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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2. 9. 21.

12.9.21

헤르만 헤세는 1943년에 발표한 유리알유희로 194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 책은 1930년부터 집필했다고 하니까 무려 13년간 집필한 헤르만 헤세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다. 유리알 유희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보다 몇백년뒤의 필자가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유리알 유희의 명인에 대한 전기를 쓰는 형식의 소설인데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자체가 작가가 글을 쓰던 20세기 초반을 한참 지나 출현하는 인물이므로 미래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미래소설이라고는 해도 비슷한 시대에 발표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1932)나 조지 오월의 1984 (1948)과는 달리 기술적 미래 발전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기계라고는 가끔 라디오와 자동차가 언급되는 것에 그칠뿐이다. 이것은 정신의 미래에 대한 미래소설인 것이다.

 

유리알 유희란 무엇인가

 

유리알 유희는 음악에서 회화, 수학과 물리학과 철학에 이르기 까지 모든 문화적 학문적 요소가 집약된 종합예술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이나 음악이나 수학이나 물리학이 아니지만 동시에 그런 것들과 동류의 것이라고 할수 있다. 모든 종류의 예술과 학문은 세계와 인간내부의 어떤 면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로서 공통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리알 유희라고 할때 그것을 음악이라던가 수학이라던가 혹은 바이올린 만들기라던가 초밥만들기라고 생각해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중국사람이나 조선사람들이 한문시를 지었던 것을 알고 있다. 한문으로 지어진 시는 엄밀히 말해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운률의 문제도 있거니와 한문으로 지어진 것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그 느낌은 다른 말로 번역할수 없다. 

 

그런데 한문시란 아무렇게나 한자를 늘어놓으면 한문시를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형식이 있다. 사실 한문시는 한문으로 쓴다는 것자체가 형식이다. 그래야 한문시를 읽는 다른 사람이 그 시를 통해 뜻을 전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태백이나 두보같은 명인들의 영향일 테지만 애초에는 그 형태가 있었을 리가 없었던 시라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지고 낭독되고 명품이라 인정받는 것이 나오면서 점점 형식이 자리잡는다. 

 

이와 같은 것은 서양의 고전음악도 마찬가지고 수학이나 물리학같은 학문도 마찬가지이며 포도주를 만든다던가 초밥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장기간에 걸쳐 많은 노력을 가지고 추구될때 이제 거기에는 명품이 생겨나고 형식이 생겨나고 전통이 생겨난다. 그 전통은 오랜 기간 쌓여진 지식과 경험의 탑으로 새로이 그 분야에 들어선 인물은 경쟁하거나 저항하기 불가능하며 통상 하나의 윤리적 규칙으로서 소중히 할 것을 요구당한다. 

 

