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물질을 읽고
쉬뢰딩거의 더 유명한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함께 출판된 정신과 물질이라는 책을 최근에 다시 읽었다. 사실 두 책은 한 책으로 묶여져 나와 번역되었으나 독후감은 각자 쓰기로 한다. 나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읽은 바있다. 그러나 이번에 읽으면서 매우 큰 흥미를 느꼈으며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보다 이 책이 더욱 의미있고 중요한 책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심적 질문
이 책은 하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한 쉬뢰딩거의 지적인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그 질문은 이 세계는 통상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객관적 세계가 아닌데 그럼 그 세계는 어떤 곳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매우 근본적인 것이라서 많은 근원적 질문이 그러하듯 사실 질문에 대한 답보다도 이 질문 자체를 왜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답은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이 옳다면 성실한 지적인 추구를 한 기록은 어떤 것이든 가치가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습니까라고 한다면 그 답은 통상 어떤 것일까. 많은 현대인들은 빅뱅이론 같은 것과 원자론을 토대로한 세계를 말하고 뉴톤역학이나 양자역학적 원리를 말하면서 이 세계란 이런 곳이다라고 말하고 그것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는 사실이 아닌가 하고 답할 것이다.
그 답은 문맥에 따라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왜냐면 이 책에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수준은 과학의 한계 수준이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 관찰의 결과를 논하기 전에 과학이 과학으로서 작동할 수 있는 기본적 가정과 전제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에 과학만으로 답할 수 없는 철학적 질문, 종교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만든 이 천재 물리학자의 설명은 결코 내적 직관이나 종교적 감수성으로 비약하는 답이 아니다. 그는 대부분의 경우 과학적 관찰과 결과로 논증을 해나간다. 그러면서도 그가 말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과학이 아니다. 그보다는 과학이 과학이기 위한 기반을 과학적 결과로 이야기한다고 해야 할것이다. 즉 과학의 최첨단에서 지적인 탐구를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쉬뢰딩거는 이 책에서 말하는 과학이란 서구과학을 의미하며 그것은 유일한 과학이 아니고 과학은 다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존 듀이가 철학의 재구성에서 하고 있는 주장과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그의 이러한 탐구는 얼마나 학문의 최첨단을 달리는 것이었을까? 이 책은 1956년에 캠브리지에서 행한 강연에 기반한 것이지만 그의 탐구는 21세기 최첨단에서 겨우 연구되는 대부분의 의식의 연구들에 비해 오히려 더욱 근본적인데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많은 의식에 대한 연구는 그의 논의에 비하면 비본질적인 부분을 헤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의 논의는 천재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그러하듯이 반세기정도의 과학발전으로 능가하지 못하는 뛰어남을 가진 것이다.
물론 이 작은 책에서 그가 마음 혹은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종적 설명을 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고려되어야 하는지, 과연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반세기 정도의 간격을 가볍게 뛰어넘는 것이다.
체험과 과학적 설명
물론 반세기 동안의 과학적 연구에 따라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과학적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논의가 그런 발전 이전의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책에서 마지막 장에서 다루는 감각적 체험과 과학적 설명에 대한 논의를 조금 이야기해보자.
물리학적으로 말해 노란색의 빛이란 특정한 파장을 가지는 전자기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뇌나 눈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런 파장의 빛이 어떻게 망막에 있는 세포를 자극하며 뇌신호가 어떻게 전달되며 그것이 뇌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통과하고 전파하는가에 대한 연구를 할 수가 있으며 실제로 지난 반세기동안 그런 연구가 행해졌다. 그러나 쉬뢰딩거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러한 것이 우리의 감각적 체험자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사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과학의 방법론으로는 백년을 더 연구해도 그렇게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옳다.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기관에 대해 연구를 더 해나갈수록 이러한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기만 할 뿐이며 쉬뢰딩거는 이러한 것을 시각과 청각 등 여러가지 감각기관에 대한 과학적 사실들을 나열함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예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뭔가를 보거나 들으면 그것을 실체로 생각한다. 즉 빨간 공을 보면 빨간 공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전자는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색깔이 없다라는 것은 투명하다거나 하얀색을 말한다. 그러나 색이란 전자기파의 성질인데 전자는 바로 그 전자기파를 만들어 내는 입자다. 마치 원자 한 개의 온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개념상 혼돈이 있듯이 전자의 색을 묻는 것은 개념상의 한계에 이른다. 이런 한계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는 감각적 세계, 생생한 세계로 생각되는 이 객관적 세계가 분명히 환상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미 밝혀진 과학의 한계안에서도 말이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빛을 본다. 왜 그럴까? 혹시 박쥐의 마음속에서는 소리를 보고 있지 않을까? 우리의 감각적 체험이란 객관화라는 과학의 전제조건을 통과해서 이야기 될 수 없다. 체험은 항상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관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는 것에 대해 쉬뢰딩거는 주관이 대상이 될수 있도록 과학자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객관화란 데카르트가 떠올려지는 마음과 물질의 이분법에 관련된 것으로 우리가 행하고 있는 관찰의 주체를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작업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거꾸로 관찰의 주체인 마음에 대해서는 과학은 설명할 능력을 상실한다. 이 점을 잊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란 그래서 사실 근거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관찰해서 그걸로 세계에 대한 설명을 만들어 내려면 우리는 먼저 그걸 관찰하는 주체가 일관성 있게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누군가가 비디오 카메라로 세상을 찍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화면 속의 세상이 마구 흔들리다가 컴컴해 진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라고 하려면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서 카메라를 마구 흔들거나 손으로 카메라 입구를 꺼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쉬뢰딩거는 이미 이러한 것은 칸트에 의해 부분적으로 지적되어졌다고 말하며 세계와 마음간의 구분의 불가능성은 원천적인 불확실성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즉 우리가 뭔가를 관찰했을 때 그것이 세계의 성질인지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 마음의 성질인지를 원천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식에 대한 통찰
쉬뢰딩거의 책은 사실 우리의 의식과 윤리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되어 진화론적 논의로 이어진다. 우리가 창문을 열고 바깥을 본다고 하자. 거기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잔디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세계의 전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이러한 세계의 객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세계 자체를 보고 듣는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정보를 우리의 마음이 해석하고 우리의 마음이 가지는 성질과 섞어서 그 일부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의식위로 올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는 즉 우리의 의식이 없어진 상태에서는 소리가 들려와도 우리는 그것을 듣지 못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지만 그것이 일상적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이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의 편리하고 그럴듯한 이론에 불과하다.
