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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장자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2. 6. 9.

2012.6.9

 

노자나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소개글을 쓸때도 말했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 소감문을 쓰는 것은 마치 시같은 문학작품을 읽고 그것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주저가 되는 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읽고 좋아하면서도 정작 소개의 글을 쓰게 되지는 않게 된다. 따라서 장자의 소개를 읽고 장자를 읽은 것과 혼돈을 일으켜서는 안되겠다. 장자의 소개를 읽은 사람은 장자의 소개를 읽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개의 글을 쓰는 것에는 적어도 두가지의 의미가 있는것같다. 하나는 장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서양교육을 받고 있으며 지식을 채우는 것에 열중한다. 그래서 그 해독으로서 장자나 노자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필요한 일이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과학이나 정치학이나 경제학의 여러 학설을 읽고 배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런 것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좀 다른 것을 읽는 것이 꼭 필요하다. 장자는 그런 책중에 가장 추천받아야 마땅할 책이다. 둘째는 보다 개인적인 것으로 장자를 읽어온 내게 있어서 과연 장자란 어떤 책인가를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 스스로 즐기고 장자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나에게 있어서 장자는 어떤면이 와닿았는가 하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장자에 대한 기본적 소개

 

장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2세기에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한 이야기라고 한다. 장자는 전국시대의 송나라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으며 보통 기원전 369년에서 286년까지 살았던 사람으로 추측된다. 이때는 맹자의 시기이지만 맹자는 장자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니 그리 유명세를 떨치지 않았던것 같다. 하지만 장자가 사기에 기록될 정도의 사상가였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아무런 지명도도 없이 고독하게 살다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으로서의 장자는 장자 혼자서 다쓴것이 아니라 훗날 자꾸 가필되어 훨씬 늘어났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사마천때의 장자는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수 없으나 장자는 늘고 줄다가 기원후 4세기에 이르러 곽상이 사본들을 정리하여 33편으로 정리했는데 이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으로 이중 내편 7편이 장자 자신에 의해 씌여진 부분이라고 통상 믿어진다. 그 7편의 이름은 제 1편 자유롭게 노닐다 (소요유), 제2 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 (제물론), 제3편 생명을 북돋는데 중요한 일들 (양생주), 제4편 사람사는 세상 (인간세), 제5편 덕이 가득함의 표시 (덕충부), 제 6편 큰 스승 (대종사), 제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 (응제왕)이다. 

 

장자는 이렇게 보았을때 장자 개인의 저술이기도 하고 동시에 중국인들이 세상을 보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를 정리해 놓은 집단 저술서라고 할수도 있겠다. 선불교는 노장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우리나라의 유명한 선승인 경허도 일찌기 장자를 천번 읽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장자는 뭘 말하려고 하는가

 

장자는 크고 넓어서 어떤 의미로 백과사전식으로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짮게 이야기할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서 장자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제1편 소요유에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다. 장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을 가장 빨리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는가. 

 

소요유는 대개 아주 큰 것과 작은 것을 비유하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데 그 첫번째 이야기는 바로 북쪽 깊은 바다에 산다는 곤이란 물고기의 이야기다. 몇천리나 되는 거대한 물고기가 다시 거대한 새, 붕새로 변하여 남으로 날아가는데 그 기세와 크기가 천지를 덮을 지경이다. 그런데 저 밑의 작디 작은 세계에 있는 매미와 새끼비둘기는 그걸 보면서 비웃듯이 재잘거릴 뿐이다. 

 

