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쉬뢰딩거의 나의 세계관 : 길을 찾아서 (3)

by 격암(강국진) 2012. 10. 24.

2012.10.24

인식론적인 논의를 통해서 통상의 상식적 세계관도 사실은 추상적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연후에 쉬뢰딩거는 이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 즉 이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의식만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던지 간에 여러가지 의미에서 우리는 비트켄슈타인의 오리라고 알려진 아래의 그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같은 그림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그림은 토끼 그림으로도 보이고 오리 그림으로도 보입니다. 이 경우 이것이 오리인가 토끼인가 하는 질문에는 물론 정답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과학적이고 환원론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과학의 패배라던가 실패로만 생각하는 것은 오해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항상 그런 것일 수는 없습니다. 과학은 수없는 검증을 통해 쌓아온 것이니까요. 쉬뢰딩거는 반복적으로 이 세상의 통합성을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쉬뢰딩거가 우리가 과학으로 측정하지 못한 제5의 힘을 발견했다 같은 이야기로 봐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리는 오리 그림속의 토끼처럼 눈앞에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림을 돌려보지 못하기에 보지 못할 뿐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왜 내가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습니다. 이제 쉬뢰딩거의 이야기는 기억이라던가, 생명현상, 의식, 뇌같은 주제로 뻣어가는데 그 이유는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세계를 구분하고 인식하고 하나니 둘이니 하고 이름붙이는 일들이 그런 것들과 관련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의식에 의해 인식되고 의식은 생명현상의 일부라고 생각되어지고 특히 뇌의 구조와 연관을 가진다는 논리에 따라 그런 것들이 언급될 필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관점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 순서를 좀 바꿔서 쉬뢰딩거가 8장에서 소개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좀 소개해 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쉬뢰딩거는 생명과 비생명을 나누는 것은 관점의 문제이지 그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그저 원자들의 집합으로 보고 생명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는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두 물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비생명으로 보게 만듭니다. 난 그런 적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럼 생명이 뭔데 라고 물으면 스스로 움직인다던가, 발로 차면 반응이 있다던가 하는 생명의 특징을 말할텐데 그렇다면 장난감로보트는 왜 생명이 아니란 말인가 하고 우리는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당연하지 모든 건 결국 물질이고 기계야라는 말을 너무 쉽게, 너무 강하게 믿어서 윤리적이고 가치판단적인 측면에 있어서 불안감을 줍니다. 이런 일들은 어딘가에 선을 그어서 그 선의 바깥쪽에 있는것은 생명이라하고 그 안쪽에 있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고 이름붙이면 금방 모순이 발견됩니다. 살아있다는 게 뭔가 하는 질문은 결국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고 방금 전까지 살아서 나와 대화하던 상대가 죽어서 시체가 되는 것을 볼 때 과연 저 사람은 어디로 간걸까, 혹은 애초에 저사람이란건 존재하기는 한건가,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모두 아직 답을 모르는 질문들이죠. 결국 우리가 생명이 뭔지 모른다는 점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셈입니다. 

 

우선 쉬뢰딩거는 물질과 생명에 대해 이런 점들을 지적합니다. 비생명체인 물질에서는 물질은 보존하지만 핵심적 형태가 바뀔 수 있습니다. 살아있지 않은 철사가 구부러질 수 있듯이 말입니다. 반면에 생명은 물질은 신진대사에 의해 교환되고 변하지만 그 핵심적 형태가 유지됩니다. 우리의 몸은 계속 먹고 마시고 배설해서 물질을 교환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어떤 질서와 형태가 유지는 것을 봅니다. 생명은 이렇게 물질의 교환과 형태의 유지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쉬로딩거는 이런 점들을 지적한 후에 어떤 것이 생명인지 물질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그 대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점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다 물질이라는 말도 맞고 반대로 온세상이 모두 생명이라는 말도 맞습니다. 세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같은 것입니다. 

 

온 세상이 생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은 뭐야 세상의 대부분은 죽은 바위나 흙이나 별인데 헛소리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쉬뢰딩거는 또한 이 세상이 비 생명체인 물질로 되어 있다라는 물리학적인 시점 역시 매우 믿기 힘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사실 이미 앞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물리학에서는 우리는 여기 고립된 원자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원자의 상태를 근사적으로 만족시키는 상태란 물질이 거의 없는 진공상태의 빈 우주공간 쯤이다. 이 세계를 잘라내어 설명할 때 가정에 한계가 있고 결국 물질이라고 하는 것도 생명이라고 하는 것 이상으로 추상적인 형이상학적인 대상이다. 다시 말해 온 세상이 모두 연결되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시각으로는 온세상이 하나의 생명이고 온세상이 하나도 연결되어져 있지 않고 각자 존재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온세상이 모두 물질이며 생명은 하나도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뢰딩거식으로 생명을 논의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론입니다. 생명이라 하면 유전자를 가진 것이 생명이다 라는 식으로 우리는 생명을 다르게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과 비생명의 구분이 관점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정의했을 때 우리는 통상 생명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느끼는 느낌과는 어떤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정의한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 생명의 이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유전자는 그냥 분자조각인데 우리는 정말 살아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요? 죽은 시체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생명을 그냥 DNA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나와 너의 구분

 

