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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2. 9. 13.

2012.9.13

최근 몇일간 틈틈히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를 읽었습니다. 읽게 된 동기는 부분적으로 소크라테스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이 책이 공짜로 다운받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어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어권에는 고금의 고전중에 스마트기기에 받아서 그냥 볼수 있는 책이 많이 있습니다. 일본도 영어권같진 않지만 많이 있더군요. 이런 것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에게는 매우 부러운 것이죠. 개선이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프로타고라스 번역본은 여러개가 있으므로 꼭 영어로 읽으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을 흥미롭게 하는 것은 이것이 저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이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서 많은 현대인에게 생각해 볼거리를 준다는 점입니다. 이 책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점이 있다면 이 책은 짧지만 거기에 무수한 군더더기가 차있고 소크라테스의 어법은 매우 짜증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며 문제는 제기했으되 답은 없는 책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책을 읽고서 이 책을 읽은 독후감을 사람들이 써놓은 것을 대충 훓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더군요. 게다가 책소개에서 이책의 내용을 요약했는데 그 요약이 제 마음에 전혀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몇마디를 정리해 놓기로 했습니다. 

 

이 책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팔아 돈을 받는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가 소크라테스를 만나서 나눈 대화를 기록한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그들을 훌룡한 정치가로 교육시켜주겠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덕성(virtue)이라는 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피아노나 바이올린이나 집만들기 기술이야 기술이고 지식이니까 가르칠 수 있지만 좋고 나쁜 가치판단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로타고라스는 당연히 가르칠 수 있는 거라고 답하지요. 이 책의 핵심은 과연 이 질문이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왜 덕성이 가르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그의 설명의 핵심적인 부분은 신화같은 부분을 제외하면 오늘날 읽어봐도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걸 제 식으로 요약하고 변형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덕성을 가르치려고 저렇게 열심인데 덕성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게 무슨말인가. 만약 덕성이라는게 사람 타고난 생김새같이 바꿀 수 없는거라면 -오늘날에는 바꿀 수 있지만 그것이 핵심이 아니죠- 타고난 생김새를 가지고 누군가를 비난할 수 없듯이 우리는 누군가가 겁장이라던가 솔직하지 않다고 할 때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법을 안 지켜도 나는 이렇게 태어난 놈이요라고 하면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교육기관을 봅니다. 교육기관이란 것은 당연히 그 기본전제가 교육이란 것이 가능하다라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우리 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소피스트가 있는 셈입니다. 오늘날 보통 사람들도 대개 프로타고라스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그가 오늘날 최고의 현자중의 하나로 여겨진다는 것이죠! 지구가 둥글다는것이 2천년전에 밝혀졌는데 지금도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미리 말해두지만 이 질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이나 논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의 논증 자체는 좀 짜증나는 말꼬리잡기처럼 들리는 면이 있고 논리적으로 완벽하다고 생각되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점을 지적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고 그걸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더 큰 틀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이 더 잘 들어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묻습니다. 

 

덕성이란게 하나만 있는게 아니고 용감함이라던가 성스러움, 지혜로움, 자제력, 정의로움 같은 여러가지가 있는 것같은데 이것들은 눈코입이 얼굴의 다른 부분이듯이 모두 덕성의 다른 부분인가?

 

이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그렇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서로 다르다는 거지요.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계속되는 짧은 질문과 답으로 사실은 그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모순이지 않냐고 몰아칩니다. 예를 들어 정의로움과 성스러움은 다른 것인가, 왜 다른가, 따져보면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걸 어떻게 증명했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소크라테스는 그게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는지 그리고 왜 프로타고라스는 흥쾌히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다 같은 것이군요라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지 하는 것입니다.

 

책에는 분명히 나오지 않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프로타고라스가 여러 덕성이 실은 같은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는 이유는 그가 덕성을 교육시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떄문에 덕성이란게 지적으로 분류가능하고 개념화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여러가지 덕성이란 서로 이러저러하게 다르며 그런 차이로 인해 이러저러하게 각각에 대한 교육이 가능해 진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리가 고양이나 의자나 책상같은 이름들을 여러 대상에 대해 쓰지만 실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이며 그들은 서로 다르지않기 때문에 그것들에는 따로 따로의 이름도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사람은 세상에 대한 지적인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적인 이해와 교육은 분류하고 이름붙이는 것이 반드시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의 논증으로 인해서 정의로움과 성스러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집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트릭이 있는 것같은데 말했듯이 그것이 본질은 아니므로 넘어가겠습니다. 곤경에 처한 프로타고라스는 분석이 어려워지도록 길게 덕성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소크라테스와 스무고개 놀이는 더 이상 안하겠다고 저항합니다. 