이 붕새와 매미의 대조가 말하는 것은 분명 우리가 매미처럼 되어서는 안되며 거대한 붕새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2천3백년전의 장자는 세상을 보면서 너희들은 어찌 그리 속이 좁고 한치 앞만 보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치 앞만 볼때 우리는 조삼모사의 상황에 빠진다. 즉 아침에 더 받으나 저녁에 더받으나 하루 전체로 보면 받는 것이 같은데도 좋고 나쁨을 따져서 흥분하고 실망한다. 한치 앞만 볼때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작은 벌레를 먹이로 잡으려는 사마귀는 자신을 무서운 포식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 사마귀의 뒤에는 사마귀를 잡아먹으려는 새가 서있을 수 있다. 즉 자신이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종종 이솝우화보다 더 황당해 보이는 경우가 있어서 그저 황당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특히 1편인 소요유가 그렇듯이 그 황당함 혹은 거침없는 호쾌함을 통해 장자가 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장자를 읽는 사람의 머리에 망치를 날리는 것일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깨어지고 더 큰 세계에 눈뜨기 위해서는 비약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것은 반드시 충격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계속 듣던 이야기를 조금씩 바꿔서 들어서는 그런 비약이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새 자기맘대로 그 이야기를 해석하기 시작하고 다른 어떤 설명을 들어도 그 해석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에 내성이 생기고 저항이 생겨서 새로운 메세지를 걸러내고 변형하여 급기야 그것을 무시하고 별거 아닌 것으로 인식하게 되기 쉽다. 중요한 메세지를 줄줄 외우는 단계에 가도 그럴수 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남의 이야기를 머리에 넣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 깨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가장 먼저 자세한 논리나 사고방식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기보다는 회심의 일격을 날리는 것이다. 그 일격을 일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장자의 일격은 도움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저 뭐야 이게 무슨 애들책인가. 과학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의 이야기로군하고 해석될 뿐일 것이다. 

 

듣는 사람에게 황당하게 들리지 않는 이야기란 듣는 사람의 사정을 생각하고 말을 고르고 표현을 골라서 내놓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논리적이고 친절하게 들리지만 그만큼 힘이 빠진 이야기인것도 사실이다. 사실 말과 표현은 진리나 실체를 모두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아이스크림맛을 설명하기 위해 당신은 이런 저런 표현과 비유를 사용할수 있다. 사탕처럼 달콤하다던가 홍시처럼 부드럽다던가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친절하면 친절할수록 실은 진정한 체험에서는 더 멀어진다. 말이란 모두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자기맘대로 아이스크림맛을 상상하고 그게 그거라는 믿음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이고 쌓아가는 서양식의 이야기는 나름의 장점이 있으며 세상에는 득도한 도사의 일갈을 날리는 허황된 사람도 너무 많지만 선승이나 장자가 날리는 회심의 일격이나 비약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은 세상 사람을 깨우려는 시도다. 하늘을 다 덮는 새같은 뻥을 쳐서라도 말이다. 중요한건 그게 뻥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땅만 보고 걷는 당신, 가끔 넓은 바다를 봐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라. 우주를 봐라. 헤아릴수 없는 세계가 거기있다. 너는 좁쌀이 아닌가. 생각좀 하라! 이렇게 장자는 먼저 외치는 것이다. 

 

한마디 더하자면의 제물론

 

자 세상이 좁은 것을 알았으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할 일이다. 남이 너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구원해주려고 해도 구원이 안된다. 너는 스스로를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 그러나 한마디 더하자면 내 이야기를 들려주마하고 하는 느낌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장자의 세계관이나 철학이라고 할 제물론이다. 

 