그럼 의식의 불은 왜 켜지고 이 세계는 왜 우리앞에 나타나는 것일까. 쉬뢰딩거는 의식은 오직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성에 마주치는 학습의 상황에서만 생겨나며 학습이 완벽해지면 꺼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심장은 무의식적으로 뛴다. 우리는 걸음을 걸으면서 근육의 움직임을 모두의식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쉬뢰딩거는 우리가 윤리적 갈등을 겪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학습하지 않은 상황 즉 습관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상황에 부딪히기 때문이며 윤리적 판단은 우리의 행동패턴을 결정하고 이것은 결국 인간의 진화에 연결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초적인 자기는 조상으로부터의 물려받아진 기억이다. 이 기억과 의식상태에서 싸우면서 행동을 결정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재창조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행동이 진화를 결정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소위 라마르크적 진화지만 이걸 미신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다. 이렇게 말해보자. 우리가 사막에 사는 문화를 가진다면 사막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그러면 사막에 살기에 적합한 유전적 돌연변이가 자연선택에 의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즉 사막에 적응한다는 부모의 획득형질이 바로 유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의 행동패턴이 자녀의 환경을 결정해서 유전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어떤 가치관과 윤리를 가지고 사회를 유지해 나갈때 그것이 심지어 인류의 미래 진화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비전에까지 이르게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개인적으로든 인류적 차원에서든 매순간의 윤리적 가치적 판단에서 우리를 새로운 상황에 놓고 변화시켜가는 것이다.
큰 과학자의 글쓰기
이미 백년전에 화이트헤드는 학자들의 전문화가 문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요즘엔 어떠할 것이며 더구나 외국에서 이론을 수입하기 바뻣던 한국의 학문은 어떠할 것인가. 쉬뢰딩거의 짧은 책을 읽고 있으면서 이런 과학자 혹은 지식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요즘에는 너무나 많이 전문화된 전문가만 많아져서 오히려 그 사고의 규모가 백년 전보다 못해진 경향이 있다.
쉬뢰딩거는 유전자가 2중나선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되기 전에 물리학자로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썼으며 의식의 과학적 연구가 21세기초에 활발해지기 반세기전에 마음과 물질이라는 책을 썼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사고의 한계에서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면서 사고 하는 책이다. 때문에 그 답이 최종적이고 완전한 것이 아니더라도 아주 근원적인 과학적 발전을 기대하게 만들 수 있는 사고 인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이미 나온 상황에서 한사람은 자동차의 개량을 생각하고 또 한사람은 로봇을 생각한다면 그 발전가능성, 잠재력의 차이가 어떨것인가. 물론 쉬뢰딩거 같은 천재가 흔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으나 그저 논문 한편 더 써서 평가 찾기에 바쁜 요즘 학자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단순히 천재니까 이럴 수 있는거지라고 말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심하게 말하면 이렇게 작은 학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계속된다면 학문의 발전은 중단되어서 서구의 중세시대나 조선시대 말엽의 성리학자들의 상황과 비슷해 질지도 모른다. 모두들 전문화의 계곡속에 빠져들어가 헤어나올수 없는 함정을 스스로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고 커다란 스케일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며 특히 한국의 이공계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다만 이 책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이공계 대학생이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의 학문적 풍토가 이렇지 않기 때문이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유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가 대학원때 쉬뢰딩거의 이 책을 읽었다는 서문을 읽으면 더더욱 그렇다.
맺는말
이 책은 매우 밀도가 높다. 즉 양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생각할거리를 주고 과학적 수학적 예도 풍부하다. 진화론에 대한 논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대한 논의, 플라톤과 칸트에 대한 논의나 감각기관에 대한 풍부한 과학적 사실만 해도 매우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되고도 남는다.
이 책의 가치는 또한 그러면서도 과학을 넘어 윤리와 가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서점에 가면 많은 책들이 과학과 윤리, 과학과 마음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읽어본 중에서 가장 알찬 책이라고 생각되어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책 속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해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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