이러한 생명의 논의를 읽으면서 우리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우리는 과연 나와 나아닌 것으로 세상을 잘라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필 거기서 세상을 잘라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의 팔을 나의 일부라고 느낍니다. 나의 팔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나에게 감각신호를 보내서 나를 아프게도 즐겁게도 하는 나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 팔이 나의 일부라고 말한다는 것을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여기 당신이 사랑하는 자식이나 배우자가 있습니다. 그들의 팔은 당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당신을 아프게도 즐겁게도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관계라는게 그런거 아닙니까? 당신은 당신 자식의 손이나 당신 부모의 손이 칼에 찔리는 것을 본다면 그 순간 통증을 느끼지 않을까요? 보기에 따라서는 당신의 팔은 그저 기계이며 당신의 일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관점으로 보면 당신이라는 것을 당신의 육체로 보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팔은 나의 일부이고 더 나아가 내 몸안의 세포들도 나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나는 국가라던가 사회라던가 하는 집단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쉬뢰딩거는 묻습니다. 왜 우리는 특정한 단계의 존재 즉 육체를 가진 이 인간만이 의식을 가진다고 생각하는가. 왜 인간의 몸뚱이 혹은 두뇌라는 특정한 기관의 주변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것만 의식을 가진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분리와 가정은 근거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의식은 온세상의 것들이 모두 동시에 작용해서 눈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쉬뢰딩거는 또 묻습니다. 우리가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잠이 들기전의 나는 지금의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잠이 들기전의 나는 나인데 왜 너는 내가 아니라 타인일까요? 우리가 꿈을 꾼다고 해 봅시다. 꿈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우리는 그것은 꿈이었으며 비록 그 꿈속에서는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한 것처럼 느꼈지만 우리는 그 꿈속의 나도, 그 꿈속에서의 그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사람'도 모두 나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가상현실속의 인격들이기 때문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이제 너와 대화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나는 나고 너는 너라고 굳게 믿으며 그건 변할 수 없는 당연한 사실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서 이건 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이것은 단 하나의 의식이 꾸는 꿈인 것은 아닙니까? 그 의식이 당신이 아닙니까? 

 

쉬뢰딩거는 우리의 몸과 기억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자체가 그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만들어 졌고 조상의 의지와 감정에 의해 만들어 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즉 우리는 조상들을 포함한, 그러므로 유전자를 포함한, 환경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들은 태어난 후에 배운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아는 것, 즉 물려받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새는 처음으로 둥지를 만드는 데도 그 둥지의 적당한 크기를 압니다. 동물만 그러는게 아닙니다. 인간은 이미 문명화되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도 흥분하면 전투적인 자세가 저절로 생깁니다. 성적인 취향을 포함하는 이런 성향들은 인간의 조상들이 주변의 환경에 적응한 결과가 전해진 것으로 그 자체가 기억의 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는 어느날 지금 이대로 이 순간에 팍하고 나타난 존재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세계의 영향들이 연쇄되어 그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과거와 세계와 나의 관계는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조상과의 관계를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이 단절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과 우리의 차이란 마치 물위에 떠도는 거품들 같은 것 일 수 있습니다. 거품들은 터지기도 하고 뭉쳐지기도 하고 커지고 작아지기도 하면서 변합니다. 그 결과 새로운 거품들의 패턴이 생겨나는데 과연 어떤 한 순간의 거품은 그 전의 거품들과 다른 거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파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부 바다가 아닙니까? 그렇게 다르다 다르다라고만 말하려면 우리는 태어난 이후 몸안의 모든 물질을 교환하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는데 20년전의 나는 나라고 인식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나를 있게한 조상들은 나라고 인식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조상들의 의지와 욕망의 화신이며 그들의 재현이 아닙니까?

 

여기에서 쉬뢰딩거의 길을 찾아서 중 6-8장을 소개하는 부분을 마칠까 합니다. 그러기 전에 두가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먼저  쉬뢰딩거의 말들은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하늘이 부는 피리소리를 연상하게 한다는 점입니다(http://blog.daum.net/irepublic/7888347 ). 나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자기는 장자에서 하늘이 부는 피리소리가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과 나를 분리하지 않는 시각을 강조한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즉 동양사상적 시각은 이미 이런 점을 포함하고 있으며 쉬뢰딩거만이 특별하게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쉬뢰딩거는 그의 문맥에서 그만의 증거를 가지고 말하므로 이 두 개의 메세지를 단순히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틀린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두번째로 이러한 논증내지 이론들이 얼마나 설득력있는 것으로 들리건 결국 중요한 것은 세상의 통일성을 느끼는 체험이라는 점입니다. 기막힌 경치를 보거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감동하거나, 영원불멸의 자연법칙을 찾아냈다는 기쁨을 느끼거나 혹은 우리가 누군가와 상호간에 사랑하는 관계라는 확신을 가지는 그런 순간들은 공통점을 가집니다. 나는 그것들이 바로 세상의 통일성, 나와 너가 분리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체험하는 순간들이 아닌가 합니. 그런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열정을 느끼고 뭔가를 열심히 하게 됩니. 그런데 과학은 그런 열정을 죽입니다. 과학은 정지되어 있고 모든 것을 외롭고 동떨어진것으로 파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윤리도 이런 상황에서는 황폐화되기 쉬운 것입니다. 반면에 과학하기는 그렇지 않으며 진정한 과학자는 과학 자체 이상으로 과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열정에 차있으며 변화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지는 비과학적인 열정과 신념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