제물론은 철학이라는 의미에서 장자의 핵심적인 부분이랄수 있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재미없고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아니나 소요유가 한방 질러보는 고함소리라면 그 뒤에 나오는 양생주며 인간세며 하는 다른 편들은 제물론 철학의 응용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여기 하나의 망치가 있다. 이 망치로 못을 박으면 이렇고 벽돌을 깨면 이러하며 적을 만나면 이렇다는 식으로 망치의 활용 예를 들어주는게 뒤의 것들이라면 망치에 해당하는 것이 제물론이다. 뒤에서는 행복한 삶이라던가 행복한 국가 즉 정치같은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물론의 첫장은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를 잃어버린 자기는 하늘이 부는 피리소리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혹은 내가 뭘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늘이 그렇게 하는 것이며 따지고 보면 너와 내가 따로 있는게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제물론의 이야기들은 모두 구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너는 어떻게 '나'가 있다고 믿는가. 그것은 나와 너가 분명히 구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육체는 나의 육체와 물리적으로 떨어져있다. 그러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우리는 '나'라는 것을 그렇게 정의할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정의된 '나'를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는 나와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때 당신이 생각하는 '나'란 당신의 몸뚱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를 위하는 것이란 그 몸뚱아리를 소중히 간직하고 그 몸뚱아리에게 즐거운 자극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세상의 아름다움이라던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아니 내 자식을 사랑하고 내 부모를 사랑하며 내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따위는 설명이 잘되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 목숨바치는 부모야 말로 가장 미친자가 아니겠는가. 나라는 것은 몸뚱아리이고 자식이라고 해도 내 몸뚱아리가 아닌데. 나는 너 없이도 혼자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인간은 영혼이 있다는 둥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그 영혼이란게 전혀 과학적이질 않다. 영혼이 어디에 있는가? 장자는 애초에 그런 모순으로 빠지지 않고 경계를 허무는것, 경계의 유한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는 왜 니가 그 고깃덩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거야 말로 바닥을 기어다니는 매미나 새끼 비둘기가 할 작은 생각이 아닌가. 너와 나는 구분이 없으며 천지가 바로 나다. 장자는 마치 왼쪽이 없이 오른쪽이 없듯 모든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으며 하늘의 바람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그렇다. 모든 논리는 시작이 있어야 쌓을 수가 있다. 그러니 무한한 진리를 찾는다면 찾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미꾸라지는 늪을 헤매는 것이 옳고 사람은 따뜻한 방이 좋다. 따뜻한 방이 좋다는 것은 사람의 경우에 그렇다라는 전제가 있어야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전제를 다 확인했다고 믿을 수가 있을까? 그것은 마치 우물안에서 그 우물이 세계의 전부인줄 알고 우물안이라는 전제를 무의식중에 받아들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누가 어리석고 누가 똑똑한 인간인가. 도박판에 가면 똑똑한 인간들이 널렸다. 그들은 다 이렇게 저렇게 걸어야 돈을 딸거라는 여러가지 이론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물론 가장 똑똑한 인간은 애초에 도박같은 것을 안하는 인간이지 도박의 이론에 해박한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도박에 서툰 사람을 보고 조금 더 도박에 능수능란한 인간이 그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일이 늘상 일어난다. 누가 똑똑한 인간인가? 작은 인간은 더 노련한 도박꾼이 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장자같은 이는 자신이 도박장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제물론의 끝은 유명한 나비의 꿈 이야기다. 나비가 꿈을 꿔서 장자가 된 것인지 장자가 꿈을 꿔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장자가 아니지만 장자는 이쯤까지 쓰고 말했을 법하다. 자 이제 좀 세계가 넓어진것 같은가? 좁쌀만한 세상에 갇혀서 서로 서로 비참하게 만드는 삶일랑 그만둬야 한다고 느껴지는가? 

 

그외의 이야기들

 

그러나 물론 그 이야기들만으로 세상사람들이 다 알았다고 했을 리 없다. 아무리 길게 이야기한들 부족할테지만 장자는 노자처럼 알던 말던 너알아서 할 일이다라는 식으로 짧디 짧은 시같은 5천자를 남기고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장자는 계속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을 통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다. 내 생각에 장자는 정이 많고 열정이 있는 인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말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세상사람을 보면 계속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 사람아.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나?

 

사실 이야기란 아무리 해도 끝이 없으며 나중에는 듣는 사람이 지쳐서 핵심을 놓치고 세세한 것을 설명한 것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예를 들어 장자를 읽는 사람들은 나도 처음 그랬듯이 소요유를 건너 뛰기가 일수다. 잡편에 나오는 악기를 만드는 목수의 이야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지만,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것이지만 장자는 우리의 정신에 한방을 날리고 싶은 것이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걸 중얼중얼 외우고 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한방맞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번뜩 정신이 나서 아 내가 매미구나 하고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그저 심심풀이 놀이, 잡동사니 지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그 한번의 비약이 너무 크다고 느낄때 우리는 응용문제 풀이를 보면서 우리 안에 이해를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편의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진실을 알수는 없지만 1편다음에 2편 그리고 2편 다음에 3편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3편은 정치가 아니라 양생주 즉 스스로의 삶을 보고 살피는 것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는것처럼 세상을 구원하는 것의 첫걸음은 결국 내 삶을 살피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가. 양생의 도는 포정의 소각뜨는 일에서 설명된다. 부질없는 일에 정신을 나누지 않고 지금 앞에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에 몰입하고 세상의 도에 따를때 우리는 잘사는 삶을 성취하게 된다고 장자는 말하고 있다. 다리가 잘라진 우사는 말한다. 다리가 잘린 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늘이 한 일이다. 사람이 했다는 것은 작은 시각이다.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 갇혀서 화려한 삶을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뀡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다. 우리는 각자 해야할 일을 하고 살 뿐 고민과 걱정과 번민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나면 4편 인간세에서 장자는 정치를 논한다. 내가 여기 소개서에서 장자를 끝없이 이야기할 수는 없고 그럴 의도도 없으므로 유명한 심재에 대한 이야기만 잠깐 언급하도록 하자. 

