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30
헤세의 싯달타를 다시 읽었다. 읽은 김에 그에 대해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서 기록으로 남겨둔다.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스스로를 구도자로 여겼다. 그는 인도 사상이나 노장, 유교사상등에 일찍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데 이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었던 아버지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교육가로 불교에 정통했던 외삼촌을 둔 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았던 간에 그 교육은 그가 14세에 신학교에 들어가고 그 다음해에 그 신학교를 뛰쳐나옴으로써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는 신경쇠약증에 걸리고 첫사랑때문에 자살기도를 하기도 한 끝에 김나지움에 다시 들어가지만 결국 16살에 학업은 중단되었다. 소설가로 성공하기 전까지 그는 내내 방황한다. 신학교에서 탈출했을 때 그는 시인이 되지 못할 바에는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이런 그의 과거를 보면 데미안이라던가 지와 사랑같은 작품들은 물론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일종의 자전적 소설로 느껴지며 그는 작품을 씀으로해서 그를 괴롭히던 삶에 대한 내적인 질문들을 답하려는 구도의 길을 걸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싯달타는 헤세가 40대 초반이던 1919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1922년에 완성한 소설로 부처의 삶에 다가 여러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만들어 낸 구도소설이다. 헤세는 이 소설을 쓰면서 초반부의 출가생활까지를 쓰고 나서는 소설을 중단하고 우울증을 앓은 끝에야 이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어떤 기교를 통해 인기있는 소설을 쓰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도 답이 될수 있는 구도의 결실을 맺겠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는 체험과 고민없이는, 진심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면, 소설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의 주인공 싯달타는 널리 알려진 부처님의 어린 시절처럼 부유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훌룡한 재능까지 겸비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뭐하나 부러울 것이 없어보였던 싯달타지만 그는 그런 생활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거나 진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친구 고빈다와 함께 무소유와 자제의 수행을 하는 사문이 되기로 하면서 그의 평생에 걸친 구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싯달타는 출가한 사문의 삶에서도 답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거기에 답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답을 찾았다고 생각되는 깨달은 자, 고타마 부처를 만나고 확신하게 된다. 그는 그 만남을 통해 진리는 말로 전해 질 수 없으며 스스로의 체험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고 고타마의 제자가 되는 대신 사문생활을 마치고 세상 자체를 자유롭게 경험하는 길을 떠난다.
이렇게 야심차게 세상으로 뛰어든 싯달타는 많은 성공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쾌락을 누리지만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 생활은 그나마 그가 사문생활을 그만두기 이전에 얻었던 몇가지 능력, 즉 기다리고 생각하고 단식하는 능력따위까지 잃어버리게 만든다. 어느날 싯달타는 깨닫는다. 그는 이제 정말 완전히 모든 것을 잃고 구도따위는 하나도 하지 않았던 어린아이 때처럼 빈 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싯달타는 좌절한다. 그는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 하기에 이른다.
자살 기도에서 살아난 싯달타는 기력을 회복하고 뱃사공의 생활을 하면서 구도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단일성을 자각하는 길이며 사랑의 길이었다. 소설에서 그것은 강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자식에 대한 사랑 혹은 집착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단일성 혹은 커다란 사랑을 깨닫고 평화의 경지에 이르르게 된다. 소설은 오랜만에 만난 옛친구이자 아직도 진리를 찾아 헤매는 승려인 고빈다에게, 말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깨달은 것에 대해 말해 주는 것으로 끝난다. 고빈다는 친구 싯달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싯달타의 이마에 입맞춤하는 행위를 통해서 거기에 부처, 고타마와 다르지 않은 깨달은 자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에게 머리를 숙인다.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그것이 비록 작가의 의도는 아닐지 몰라도 이 소설을 개인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읽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구에서 종교적이었던 르네상스 이전의 시기는 말하자면 사문의 시기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기는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 안에서 평화와 행복과 진리를 추구하던 시기다. 기다리고 생각하고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던 시기다. 현실이 어떠하건 적어도 그렇게 믿어지고 주장되어지던 시기다.
그런데 그 안에서 답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제 주체 즉 자아에 눈을 돌린다. 이것은 내 눈으로 세상을 보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고타마를 등지고 자기눈으로 세상을 보겠다던 싯달타처럼 사람들은 실험과 관찰을 강조하며 자기눈으로 세상을 보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것이 과학과 산업혁명의 바탕이 되었던 관점의 전환이었다. 배우고 노력하여 쾌락을 충족시키던 싯달타처럼 인간은 지식이던 재물이던 도시던 건물이던 많은 것을 쌓아올리고 소유한다. 그리고 그 풍요와 소유를 즐긴다. 영원한 번영의 끝에서 행복의 길을 찾을수 있을 것을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변화는 많은 물질적 사회적 발전을 가져왔지만 뒤돌아보면 행복과 가치라는 측면에서 결국 인간들을 방종하게 만들고 타락시키는 것 이상을 하지 못했다. 결국 욕망의 충족이라는 것에 몰두했던 사람들, 그저 나, 나, 나를 외쳤던 사람들은 나 아닌 것을 정복하고 소유하는 것에 몰두했고 그렇게 끝없이 커져간 욕망은 사람들을 더 깊은 절망과 허무 속에 빠뜨렸던 것이다.
