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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쉬뢰딩거의 나의 세계관 : 길을 찾아서 (2)

by 격암(강국진) 2012. 10. 23.

원자적 세계관에서의 탈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상황에 있는가를 1-3장에서 지적한 후에 쉬뢰딩거는 4장에서 형이상학적 전환을 촉구하기 위해 통상의 세계관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지적하는데 그 지적이 종국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통상의 세계관은 분리, 분열되는 세계를 말하는 것에 비하여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고 뭉쳐진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에세이의 마지막에 가서 설명되어지는 윤리적인 측면에 있어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쉬뢰딩거는 말하고 있습니다. 

 

쉬뢰딩거의 지적은 먼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대개 세계를 논하는데 있어서 나를 논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세계에서 나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 세계가 미국과 한국과 중국과 유럽등 여러 나라로 되어 있다라던가, 빅뱅이후 생겨난 입자들이 모여서 태양계를 만들고 거기서 지구가 생겨나고 하는 식으로 설명될 때 나는 굳이 나라는 존재를 그 설명속에 넣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나없는 지구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를 논하는데 다른 한가지를 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가 없는데 아래가 있을 수 있을까요? 바깥이 없는데 안이 있을까요? 우리가 세계를 논하는데 나를 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 즉 내가 없는 세계를 상상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형이상학적 가정입니다. 우리는 아래가 없는 세계의 위라던가 바깥이 없는 세계의 안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래와 위가 안과 바깥이 서로 분리불가능한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없는 세계라는 것은 어떻게 들립니까? 그것은 당연하고 상상가능한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쓰는 언어가 만들어 낸 허상은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가 나라는것에 대해 가지는 어떤 가정때문이 아닐까요?

 

쉬뢰딩거는 인식론적인 논의를 통해 우리가 막연히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 그 자체로 추상적 개념임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알고 인식하는 세계란 결국 우리의 머리속에서 우리가 자기라고 부르는 이 몸의 일부인 뇌안에서 만들어 낸 세계입니다. 우리가 통상 말하는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상이란 그 자체가 추상이다. 우리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죠. 

 

눈앞에 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이렇다고 할 때 그저 나무가 보이니까 여기 나무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철학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바깥에 뭔가가 있다고 해도 나무는 그 바깥에 있는 뭔가가 주는 신호를 기반으로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낸 개념이고 이미지입니다. 제 아무리 멋지게 어떤 나무를 묘사하는 글을 써도 그 글은 반드시 그 나무자체에 대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공간적으로 바깥이니 안이니 하고 생각하는 것자체가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낸 개념이다. 

 

요즘에는 온라인 게임같은게 있습니다. 그 게임을 하려고 로그인하면 화면에 공간이 펼쳐집니다. 거기에서 다른 캐릭터가 당신에게 당신은 어디에 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당신이 조종하는 온라인 게임속의 캐릭터가 화면의 한쪽을 가르키면서 나는 여기에 있다거나 저기에 있다고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락속의 거리개념은 오락바깥의 세상에서 말하는 거리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라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의 뇌가 가상적으로 만들어 낸 공간입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가상공간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나는 지구의 어떤 나라에서 책상앞에 앉아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히자만 이 문장은 언제나 의미를 가지는것일까요? 모든 것이 내 뇌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까?

 