 

세상을 구하려고하는 사람은 이제나 옛날이나 많다. 안회도 그와 같아서 위나라로 가서 젊은 혈기에 권력을 남용하는 어리석은 왕을 깨우쳐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안회를 공자가 말리면서 한마디로 너 가서 뭘하려고 하는가 라고 묻는다. 

 

공자에게 안회가 근면히 열심히 하면 안되냐고 하자 공자는 안된다고 한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옛성인들의 말에 빗대어 말하며 나를 숙이면서 따르겠다고 하니 공자는 그것도 안된다고 한다. 마침내 안회가 모르겠다고 하니 공자가 말하는 것이 심재하라는 것이다. 

 

심재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날에도 안회와 위나라의 왕은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의 왕은 권력이 강한 자들일수 있고 기득권계층같은 사람들일수도 있으며 그저 전체로서 국민일수 있다. 누군가가 세상을 좋게 하고자 그들에게 나아가 충고하거나 비판하려고 할때 심재의 이야기는 2천3백년전과 똑같이 작동한다. 

 

열심히 살면 국민이 알아주는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작 너 잘났다라고 잘난체한다는 소리를 듣거나 비웃음이나 사기 일쑤다. 그럼 국민에게 듣기 좋은 소리하고 옛사람 이야기하면서 권위를 빌려와 이야기하면서 나를 낮추고 국민을 섬기는 자세를 취하면 국민이 알아주고 국민이 바뀌는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화나 면할뿐 국민은 바뀌지 않으니 이루는 것없이 세월만 간다는 것이다. 

 

심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심재이니라. (인간세)

 

이게 뭔소리인가. 나는 이것을 실용주의의 정신으로 생각한다. 결국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뭘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어떤 개념이나 이념이나 계산을 다 던져버리고 지금 뭘 해야하는가를 느끼고 그것을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판단하고 그에 맞춰서 계산을 하고 하는 방식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빈민층에게 먹을 것을 주면 인구가 늘어서 다시 생활수준이 떨어지므로 결국 빈민구호란 쓸모없는 것이다라는 멜서스의 인구론 주장같은 것은 인간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며 이러저러하면 반드시 이러저러하게 일이 일어난다는 법칙론적 논리적 관념적 사고를 보여준다. 멜서스가 틀렸다고 하는 것도 맞다고 하는 것도 심재가 아니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다른 경제 사회학적인 이론들에 모두 할 수 있다. 그걸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한계를 아는 사람에게만 그 이론들은 유용하다. 

 

그런 이론들을 아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지금 이순간 뭐가 필요한 것인지  선입견을 버리고 처음부터 열린 마음으로 느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논리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가치판단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의 어떤 기억에 의존해서 일을 처리할 때 제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계산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과거의 그 인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란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나를 잊은 인간들이나 할 것이라는 것이 장자의 말이다. 자기로 가득차고 여러가지 선입견이며 관념으로 가득차서 세상을 자르고 나누는 인간들이 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정확히 그 반대의 상황에서 정치판으로 뛰어들고 정치를 논하는가. 노동자를 위한 정치, 정의를 위한 정치, 재벌을 위한 정치, 자연보호를 위한 정치, 세계적 보편성을 한국에서 이룩하려는 정치. 사고가 복잡한 인간들은 남을 자기의 사고에 끼어 맞추려고 한다. 그러다가 희생자가 나와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지 못한 자들때문이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만 말한다. 

