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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1 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2. 5. 16.

2012.5.16

과학철학자로 알려진 칼포퍼의 책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민음사에서 1권만 2006년에 각주와 함께 새로 출간하고 2권이 새로 출간되지 않은 이유로 2권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권은 다른 역자가 출판한 옛날 책을 읽어야 할것같습니다. 여기 그 책에 대한 소감을 정리해 봅니다. 

 

 

 

 

이 책은 왜 씌여졌고 무엇에 대한 것인가

 

이 책은 20세기 중반에 씌여진 것으로 서구사람들을 독자로 생각하고 쓴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기본적 주제는 무엇이 열린사회를 닫힌사회로 역행시키려고 하는가입니다. 그 답을 어떤 심성나쁜 사람들이 있어서라던가 전체주의, 독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라고 답하는 거라면 책을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왜 우리가 전체주의를 지지하게 되는가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며 잠재적으로는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물론 지금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열린사회를 지지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안에도 닫힌사회로 가는 사고의 씨앗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무지할때 열린사회의 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몸통을 이루는 내용은 플라톤과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한 것이고 1권은 플라톤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의 시점에서 보면 전체주의나 공산주의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기에 이런 주제는 시기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플라톤에 대한 것이라던가,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전체주의 비판에 대한 것이었다면 즉 그런 특수성만을 가진 것이라면 이 책을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그것도 서구 사람들이 아닌 동양사람이 읽어야할 이유는 훨씬 더 줄어들것입니다. 지금은 당시만큼 전체주의나 공산주의의 위협이 크지 않기 때문이며 동양사람에게 플라톤이 가지는 의미는 서양사람에게 만큼 클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향력으로 보자면 예를 들어 공자의 유교적 영향력이 훨씬 크겠죠. 따라서 이 책의 상당부분을 채우는 플라톤의 저작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지적인 자극이 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지식으로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는 미흡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지금 시점에서 읽어도 가치있게 만들어 주는 보편성은 무엇이며 그것이 아시아인 혹은 한국인의 삶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독후감을 쓰는 것은 분명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21세기에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일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아래에 쓰도록 하겠습니다만 저는 열린사회의 적들이 21세기 한국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사건들중 두 개를 예로서 언급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일부 몰지각한 기독교신자의 범죄입니다. 또하나는 NL이라는 이름을 걸고 스스로 진보정치세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21세기 한국에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던 사건입니다. 이 밖에도 많이 존재하는 한국내에서의 문제점들은 바로 칼 포퍼가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이 칼포퍼를 아직도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무지를 자각하라.

 

이 책은 방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플라톤의 철학과 그 영향을 분석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이 하고 있는 말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플라톤을 잘 이해하자라기 보다는 그것은 너의 무지를 자각하라라는 한 줄로 요약됩니다. 이 책은 무엇을 더 가르치기 보다는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을 착각으로 지적하고 수정하기 위한 책에 가깝습니다. 플라톤을 알아라라는 것이기 보다는 플라톤을 잊어라라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다른 말로 계몽적이라기보다는 치유적인 것이죠. 

 

그 착각이란 것은 물론 단순히 플라톤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이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라 북한이나 스파르타를 떠올리게하는 비인도적인 독재 정치를 찬양하고 나를 왕으로 만들라고 말하는 정치적 주장을 하는 괴물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본래 목적은 아닙니다. 

 

사실 이 책은 상당 부분을 통해서 플라톤이 이렇다는 것을 논증하기는 합니다. 플라톤은 개인의 안녕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했으며 계급의 안정을 무엇보다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계급이 섞이는 것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으며 거의 세뇌교육이라고 할만한 것을 하는 사회를 묘사하면서 그것을 이상국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열살이 되면 어른들로부터 떼어져서 교육을 받는 사회이며 아이들과 여자와 노예를 공유하는 공산사회입니다. 기묘한 플라톤의 수라는 것에 기반하여 아이를 낳는 것도 조절당하는 그런 사회입니다. 

 

그러나 비록 플라톤이 매우 유명한 철학자이기는 하지만 수천년전의 한 개인일 뿐인데 그 사람이 미치광이라고 해서 그게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말하자면 이 글을 읽는 사람을 포함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망령에 씌여있으며 자신안의 그 망령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이란 가장 미친자가 아니라 실은 가장 뛰어난 자이며 플라톤이 걸은 그 길은 단순히 플라톤의 길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의식중에 무의식중에 걷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플라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에도 전체주의가 창궐하고 폭력이 난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저런 미친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왜 아닌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포퍼는 바로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포퍼가 말하는 것은 당신은 당신이 뭘 모르는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뭘 알고 있는가를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가를 모릅니다. 바로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한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말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자기는 자기가 아는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는 자기보다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플라톤은 이 세상에 진실되게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고 말하니 그것이 이데아입니다. 포퍼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장 똑똑한 제자였지만 스승을 배신하고  그의 책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정반대로 뒤집는 짓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뭘 모른다는 것일까?

