종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국에만 살면서 한국의 것만 알고 있는 경우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당연한 것, 원래 그런것으로 안다. 그런데 영어나 일본어나 중국어를 습득하고 책을 읽고 그 문화를 접할때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체험하게 되고 그런 여러가지 다른 방식의 체험을 통해서 바로 평상시에는 잘 보지 못하던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사고능력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외국어를 배움으로서 우리는 철학을 배우는 기본적 경험을 습득하며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그저 번역되어진 추상적 관념적 단어들로 배운 철학이며 문학은 아무 쓸 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이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연구와 교육을 행하는 장소가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라면 대학은 불필요하며 대학이 쓸모 있는 곳이 되기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대학에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대학이란 지식과 규율에 익숙해진 기성세대와 새로운 상상력에 가득 차있지만 경험이 부족한 새로운 세대가 만나는 장소이다. 때문에 신세대의 상상력을 불지필 수 있게 한다라는 것이 대학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고 그렇지 못할 때 대학은 아무 쓸모가 없다. 대학은 진보적 활동을 하나의 효과적인 진보적 수단과 융합하기 위한 주요기관이다.
문제는 대학을 만들고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이와 같은 점이 지켜지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대학교수들은 논문쓰느라 바쁘고 평가받느라 바뻐서 결코 상상력따위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에 억눌린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열정과 상상력을 꺼뜨리고 말기 쉽다. 화이트헤드는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회사의 예를 들면서 거기서 말단 사원의 상상력이 얼마나 꺼지기 쉬운가를 말하고 있다.
한국의 현실
내가 위에서 쓴 것들을 읽으면서 한국의 현실이 화이트헤드가 비판하는 것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을 할지 모르겠다. 우선 입시위주의 공부를 하는 초중고는 물론이고 대학에 있어서도 화이트헤드의 시각으로 보면 한국에는 교육이란게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교육이란 인간의 성장이다. 전문적 지식과 감수성을 겸비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무한대로 상호연결없이 쳐넣어지는 잡다스런 입시용 지식들은 아이들이 일찌감치 로맨스의 단계를 포기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한국은 뭔가를 생각하고 느끼기에는 너무 유해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공부만 그런게 아니다. 어른들 사는 모습도 그렇고 방송매체도 그렇다. 한국에서는 유치원생이 주가이야기며 다이어트 이야기한다는게 농담만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정보중독에 걸려있다. 그것은 어느정도 사회적 불신이 커서 그렇다. 신문방송이나 인터넷에서 아이들 유괴나 FTA나 광우병이나 주가나 부동산 등락에 대해 떠들면 모두가 거기에 매달리고 아이들까지 빠져든다.
최소한의 것을 최대한 잘가르치라는 화이트헤드의 주장과 정확히 정반대로 행해지는 것이 바로 한국의 교육이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입시용으로 잡스런 지식을 과다하게 머릿속에 넣는 것은 물론, 여기저기서 온갖 것에 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은 데이터 축적의 단계만 무한반복하는 인간으로 가치판단이 이상하고 자신이 축적한 데이터만 굳게 믿는 어리석은 인간형이다. 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들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지식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일반화의 과정을 통해 어떤 세상을 보는 철학의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그 잡스런 지식들은 백해 무익으로 자신이 안다는 착각에 빠지고 자신이 뭘 모르는지는 모르게 만든다. 박스바깥의 생각이 안되고 소위 창의력이나 상상력도 모범답안을 외워서 해결하려고 한다.
교육의 핵심에는 결국 인간적인 교류가 존재한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적 시각이라면 한국교육은 인간적 교류가 불필요하다. 선생님은 어차피 동영상 강의와 같은 존재다. 학생을 느끼고 학생이 필요한 만큼만 지식을 주고 흥미를 이끌어내는 교육은 존재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만큼 참을성을 가진 부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항상 당장 다음시험은 어떻게 할꺼냐는 질문만 남는다.
한국의 대학은 어떤가. 화이트헤드적 대학이란 항상 학생이 먼저 질문을 가지는 것이다. 우주로 가고 싶다거나 로보트를 만들고 싶다거나 병을 고치고 싶다거나 그리스철학이 현대인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싶다거나 하는 욕망을 가지고 그 수단을 찾는 것이다. 학생이 그렇게 하고 교수가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장소가 바로 상상력이 발휘되는 대학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이란 학생들을 뜨겁게 만드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취업이나 졸업장과 관련이 없다고 할때 그래도 학생들은 어떤 교수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설명하는 것을 들으며 정말 이거 멋지구나 나도 이거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까? 교수가 가지는 학문에 대한 동기의식의 근원에 있는 욕구와 질문이 나의 그것과 같다고 느낄때 우리는 그렇게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고작해야 월급봉투나 직업적 안정감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은 정확히 봉급만을 위해 회사다니는 말단직원의 마음인 것이다. 관심은 취직이나 돈에 가있는데 무슨 상상력이 발휘되겠는가. 한마디로 학문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없는데 말이다.
맺는 말
이 책 교육의 목적에는 과학에 대한 몇가지 글들이 더 있지만 교육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것같지는 않아서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교육의 문제는 단순히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며 사회문제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학생이며 가끔은 누군가의 선생이기 때문이며 인류나 하나의 공동체사회는 집단으로서 학습과정을 마찬가지로 통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도 집단으로서 로맨스의 단계-세밀화의 단계-일반화의 단계를 겪으면서 변해간다고 생각할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란 사회의 문화는 하나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런 단계를 겪으면서 시각을 넓히고 보다 능력있고 포용력있는 문화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어떤 사회적 문제로 망가질때 -지나친 종교, 이데올로기의 맹신이나 전쟁, 식민지 지배등으로- 문화는 병들게 되고 만다. 소화불량의 상태에 빠지거나 무기력증이 오게 된다. 바로 이것이 철학하는 사람들이 교육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게 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계속 배우는 사람이며 어떤 사회의 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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