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쉬뢰딩거의 나의 세계관 : 길을 찾아서 (4)

by 격암(강국진) 2012. 10. 24.

이제 우리는 에세이의 마지막 두장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쉬뢰딩거는 의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이제까지의 에세이에서 말했던 것의 연장에서 우리는 윤리적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를 논합니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거나 적어도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도 의식이 있다고 가정만 할뿐 그가 대답하는 자동인형인지 의식이 있는지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의식하는 내용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다 모릅니다. 나의 선택은 의지의 작용이지만 남의 선택은 물리적 법칙의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철학자들간에서 좀비논쟁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방향으로 가는 논증은 우리의 경험에서 보다 분명합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 의식을 분명히 느끼게 되는가는 분명하다는 겁니다. 뇌의 활동중에서 적어도 어떤 부분은 의식적인 느낌없이 행해집니다. 우리의 심장은 의식없이 뛰고 우리 몸의 홀몬작용이나 온도조절같은 것도 무의식적으로 처리됩니다. 숨쉬기같은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쯤에 존재해서 우리가 일부러 신경쓰지 않으면 우리는 숨쉰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경우에따라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매우 익숙해진 것들이 의식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생각에 골몰해서 집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은 길을 찾는 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 길을 매일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걷기위해서 다리와 몸의 근육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를 일일이 신경쓰지 않습니다. 몸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길을 갑니다. 익숙한 것들이 우리의 의식에서 사라지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보는 것 조차도 망막위에 같은 그림을 계속보여주면 그 그림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이유는 우리의 몸과 눈이 끝임없이 움직여서 세상을 계속 다르게 보기 때문입니다. 거울장치를 이용해서 망막의 같은 장소에 같은 물건이 계속 보이게 만들면 그 물건은 곧 우리의 의식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들에 주목하면서 쉬뢰딩거가 내리는 결론은 우리의 의식이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인식하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인식대상이 되는 것이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식의 내용이란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즉 이렇게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가 알고 있고 인식하는 모든것, 바로 이 세계의 모든 것, 우리가 누구라는 사실들조차도 모두, 우리는 그것들이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그 불확실성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같은 것들은 그 존재조차 망각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들은 그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이 그렇다는 것은 우리의 뇌가 그런 기관이라는 것이고 나아가 우리의 몸전체가 그런 것이며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생명이란 그리고 우리의 몸이란 과거에 있어서 무수하게 반복하여 일어난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한 역사책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개체발생에 있어서 종의 진화가 반복되어지는 모습에서 그것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수정란이 성체로 변하는 과정은 마치 그 종이 진화한 과정을 모두 반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약된 역사의 일부분이 우리의 의식의 내용이 됩니다. 여기서 불확실성은 그 핵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확실한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는 기관이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게되는데 그 기관이란 물론 뇌입니다. 뇌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우리가 통상 뇌라고 부르는 기관이 없는 존재인 식물이나 심지어 무생물도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모든 역사의 기록이 의식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쉬뢰딩거는 이 장에서의 의식에 대한 논의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변해가는 것 (becoming)이 의식이고 가만히 존재하는 것(being)은 무의식이다. 

 

윤리적 결과

 

이제까지의 세계관을 종합해서 보았을 때 그것이 가지는 중요한 장점은 바로 윤리적인 면에 있습니다. 먼저 기본적인 것을 하나 지적하자면 우리와 세계와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한 책임감,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와 세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우리가 서로가 없이, 환경이 없이 정의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사랑이나 희생정신은 정신적 착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기 쉬운데 이것이 바로 과학적 세계관이 종종 이해되는 방식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동물과 산과 나무와 강을 볼 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통일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며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쉬뢰딩거는 전부가 아니라면 대개의 윤리적 논란에는 항상 자기를 극복하는 일이 관련된다는것을 지적하면서 그의 형이상학적 논의가 어떤 윤리적 태도를 가져다 주는지, 나를 어떤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요약합니다. 

 

윤리라고 하면 우리는 즉각 어떤 금기를 적은 항목들을 떠올릴정도로 그것을 자기절제와 동일 시 합니다. 예를 들어 훔치거나 폭력을 행사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윤리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원초적 본능과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 윤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윤리적인 삶이란 자기의 욕망을 억누르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현대로 들어와서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은 종종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하고 우리는 우리의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런 욕망은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태도라고 하는 생각을 퍼지게 했습니다. 삶은 곧 쾌락의 추구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윤리는 삶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쉬뢰딩거는 앞의 논의를 환기시키면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 즉 우리가 나라고 의식되하는 존재는 사실 그 근원자체가 과거와의 싸움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을 본능이나 욕망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이제까지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기계처럼 파악하지만 쉬뢰딩거는 인간의 핵심은 의식이며 의식은 자기를 초극하는 것에 그 핵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는 우리가 이러저러한 본능을 가졌으므로 그런 충동이나 욕구를 따르는게 자연스럽다고 말하지만 완전하게 습관이 된것은 아예 의식의 대상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럴까 저럴까 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실은 그걸 이래야 할까 저래야 할까가 확실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식할 수 있는 욕망은 결코 당연한 욕망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행동이 다시 역사가 되고 세상에 남아서 인간을 진화시키게 됩니다. 우리의 존재는 끝없이 우리의 행동과 감정을 기록하는 기록기같은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식이 있는 존재라는 것은 우리는 진화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습관과 본능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쉬뢰딩거는 인간은 개미나 꿀벌들이 이타적인 삶을 살듯이 인간도 이타적인 문명을 만들고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진화중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의 우리는 보다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윤리적인 고민과 선택을 통해 우리의 앞으로의 진화방향을 결정해 나갈 것입니다. 

 

낭만주의적 관점은 진리는 이미 우리안에 있으며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면 그 진리가 실현될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쉬뢰딩거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의식하는 세상은 불확실성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의식적 선택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쉬뢰딩거의 관점은 그저 욕망에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주장을 유치한 것으로 만들고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것을 촉구합니다. 

 

맺는 말

 

이 에세이의 제목은 seek for the road로 번역하자면 길을 찾아서 쯤 될 것이지만 한문식으로 번역하면 구도( 求道  )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하면 이 에세이는 쉬뢰딩거의 구도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짧은 에세이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케일로 치면 다른 어떤 철학책보다 더 큰 면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철학을 하는 분명한 이유, 처음과 끝이 잘 들어나 있다는 느낌입니다. 긴 논증의 일부분만 보여주는 느낌이 없고 이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담겨있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철학은 보다 행복하고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쉬뢰딩거는 왜 철학을 하는가 같은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지만 윤리적인 의미를 논하고 나의 의미를 논하면서 짧지만 일관성있는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것에 도달한 그의 에너지는 그의 고민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이 에세이는 그의 철학적 고민들을 따라가면서 그의 구도를 다시 요약하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쉬뢰딩거도 그렇고 하이젠베르크도 그렇고 백년전의 과학자란 요즘의 과학자와 많이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구도를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보건간에 말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