 

만약 단순히 그래 사실 내가 모르는게 많지 하고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라면 수천년간의 오류가 생길 리는 없겠지요. 우리의 무지를 자각하는게 뭔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바로 유명론과 본질주의라고 말하는 것들을 비교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포퍼는 현대과학은 유명론의 단계에 도달했으나 현대의 사회과학은 아직도 본질주의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오류가 생긴다고 말합니다. 

 

본질주의는 이것은 무엇인가하는 정의를 묻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좋은 정부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본질주의자는 정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본질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회과학책 좀 읽은 사람과 대화해 본적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종종 넌 사회주의가 뭔지 아냐라던가 복지국가가 뭔지 아냐라던가 하고 말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게 뭔데라고 말하면 그들은 어떤 역사와 정의들을 유명한 사회과학자의 이름과 함께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하곤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지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유명론적 입장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좋은 정부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유명론자는 너는 정부가 너에게 뭘해주기를 원하는가하고 물을 것입니다. 즉 정부의 역할, 도구로서 정부는 뭘하기 위한 것인가를 묻고 거기에 대한 답이 나오면 그걸 해내는 정부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 다는것입니다. 정부란 본질적으로 뭘 말하는가를 논하는 정의나 본질에 매달리지 않고 유명론자는 지금 필요한게 뭔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문제가 뭔가에 집중합니다. 

 

현대과학이 유명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과학이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기술을 할뿐 그 사물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가 땅으로 떨어질때 우리는 중력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고 중력의 법칙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사과의 속력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기술할 뿐입니다. 뉴튼은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말하지만 중력이 뭔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갈릴레이-뉴튼시대이래 이룩된 과학적 혁명입니다. 그것은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 사물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 시대의 물리학이란 과학조차도 본질주의적이었고 말하자면 중력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본질주의니 유명론이니 과학혁명이니 하는 단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진짜 핵심은 무지입니다. 본질주의는 마치 수학에서 정의를 말하듯 그 본질을 알면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았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원이란 2차원 평면 상의 한 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입니다. 이런  정의를 알면 원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 것이죠. 거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지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자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주의의 핵심적 오류이며 나아가 플라톤 이데아철학의 오류인 것이고 전체주의와 칼포퍼가 역사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오류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천천히 곰곰히 생각을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학에서는 정의를 도입하고 연역적으로 어떤 명제를 증명하는 것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가 본질에서 혹은 정의에서 출발해서 사고하면 문제가 큽니다. 예를 들어 정부란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정부란 이런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 답이 무엇이든 간에 과연 3천년전의 정부와 지금의 정부가 그리고 프랑스정부와 한국정부가 같은 점만 있을까요? 다르죠. 그 다른 것을 본질주의적 입장에서는 부수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큰 개 작은 개 검정 개 얼룩 개 는 모두 다 개라는 것입니다. 개라는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이상적 존재인 이데아의 불완전한 복제품이라는 이데아론적인 사고는 바로 뭐뭐란 무엇인가를 묻고 그 답에 기반하여 사고하는 본질주의적 사고입니다. 

 

반면에 유명론적입장이라는 것에는 우리는 단지 이 정도를 알고 있을 뿐 거기에는 무지와 지식간의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항상 따라다닙니다. 위의 예에서 뉴튼은 중력이란 무엇인가는 묻지 않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딘가에서 지식의 출발점 -그것이 과학적 관찰에 의거한 것이라고 해도-을 가진다는 것 그 너머는 무지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발점은 무지의 경계이기 때문에 사실 거기서 출발한 지식은 다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하듯이 이건 왜 그런가, 그런데 저건 왜 그런가 하고 계속 질문을 계속하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아는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뉴튼의 중력법칙은 중력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나온게 아닙니다. 만약 화성에 가니까 중력이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하더라는 관찰이 생기면 중력법칙이 온 세상에서 다 옳다라는 주장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플라톤문제의 일반성

 