 

대화는 프로타고라스의 저항으로 교착에 빠지고 토론이 끝나는가 싶더니 계속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발 좀 계속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프로타고라스의 질문때문에 시모니데스의 시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 나옵니다만 제 생각에 이 논의는 대부분 그저 프로타고라스가 소크라테스를 곤경에 처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고 당연히 성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부분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대화를 계속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그래서 덕성이 뭔지, 왜 가르칠 수없다는 것인지를 분명히 결론짓고 끝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자신의 주장도 프로타고라스의 주장도 다 부정되는 것같은 상황으로 논의를 이끕니다. 그리고 나서 이 괴상한 모순을 같이 더 해결해보자고 제안하지만 프로타고라스가 이젠 다른 걸 하겠다고 해서 이야기는 끝나버립니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덕성이 여러가지 인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다 쾌락이나 고통의 측정에 대한 지식의 문제라는 것이며 같은 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자기 모순적인 결말이냐고 하면 만약 덕성이 지식이라면 가르칠수 있을테니까 덕성을 가르칠수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덕성이 가르칠 수 있는거라고 증명한 꼴이 되었고 소크라테스의 논증에 저항하던 프로타고라스는 덕성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지식이 아니라고 저항하는, 그래서 이번에는 결국 덕성은 가르칠 수 없는거라고 말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소크라테스가 스스로의 논증이 가진 문제를 미리 알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만 저항하는 프로타고라스가 저항할 수 없는 논증을 해서 일단 덕성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중간단계까지 전진했는데 프로타고라스가 손을 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좀 더 자세히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뭐가 덕에 따르는 것인지 알고 있을 때에도 쾌락에 지배당해서 그 반대로 합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요. 우리는 체중조절을 위해서는 먹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 때에도 종종 절제를 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하지만 결국 좋고 나쁜 것의 기준은 쾌락과 고통의 총량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탕을 먹으면 좋지만 결국 이가 썩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이것은 당장의 달콤함이라는 쾌락에 장래에 이가 썩어서 생기는 아픔을 더했을 때 결국 총량적으로 손해이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쾌락과 고통의 총량에 대한 지식이 올바르면 사람은 손해나는 짓을 하라고 해도 안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결국 덕에 따르지 않고 쾌락에 지배당한다는 표현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뭐가 진짜 이익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문제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이 성스러움이건 용감함이건 결국 모든 좋다는 것은 쾌락과 고통의 총량이라는 한가지 원칙에 따라 다 설명되어 질 수 있으며 사람들이 덕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이런 지식이 없다는 것 즉 무지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쾌락에 지배당하는게 아니라 무지에 지배당해서 손해보는 짓을 한다는 것이죠. 21세기에 들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할 논리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뭐가 진짜로 좋은 것인지를 몰라서 저렇게 길게보면 손해보는 짓을 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 논리를 통해 결국 소크라테스는 덕성이란 지식의 문제니까 지식을 가르쳐서 덕성을 가르칠수 있다는 결론을 만들어 내는 논증을 한 셈이며 거기서 프로타고라스의 거부로 대화가 끝이 납니다. 

 

끝나지 않은 논증을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대신에 좀 더 이어본다면 이렇지 않을까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저런 이름이 붙지만 모든 덕성이 결국 쾌락과 고통이라는 혹은 좋고 나쁨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라고 논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어떤 것이 얼마나 좋은지 혹은 어떤것이 가지는 현재와 미래의 고통의 총량이 정해진 지식일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세상이 아주 단순하고 규칙적이라면 그럴수도 있겠죠.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꼭같은 행동도 누가 언제 어디서 했는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대학가는게 이득이 되었다고 해서 누군가가 대학에 가는게 이득이 된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 사람은 그 등록금으로 장사를 하는게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담배를 펴도 폐가 튼튼하여 건강하게 살지만 누군가는 금방 죽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말한 쾌락과 고통의 현재와 미래의 총량에 대한 지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을 더하면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덕성을 교육시킬 수 있다는 스스로의 주장을 철회해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프로타고라스는 이런 결말을 예측하고 논증을 접어버렸지 않나 싶습니다. 

 

결국 교육의 핵심적 부분은 자발성입니다. 스스로 눈을 뜨고 스스로 덕성을 발견해 나가지 않으면 외부에서 지식으로 덕성을 교육시킬 수 없다라는게 소크라테스의 본뜻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덕성이 교육가능한거라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싸구려 이데올로기 교육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객관적인 개념과 논리로 가치판단을 객관화하는 것이죠. 선배에게는 원래 공손해야 한다. 세금은 원래 내야 한다하는 식으로 남의 가치판단을 주입받아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을 도덕교육이라고 말하고 덕성의 교육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것은 노예나 로보트를 만드는 과정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교육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눈을 뜨고 덕성을 길렀을 수 도있지만 그 과정을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밟을 때 그 사람은 그저 로보트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조립공장에서 똑같이 조립하면 똑같이 나오는게 아니니까 같은 학교 같은 과정을 밟아도 그 결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무슨소리야 교육이 인간을 만들지라는 생각에 너무 빠지면 이런 것을 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성장의 자발성을 잊어버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오히려 억누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를 읽으며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점을 프로타고라스에게 설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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