유리알 유희란 이런 의미에서 앞에서 언급한 다른 학문이나 예술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20세기의 세계대전의 참화 끝에서 고상한 정신, 절대적 아름다움, 최상의 선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쌓아올려진 인간정신의 탑을 의미한다. 한문의 글자수보다 더 많은 상징으로 이뤄진 이 언어체계 혹은 게임은 고전음악의 명인인 마에스트로가 그러했듯 오직 타고난 재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만이 최고의 수준에 달할수 있는 고도의 지적 예술이다. 유리알 유희가 상연되면 많은 사람들은 높은 정신적 세계의 향연에 빠져들게 되는 그런 예술인 것이다. 유리알 유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야망을 포기하고 하나의 종교집단의 수도승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이 예술로 이뤄진 세계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데 몸과 정신을 다하기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리알 유희가 예술로서 완벽하고 고난도의 것인 것 만큼 더더욱 전통은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그 전통을 극복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극복해 낼 수 있는 일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권위는 하나의 전통을 만들고 닫힌 세계를 만들어 낸다. 전통이란 보존하기 위한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전통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동시에 닫힌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따라서 그 전통이 오래 되어가면 이제 그 전통 안의 세계, 그러니까 소설에서는 유리알 유희를 보존하고 발전 시키는 세계인 카스탈리엔이라는 수도회 같은 집단은 그 바깥의 세계와 분열되게 되고 점점 더 연결점을 잃어가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 최고의 엘리트로서 명예를 누리며 카스탈리엔의 세계를 매우 사랑하지만 동시에 카스탈리엔의 세계는 죽음으로 가는 길에 서있다고 믿게 된다. 사실 소설속의 세계에서 이미 카스탈리엔은 존경은 받되 많은 보통 사람들 -세금으로 카스탈리엔을 먹여살리는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현실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것으로 관심바깥으로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요제프 크네히트는 동료와 고급의 지식을 가진 학생들을 떠나 유리알 유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사이로 가기로 결정한다. 최고의 명예와 친구들과의 우정을 뒤로 하고 카스탈리엔을 떠난 요제프 크네히트는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절대를 추구하는 고전적 가치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시대의 독일을 살았던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이 두 명의 독일사람들이 보여주는 정서는 질서와 시간을 초월한 진리, 아름다운을 추구하는 정열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욕망을 절제하고 인생을 바치는 것, 마치 수도승이 종교에 헌신하듯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삶의 의미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21세기의 우리는 이미 전혀 다른 공기를 마시기 시작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같은 것을 읽으면 우리는 훨씬 개인적이고 거대한 가치나 명분따위는 사라져 있는 가벼운 삶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절대를 추구하던 정신이 결국 전체주의를 만들고 전쟁을 만들어 냈다는 과거가 만들어 낸 역풍일 것이다. 하루키만 해도 1960년대 일본의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다. 헤겔이니 막스니 하는 이야기를 떠들어 대며 학생들을 선동하던 사람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나쁜 감정을 가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어느 한편으로는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삶에서 동떨어져있고 그들이 위선적인 삶을 사는지에 대해 허무감에 빠졌을 법도 하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 학생운동의 리더들이 다수 정치권에 유입되었지만 그들이 정말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들도 결국 자기들끼리 서로 뒤를 봐주는 패거리주의를 가졌다는 것을 종종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젊었을때 절대를 추구하는 정열이 없는 자는, 다시 말해 일찌감치 세상에 대해 다 알았다면서 자기의 성에 틀어박혀 버리는 자는 그것 나름대로 아름답지 않다. 비록 절대라는게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보는 이상주의자가 멋져 보인다. 모든 꿈과 이상은 그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 그것이 틀려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쓸모를 가진다. 우리는 독재자나 전체주의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제 아무리 머리를 터지도록 돌려도 이 세계가 이 머리안에 다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나 그래도 시간을 초월하는 혹은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만들고 발견하고 그런 흔적을 세상에 남기는 것은 항상 우리 가슴을 뛰게 한다. 

 

예언은 이뤄졌는가

 

앞에서 언급한 1984년이나 멋진 신세계같은 소설도 나중에 예언이 이뤄졌는가 아니면 터무니없이 틀렸는가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이 있었듯이 우리는 헤세가 그리는 미래가 과연 이뤄졌는 지 아니면 틀렸는 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점검은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과연 유리알 유희라는 작품안에 존재하는 가치가 현재시점에서 아직도 얼마나 유효한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언뜻봐서 사실 이런 질문은 말도 안되는 것같다. 유리알 유희따위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어디에 카스탈리엔같은 수도승집단이 있다는것인가. 이 세상은 고도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상징체계는 커녕 날로 쉬워지는 멀티미디어로 가득찬 세계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유리알 유희를 읽기전의 일로 내가 어렸을때 그러니까 막 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을때가 생각난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고 물리학과에 들어가는 일을 돈을 벌거나 유명해진다거나 무슨 졸업장을 딴다거나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일종의 종교단체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꼈던 적이 있다. 나로써는 드디어 물리학같은 것에 관심없던 사람들 사이를 떠나서 세상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같이 떠들고 배울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곳이 내가 사랑하는 세계다. 이렇게 느꼈던것이다. 