이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떠오른 생각은 소크라테스-플라톤과 공자-주자의 유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문제의 일반성입니다. 물론 그리스 철학과 유학이 차이점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의식과 그 해결책에는 분명 어떤 공통점이 느껴집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는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하다가 참주정치를 하다가 전쟁도 지고 다시 민주주의를 하는둥 정치적 격변을 겪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사건 즉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포퍼는 플라톤철학의 핵심은 변화에 저항하는 것, 즉 영원히 변치않는 것을 찾고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은 이 세상의 것들은 덧없이 변화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인간의 절망을 느끼는데 그 절망의 돌파구가 바로 그의 이데아론이라는 것입니다. 즉 수학공식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들이 바로 완벽한 존재이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 이데아의 불완전한 복제품이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정치체제는 시간에 따라 계속 부패했을 뿐이며 우리는 다시 본성으로 돌아가서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고 영원히 변치않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플라톤에게는 당시의 세상이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던 과거의 이상적 부족국가상태가 부패하여 갈라져가는 상황으로 파악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플라톤의 주장은 고대국가를 이상적 국가로 말하고 거기에서 부터 타락해서 전란으로 갈라진 세상이 생겨났다는 공자의 세계관과 비슷합니다. 공자는 다시 그 옛날의 이상국가로 돌아가기 원했고 질서가 있는 나라가 회복되기 원했습니다. 그렇기에 바로 예를 강조했던 것이죠. 훗날 주자학을 받아들인 조선은 온갖 예의범절에 대한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그런 현실은 플라톤철학이 전체주의를 만들어 낸다는 포퍼의 지적을 생각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만약 진리라는게 객관적으로 명확히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 대한 진리는 누적되고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가장 그것에 달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자가 왕이 되는 국가가 나와야 하는 것이고 이미 옳다고 논증된 엄청난 진리의 체계가 생겨나서 그것에 누가 의구심을 표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플라톤철학을 받아들인 서구중세도 그렇게 복잡한 체계를 쌓아올려서 변화를 거부하게 되는 암흑시대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책좀 읽고 복잡한 단어를 줄줄이 말하는 사람들도 적어도 그 일부는 어떤 의미에서 조선 성리학자나 중세의 수도승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지적으로 억압하는 본질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충분히 조심스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지식의 체계를 세워서 다른 사람이 그걸 부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과학도 마찬가지이며 소위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이 점을 잘 설명합니다. 하지만 과학은 대단히 엄정한 관찰과 정확한 정의를 가진 개념에 기반하여 사고 하는 것이지만 사회과학쪽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럴수 있다면 그것도 역시 엄밀과학의 영역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대한 지식체계란 과학과는 달리 스스로 만드는 미로나 감옥이 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분명 결과적으로는 오류처럼 느껴져도 어느 부분에서 논리적 오류를 범했는지 찾아낼수 없는 미로말입니다. 이렇게되면 학문이 우리를 돕는게 아니라 학문이 우리를 방해만 하게 됩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가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선비를 만났는데 그가 이니 기니 하는 말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우리가 그 틀안에서 그 선비와 이야기해서 우리의 주장과 증거를 증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할것입니다. 그 선비의 눈에는 그게 증명이라고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물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과학이나 혹은 사회과학의 여러개념이 '과학적'이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그들의 엉터리 개념적 기반때문에 사고의 왜곡을 격는다고 말할 것 입니다. 그러나 이 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의 관념들이 문제라는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관념들도 왜곡을 행사하고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일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플라톤도 공자도 조선 성리학도 서구 중세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일개 개인의 입장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포퍼는 그리스철학은 고대의 부족적 질서가 사회의 성장으로 망가지면서 생겨난 혼란에 대해 저항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낡았지만 그리운 세계가 깨어지고 질서가 붕괴했을때 우리는 우리가 뭘 믿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을 찾고 고민하게 되는데 그게 여러가지 그리스철학자를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철학자가 아닌 개개인도 똑같은 일을 겪습니다. 어린 시절 주로 부모밑에서 그저 작은 세계만을 믿고 살다가 성장하면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길고 짧게 세계의 붕괴를 적어도 한번은 겪습니다. 우리는 익숙한것과 결별하고 스스로 독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혼돈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며 불확실성을 경험합니다. 그럴때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스스로 만들어 영원한 진리의 이야기를 믿게 되었듯이 우리도 뭔가를 서둘러 믿어버립니다. 서둘러 믿게 된 그것들은 금새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되어서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믿는다는 자각도 없어집니다. 이러한 인식체계는 대개 사회속에 가득한 남의 철학의 조잡한 복제품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웃이 그렇게 하니까 친구들이 그렇게 하니까 원래 그런 것이라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이상으로 강력합니다. 우리들중 나체로 거리를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공중목욕탕에서 나체를 보이는 것에는 익숙하며 해변가에서 작은 수영복을 입는 것에도 익숙합니다. 그것은 그저 남이하니까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원래 그런거라는 것들이 하나둘씩 쌓여서 우리의 당연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속에서 우리는 왜 그런지도 모르고 남의 노예가 되고 시스템의 노예가 됩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자기 자신과 주변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눈이 멀어서 제 아무리 세상을 열심히 봐도 산처럼 커다랗게 있는게 보이지가 않게 됩니다. 바로 자기의 무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건 원래 이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걸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가 필요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의 무지를 알라고 합니다. 네가 뭘 모르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도 아는 것이 없고 너도 아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기계인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다는 것은 뭔가를 더 알아서 그 무지를 해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바다같은 넓은 물속에 있는 하나의 짚신벌레나 아메바처럼 무한히 넓은 무지의 영역을 가지게 되며 그 무지의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뭐에 대해 모두 알았다거나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안다거나 하는 예측을 쉽게 하지 않게 되지요. 쉽게 인과적인 선을 여기저기에 긋지 않게 됩니다. 