 

물론 세상에 희생없고 사고없는 사회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조잡하고 비좁은 사고에 세상을 끼워넣는가가 문제다. 반상회도 작은 가족도 잘 이끌지 못할것같은 식견으로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서 자기의 역량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그 행위가 바로 악의 탄생이다. 악자와 선자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자기 능력과는 비교도 안되는 위에 올라가서 여기저기 칼질하는 자들이 악한자들이다. 그러나 현대는 누구나 끝없이 위로 위로를 위치며 출세를 하려고 욕망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사회다. 공익따위는 신경도 안쓰던 사람들, 군대도 고의로 빼먹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하고 싶어해도 그러려니 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악은 쉽게 탄생된다. 

 

맺는 말

 

우리는 흔히 우리가 성인이 될수 있는가 도통한 사람이나 그렇게 하지라는 말을 종종한다. 그런 말을 하면서 우리가 곧장 돌아가는 것은 인간이란 조잡한 욕망을 추종하고 서로 싸우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교묘하게 각각의 문장이 가지는 문맥을 뒤섞어서 만들어낸 헛소리다. 

 

스스로 나는 성인이다던가 나는 도통했다라고 외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해도 대개 그런 사람들은 주변사람들에 의해 오히려 미친인간, 뭔가 부족한 인간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증명하는 일도 쉬운데 어떤 인간이 능력의 한계를 가졌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통했으면 왜 돈을 못벌어라던가 자기 가족이나 잘 챙기고 말하지라던가 하고 핀잔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 도통한 인간으로 알게모르게 숭상받는 인간들은 부자나 유명인들인데 물론 그들이 제 아무리 유명하고 부자라고 한들 전지전능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이건희나 빌게이츠라고 해도 내가 성자다라던가 도통했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무력함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은 현대에 도통한 인간은 없으며 성자따위는 없다라는 것의 증명비슷한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도통했다라던가 성인이다라고 하는 것들의 의미를 자기맘대로 정하고 그리고 자기 맘대로 부정하는 과정이다. 전지전능하게 모든 것을 제멋대로 바꾸는 힘을 가진 자가 도통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세상에 도통한 사람은 없다. 있을 수도 없다. 

 

그런데도 종교경전이나 장자같은 문헌속에서는 얼핏보아 초인간적인 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도 그런 신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은 내가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다 구하고 보살핀다라는 말을 한다. 비록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없다라고 다시 금방 그 말을 부정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거기서 말하는 전지전능의 신인이나 부처는 세상과 나의 구분이 없어진 상태로 위에서 말하는 심재한 인간이며 자기가 없고 명예를 찾지 않으며 모든 것을 가졌지만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없는 인간을 말한다. 깨달으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부처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즉 알고보면 이 세상에 도에 통해있지 않고 신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문맥에서는 장자 한줄 불경 한줄 안읽은 사람도 나는 신인이며 도통한 인간이다라고 선언해도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모두 도에 통해있다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지 않는가. 

 

다시 처음의 말로 돌아가보자. 이 두 개의 문맥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섞어서 하나를 부정하기 위해 써먹는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인간이란 이 몸뚱아리고 인간은 욕망을 쫒기 마련이고 나는  그렇지 않은 인간도 되고 싶지 않고 하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장자의 가르침 같은 것을 제 멋대로 변형시킨다. 결국 자기 껍데기안에서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방어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결과 우리는 지극히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죄인의 딜레마라는 말이 요즘 많이 쓰인다. 이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불신해서 결국 모두에게 최악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전체에서 보면 어리석은 것이지만 각자가 인간은 본래 믿을 수가 없어, 인간은 어리석어, 인간은 결국 욕망을 따르지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리다보면 뻔히 어리석은 일인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게 된다. 그래서 괴로워도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도통한 인간이 어디있어, 인간은 욕망을 따를 뿐이야, 조선놈은 그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뭐 이런 이야기를 계속한다. 자기의 껍질안에서 나오질 않고 자학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장자는 말한다. 북쪽 바다에 몇천리나 되는 고기 곤이 살았는데 곤이 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되어 남쪽으로 날아간다. 하늘을 뒤덮은 붕을 보면서 매미니 새끼 비둘기가 비웃는데 ..... 너는 언제나 매미새끼로 머물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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