헤세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1919년은 1914년에서 18년까지의 세계 1차대전이 끝난 직후였다. 그에게 있어 세계대전이란 서구 문명의 완전한 파산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전쟁이 만들어 낸 폐허는 그 파산이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파산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서구인으로서 그는 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근대를 통해서 자아를 통해서 과연 우리는 뭘 획득했을까? 우리는 물질문명의 발전속에서, 자아를 높이 추켜세웠던 세월 속에서 결국 더 행복해 졌는가? 우리는 기다리고 절제하고 생각하는 능력만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결국 빈손이 되어버린 것을 알고 자살하려고 했던 싯달타는 허무함속에서 스스로 붕괴하려고 하는 우리의 문명 그자체가 아닌가?
이러한 문명적 파산의 잿더미 속에서 헤세는 결국 나, 나, 나하고 자기만을 쳐다보다가 그 바깥에 있는 주변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 오류였다고 느낀 듯하다. 우리는 주변을 보고, 주변을 느끼고, 이 세상이 돌멩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전체, 단일한 하나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 바로 개인과 문명이 나아가야할 길이라고 싯달타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싯달타가 강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이 우리도 모두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개인적 파산, 문명적 파산에서 부활하는 길이며 우리의 목표다.
이 같은 메세지는 틀리다 맞다의 수준에서 이야기 할 바가 아니다. 다만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없는가 라던가 그것으로 충분한가 하는 것에 이르면 몇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내게 있어서 문제내지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 점은 이것이다. 종국적으로 소설속에서 고타마도 싯달타도 어떤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리를 찾은 것이다. 고빈다는 싯달타에게 그것을 말해달라고 하고 싯달타는 그것이 말로 전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전해질 수 없다고 해도 찾은 것은 찾은 것이다. 진리에 도달해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평화에 이른 자가 존재한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우리도 싯달타가 되고 고타마가 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싯달타와 고타마가 평화에 이른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제한된 존재로서 어디에 이르르건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지금보다 우리가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게 된다고해도 여전히 우리는 제한되고 유한한 존재일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이건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 영원한 행복을 가지게 되지는 않는다. 그 말이 어떤 상태나 단계에 이르르는 것이 의미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모두 굶어 죽기 전의 상태에 있다면 우리가 이르러야 하는 수준은 적어도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음식을 구할 수 있는 나라이며 그런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것에 어떤 오류는 없다. 그러나 일단 배가 채워지면 우리에게는 다른 고민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먹을 걸 구한게 바보짓인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가 뭔가를 깨달으면, 혹은 득도하면 문제없는 상태에 이를 것이라는 것, 어떤 최종적 진리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은 위험하다. 그것은 현재에 대한 지나친 부정이 되기 쉽다. 미래도 결코 완벽할 수는 없는데 흑백론으로 문제가 있는 지금은 지옥이고 문제가 전혀 없는 천국으로 가야만 한다고 믿게 되고 극단적이 되기 쉽게 된다. 또한 그와 같은 이해나 태도는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고민이 있으면 우리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해석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우리를 좌절하기 쉽게 만들고, 나는 답을 안다고 주장하는 기이한 확신범들에게 광신적으로 믿음을 주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 좋은 대안을 말해줘도 그것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배우는 것이 없게 된다. 완벽이 뭔지에 대해서 그토록이나 아는 것이 없으면서 말이다.
완벽한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말은 낡은 논리를 기억나게 한다. 그것은 완벽한 진리가 있다없다는 말이 애초에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인생이란 해바라기다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어쩌면 최종적 진리일 수 있다. 문제는 유한한 우리는 영원히 그 의미를 전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고 다른 경험을 하게 되면 같은 말도 다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느껴진다. 인생이 해바라기라는 최종적 진리를 찾았다고 해도 그 의미는 영원히 바뀌고 커져가는 것이 되는 것이지 어느 순간이 되면 최종적 진리의 모든 것이 유한한 우리에게 완벽히 채워지게 될 수는 없다. 이것은 단순히 말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체험도 그렇다. 우리의 체험도 그것이 절대일 수는 없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였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벽한 진리가 있다던가 없다던가 하는 말은 무의미한 것이다. 완벽한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목소리를 완벽하게 들을 수 없는 한정된 존재다.
헤세는 이 소설을 쓴 5년후 황야의 이리를 쓴다. 그 황야의 이리는 좌절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인간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역사를 봐도 1차세계대전이후 히틀러라는 또다른 이상주의자가 나타나 유럽은 세계대전을 다시 경험하고 또다시 폐허가 된다. 이런 것들은 과거의 반성에 있어서 미진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어떤 문구나 주장을 쓰고 이것이 최종적 진리이며 나는 그 뜻을 다 알 수 있다, 그뜻은 이것이라고 단정하여 믿어버리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한계를 좀 더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우리는 비루한 현실 안에서 좌절하지 않게 되는거 아닐까. 득도나 한방에 영구히 깨어나는 체험따위는 잊어야 하는거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차원에서건 문명의 차원에서건 싯달타가 겪은 고민과 비슷한 길을 걷는다. 그들은 입에 풀칠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아둥바둥할 때도 있고 자아없는 신앙에 빠져있을 때도 있고 자아에 빠져 그저 정복과 소유의 욕망에 매몰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진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진리의 말에 집착하여 결과적으로 은둔과 허무의 길속에서 헤매는 사람도 있다.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고 자신의 투쟁과 고민을 풀어내어 써준 헤세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의 글은 백년이 지나도 아직도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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