 

포퍼는 역사를 말하면서 가짜 역사의 법칙들을 내세우는 것을 역사주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역사는 이렇게 저렇게 흐른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좋은 예는 공산주의의 역사관일 것입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는 이렇게 저렇게 흐르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역사가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지불해야하는 고통을 줄이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포퍼는 질문자체가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의 권력은 누가 가져야 하는가 노동자인가 자본가인가라는 질문은 마치 그 답이 노동자나 자본가 둘중의 하나인 것이 가능한 모든 경우인것처럼 우리의 사고를 제한 합니다. 또한 마치 국가의 지배권이 제한당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는 현대 사회의 모든 권력은 상호견제되면서 존재하기 때문에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단순하게 말하기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질문이나 논의안에서 답을 선택하다보면 자신이 자신의 이성으로 답을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질문을 던지는자가 원하는대로 자신의 사고를 제한하고 장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무지를 자각하지 않은 태도가 만들어 내는 비극중 하나를 포퍼는 급진주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전거나 자동차를 만들때는 먼저 설계도를 그리고 그 다음에 제작에 들어갑니다. 무지를 자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세상도 그렇게 만드는 거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사회란 이런 것이라는 설계도를 그립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뭐가 필요한가를 생각하고 그걸 실천에 옮기면 이상적인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판단에서 흔히 사람들은 일단 기존의 것들을 싹 치워버리고 깨끗하게 한후에 모든 것을 새로 건설하자는 말에 쉽게 동조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본적으로 주어진 세상에 뭐가 있는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명처럼 소중한 것 혹은 정말 생명이 유실되는 것이죠. 

 

우리는 인생설계나 환경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목격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이거라고 미리 미리 생각해서 인생의 이상적 모습을 그린 다음 그것을 성취하려고 하면서 계획에 따라 사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또는 강변을 모두 밀어내고 콘크리트로 발라버리는 일을 쉽게하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인생이나 자연환경안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없다라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중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아주 간단히 다 싹 치워버리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겨우 원했던 곳까지 도달해도 원하던 결과는 대개 나오지 않습니다. 생각이 부족했고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비싼 댓가를 치루며 스스로 파괴했던 것을 복원하려고 하면서 인생을 낭비합니다. 

 

포퍼가 대안으로 말하는 것은 점진적 발전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장소에서 한걸음씩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으며 이상적 사회에 대한 설계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동차나 자전거 같은 기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걸음씩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무한한 무지의 영역을 가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칼 포퍼는 모두 만족스러운가 1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꺼림직했던 점을 한두가지 쓰고 소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 그리스철학과 유교를 잠깐 비교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철학자가 국민을 감화시켜서 좋은 나라를 만든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비슷한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칼포퍼가 충분히 강조해주지 않았거나 무시한 측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칼포퍼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자이고 평등주의자 입니다. 그는 개인에게 최대한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국가가 그다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옳을까요? 특히 현대와 신문도 출판사도 방송국도 없었던 수천년전을 비교했을때 옳은 이야기일까요.

 