 

그렇게 해서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박사를 하고 연구원이되어 논문을 쓰고 했던 지난 세월은 돌아보면 놀라울만큼 카스탈리엔의 모습을 연상시켜준다. 세상과 떨어져 있다는 그 비극적인 모습조차도 말이다. 학계를 먹여살리는 것은 물론 일반인들의 세금이다. 그러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일반인들과의 연결고리는 지극히 약하다. 물리학을 예로 들자면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물리학전공자들이 세미나에서 떠드는 소리는 그 복잡하고 어렵다는 유리알 유희의 상징체계 이상으로 이해할수 없고 추상적인 것일 것이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선배과학자들이 만들어 낸 틀속에서, 그들이 만든 것을 배우고, 그것에 감탄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물리학의 중요한 연구과제인 상온초전도체 이론분야 같은 것을 공부해 볼라치면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 관련분야에 제출되어 누적된 이론적 성과의 양이 -비록 아무도 완전한 이론적 해명에 이를수 없었지만- 이미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한번은 동료와 함께 과학연구비에 세금을 얼마를 써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한 돈을 아까워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단순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어진 돈이 과연 거대 가속기를 만드는데 쓰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저소득층의 의료문제를 개선하는데 쓰여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등장했을 때 알 수 없는 미래의 가치에 어느정도까지 투자해야 할 것인가가 항상 확실할 수는 없다. 확실할 수가 없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태도를 지닌다는 것은 이미 그 동료가 세상과 떨어진 카스탈리엔 수도회의 수도승 같은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만 이럴것인가. 철학도 그렇다. 사람들은 과학처럼 철학도 존중하지만 무시한다. 시민들의 세금과 대학등록금은 대학을 유지하고 연구원과 교수들의 월급을 주는데 쓰이지만 동시에 그 복잡한 말의 성찬이 어떤 삶의 지혜를 주리라는 기대는 아주 오래전에 포기해 버린 것같다.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내 좋은 형이나 좋은 이웃이 되는데 철학이 아무 쓸모도 없다면 도대체 그 철학이란 건 뭐에 쓸모가 있다는 것인가. 그들도 유리알 유희를 즐기고 있을 뿐 아닌가?

 

문학도 그렇다. 소위 한국의 순수문학이라는 것은 일반대중의 관심을 떠난지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순수문학이라고 하면 아!라고 탄성을 지른후 대충 무슨 이야기하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 대개는 그저 할일없고 허영많은 사람들이 가끔 보는, 심성이 배배꼬인 쓸모없는 인간들에 대해 끝없이 사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일수다. 

 

이렇게 세상을 둘러보면 헤세의 미래는 실현되어 있다. 온세상의 대학이라는 곳은 바로 카스탈리엔의 일부들이며 이 세상과 동떨어져서 대중에게 그다지 쓸모있는 것은 뭐하나 주지 않으면서 전통에 깔려 신음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은 토막토막이 나서 어디에 쓰는 것인지 조차 불명확해 보이는 지식의 조각들을 제공할 뿐이며 그것을 받아든 학생들은 허영심에 기뻐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진지한 학생의 경우 난감한 마음만 느끼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대학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면 어디에 쓸모가 있다는 것일까. 즉 카스탈리엔 안에서 유리알 유희의 지식은 쓸모가 있지만 세상에서 그것이 의미가 별로 없듯이 우리가 대학에서 배우는, 종종 문맥이 상실되어 가르쳐지는 지식이란 것이 대학원 진학용이나 학계내부에서 논문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헤세는 극단적인 가치관 충돌이만들어 내는 전쟁의 시대를 살면서 지식인의 무능과 타락을 목격했을 것이다. 정신적 가치를 지켜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인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지식인은 그나마 시대의 양심이라 할만 하다. 적극적으로 세상에서 지식인행세를 하면서 온갖 중요하지 않은 잡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넣을 뿐만 아니라 2더하기 2가 뭐가 되는가는 정부가 정하는것이라는 식의 왜곡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지식인을 보면서 헤세는 카스탈리엔의 붕괴와 죽음을 생각해 냈을지도 모른다. 매우 고상하지만 동시에 매우 현실과 동떨어져서 무능해져 버린 전문가집단에게 슬픔을 느꼈을지 모른다. 

 

헤세의 눈으로 오늘날의 세계를 볼때 우리는 많은 카스탈리엔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앞에서 거론한 과학, 철학, 문학같은 것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미국식의 가치관, 미국식의 꿈은 얼마나 많은 유리알 유희 공연에 의해 찬양되고 주입되어져 왔는가. 그러나 카스탈리엔의 바깥이 있듯이 그 미국식 꿈의 바깥세상도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헤세의 작품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포스트모던한 것에 질려있는 우리, 방만해진 우리에게 질서있고 꿈있으며 열정이 있는 시대에 대해 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면도 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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