이 세계가 나에 의해 인식되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난후에 쉬뢰딩거가 눈을 돌리는 것은 내가 아닌 너입니다. 이 세계에는 나 아닌 다른 많은 존재 특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타인이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들도 나와 같은 존재라면 그들도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같은 세상에서 살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감각인상에서 결코 물자체 즉 진짜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세계는 하나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도 이 지점에 이르러 칸트와 마하같은 철학자들은 독단적으로 세계는 한 개로 존재한다고 선언해 버린다고 쉬뢰딩거는 말합니다. 여러가지 의식을 가진 존재, 여러명의 사람이 각자 나름대로 세계를 만들어 내는데도 그것이 다 같은 세계인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쉬뢰딩거는 이런 독단론은 황당한 것이며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애초에 너와 나가 각각의 존재라는 개념자체가 허구라는 것입니다. 한개의 세상이 존재한다면 한개의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물론 문제는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어디까지 느끼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문장의 의미는 어떤 문맥에서 보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논리적 시각이 배타적이고 분리적이라는 것은 쉽게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원자가 하나 있다라고 합시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다른 모든 것이 없이도 원자하나가 존재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과학적 세계관은 이 원자를 제외한 모든 것을 하나의 배경으로 돌리고 그것들을 임의로 지워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적이고 논리적 시각은 정의를 도입하는 개념화로 시작되기 때문에 이런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위와 아래 같은 개념은 이렇게 분해가 되질않습니다. 말하자면 원자 이외의 것을 모두 치워버리면 원자도 없어지는 관계입니다. 보다 실생활의 예를 들어 봅시다. 여기 하나의 부부가 있다고 해 봅시다. 그 부부중의 여자를 가르켜 여기 아내가 있다라고 지적하면 당연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라는 집단은 남편과 아내의 합이라는 이해가 과연 옳은 것일까요? 예를 들어 저 집 남편은 형편없어라고 말한다고 해 봅시다. 그 형편없는 남편은 마치 물위에 뜬 기름의 모양같은거 아닐까요? 기름의 모양이란 결국 물과 기름사이의 경계선의 모양이고 그것은 물의 모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런 관계에서 기름을 가르켜 저 기름은 못생긴 모양을 가졌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실생활에서 종종 남의 부부싸움에는 함부로 끼어드는게 아니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부부간의 일에 대해 이게 옳다 저게 옳다라고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항상 뭔가 우리의 틀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따라서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한 외부로 부터의 간섭에 의해 정의가 실현되지 않습니다. 나의 공평개념이 타인의 공평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남편에게 매일같이 잔소리를 하는 여자라도 그 여자를 사랑스럽게 보는 남편은 같이 살아줘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없는 타인이 거기에서 공평한 관계를 논해봐야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 눈에는 세뇌나 노예같은데 그들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오히려 내가 비정상이라고 말할테니까요. 그때문에 우리는 남편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여기 이러저러한 아내가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남편을 분리하고 아내를 말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분리가 불가능하니까 남편과 아내라는 두 존재의 상호작용으로 부부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떤 오류를 가집니다.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한다면 전혀 다른 행동을 하며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 때 큰 상식수준안에 있다면 어떤 객관적 기준으로 이 부부는 정상이고 저 부부는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통상의 과학적 시각이란 이렇게 환원론적입니다. 그것은 사물이 각각 떨어져서 홀로 존재하고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아주 많은 경우에 대단히 훌룡한 근사이며 무한히 진실에 가까울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형이상학적 전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즉 과학은 어떤 형이상학을 전제하고서 작동을 시작합니다. 따라서 과학이 그것을 증명하기위해 쓰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앞뒤가 뒤집어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생명과 같은 유기체를 이야기할 때 과학은 일정한 약점을 가진다. 사실 생명의 과학적 정의자체가 아직도 정확히 없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과학은 예술을 논할 수 없고 윤리를 논할 수 없습니다. 

 

쉬뢰딩거는 베단타 철학을 거론하면서 이 세상에 하나의 존재, 하나의 의식밖에 없다는 결론이 인도철학에서는 낯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쉬뢰딩거가 이 뒤의 여러장들에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이 실상 하나의 의식이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덧붙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느낌을 가지는 것이라고 쉬뢰딩거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쉬뢰딩거는 정상이 눈으로 덮힌 거대한 산을 상상하고 그 산이 몇천년의 세월동안 그 모습을 지켜왔으며 내가 그것을 보기 이전에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 산을 봤었다라고 상상해보라고 제안합니다. 그 산을 본 그 다른 사람들이 정말 다른 사람인가 그들은 결국 내가 아닌가 하는 점을 느껴보라고 제안합니다. 쉬뢰딩거는 철학은 논리이전에 인식이며 체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논의란 결국 어떤 증거와 논리를 쌓아서 증명하는 작업이 핵심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의 문화, 하나의 패러다임, 하나의 믿음을 유지하고 그것을 토대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과는 다른 것은 보는 것은 일단 당신의 그 믿음을 허물어 뜨려야 가능합니다. 당신이 스스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보이지 않는 믿음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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