칼 포퍼가 책전체에서 자주 강조하는 메세지는 사실이나 어떤 제도가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사라지게 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사실이고 도구일뿐 윤리적 결단의 책임은 항상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해서 즉 우리가 각자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자각하고 각각의 개인들이 충분히 책임있게 행동할 때 세상의 문제들은 해결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 세상에는 범죄자나 저능아나 정신병자가 존재합니다. 만명중의 한명만이 폭탄테러범이라고 해도 그것때문에 만명이 전부 소지품검사를 받아야 하는 현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개개인을 개개인으로서 자 자유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고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유용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자유주의자이지만 특히 수천년전에는 그런 이상은 헛된 공상이었습니다. 즉 그때는 윗사람들이 국민을 교화하고 체제의 안정을 보장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플라톤이나 공자의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공자를 말하면서 공자는 왕이 왕다워야 한다고 말할뿐 왕따위는 물리치고 민주정부를 세우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공자란 평등과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깍아내린다면 그건 공자에게 공평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심지어 현대에도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이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마구 늘어나고 경제가 발전하는 시기에는 개인의 자유가 찬양되고 강조되지만 불황이 닥치고 굶어죽는 사람이 닥치면 공동체로서의 질서의식이 더 강조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유와 평등의 유용성이란것도 무한한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좋다고 하지만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평등한게 반드시 언제나 좋은 것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건 때로 부모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평등이나 자유란 어떤 문맥에서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괴상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투표권에 나이제한을 하지 않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5살인데 지적인 사람이 있는가하면 7살정도의 상식도 없는 어른도 많습니다. 

 

다시말해 플라톤과 공자같은 사람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칼 포퍼식으로 표현하면 모두 지워져나갑니다. 칼포퍼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으며 스스로 역사주의 비판적 입장에서 말하기 때문에 플라톤에 대한 정당한평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면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 제도의 결과에 승복하기 위해 죽었지만 민주주의를 반대하던 참주정치론자들도 가르쳤습니다. 플라톤의 한계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필연성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칼 포퍼는 모두 만족스러운가 2


칼 포퍼는 설계도 없는 점진적인 발전을 유토피아라는 설계도를 향해 전진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토마스 쿤을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수는 없습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야기한 토마스 쿤에 대해 포퍼가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그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점진적인 발전의 이야기를 들으면 잘 이해가 됩니다. 


토마스 쿤은 사람들은 다음세대를 교육하거나 서로 서로 소통함으로써 하나의 믿음의 집합이라 할수 있는 패러다임이란 것이 만들어 지고 유지되며 이 패러다임은 오직 비연속적으로 비약함으로써만 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칼 포퍼가 말하는 연속적인 발전을 믿기 힘든 것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자유주의의 패배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포퍼가 옳은가 쿤이 옳은가를 양분해서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포퍼는 자유주의자로서 과학이론이나 진리에 대해 혹은 발전에 대해 다소 단순한 혹은 낙천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저 자유롭게 많은 것을 시도해 보고 검증하다보면 발전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쿤은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이 깊을 때는 특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불연속한 것이고 어떤 의미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한 방에 주장하고 거기로 옮겨갈것을 주장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이건 낡은 패러다임이건 단 하나밖에 없는 절대의 진리는 아니며 따라서 쿤이 보여주는 그림이 포퍼가 말하는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포퍼는 발전의 어려움을 다소 단순하게 이해했다는 비판을 받을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영감과 비약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들없이는 패러다임은 바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전적 진화도 돌연변이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유전자의 분자적 안정성이 꼭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유전자는 금새 파괴되어 진화된 정보도 유실되었겠지요. 

 

맺는 말

 

이렇게 쓰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란 헛소리같고 해악만 낳는것 같으며 반과학적인것 같지만 사실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는 것이야 말로 수학과 과학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런 시도는 위대한 성취를 낳습니다. 예를 들어 이 일반점 관념이라는것이 궁극적으로는 노예제도를 없애게 된다고 화이트헤드는 관념의 모험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관념을 가지게 되면 인간사이의 불평등에 대해 부당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이론뿐만 아니라 모든 논리적인 이론들은 모두 어떤 관념들을 논리적으로 조합한 것입니다. 서구에서 그리스를 자기들의 문명적 기원으로 삼는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때문에 바로 칼포퍼가 말하는 것이 소중해 집니다. 칼 포퍼가 그리스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아시다시피 많은 신들이 등장하는데요. 그것은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었니다. 왜냐면 하나의 신이 하나의 계획을 가지고 세계를 만들어 가는게 아니라 여러신들이 각자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일신 사상은 이 세상에 대해 불확실성이 없는 것으로 보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바로 그 전능한 신의 계획대로 일테니까요. 

 

이상세계에 대한 설계도를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서 어떤 수단을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폭력적이 되기도 쉽습니다. 선악이 간단하게 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항상 좋기만 한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은 이러저러한 곳이고 너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혼란된 머리를 정리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를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으로 만들수 있고 나아가 미래예측에 대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이데올로기에 빠져있습니다. 뭐가 확실하고 뭐는 원래 그렇고 뭐는 뻔한 것입니다. 세상이 또렷하게 보일수록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때 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가 열린사회의 적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다시 처음의 메세지로 소감문을 마칩니다. 

 

너의 무지를 자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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