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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고리끼의 어머니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3. 11. 27.

13.11.27

들어가며

나는 요즘 고전적 세계가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는 과거를 지나 현재에 이르렀고 과거의 여러가지 생각과 시도가 어떻게 과녁을 벗어났는지, 어떻게 실패했는지에 알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조금은 더 현명해 졌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종종 마치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를 같이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서양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뭐야 아직도 그런 말을 한단말이야 하고 거만하게 아는 체를 하지만 실은 여러가지 주장과 생각을 버리면서 종종 우리의 열정과 선의조차 버리고 체념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모습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말을 하는 대신에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에 대한 책을 열심히 사보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과연 꼭 더 좋아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차원에서, 생명의 연장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더 현명해 진 것일까.

 

 

러시아의 문학가 고리끼가 1907년에 발표한 어머니는 실재로 존재한 인물들을 바탕으로 씌여진 소설로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흔히 소설을 소개할 때 하는 것처럼, 그 시대의 상황이라던가 고리끼가 가난한 빈민의 자식으로 힘들게 독학으로 성장했고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의 친구로 지냈다던가 하는 식의 정보를 늘어놓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것은 하지 않겠다. 내 독후감이 언제나 그렇기는 하지만 다만 내가 21세기에 고리끼의 어머니를 다시 읽고 느낀 점, 즉 21세기에 한국인인 나라는 사람에게 새롭게 느껴지는 몇가지를 여기서 쓰고 싶다. 고리끼의 어머니는 훌룡한 작품이며 그것이 어떤 작품인지 느끼고 싶다면 물론 스스로 읽어야 한다.

 

고리끼는 주로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요 어머니인 펠레게야 닐로브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이 책은 그녀의 아들인 파벨을 비롯한 여러가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말해 소설 어머니는 혁명적 인간상의 묘사와 그 찬양에 주요 목적이 있다고 느껴진다. 작품이 나온지 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와 작가의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과 냉전시대가 놓여있으므로 단순하게 고리끼가 옳다던가 틀리다던가 하는 이분법으로 작품을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마치 세종대왕이 남녀를 차별하는 인물이므로 그에게 배울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식이 되고 만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삶의 어떤 일반성을 시대를 뛰어넘어 설명하고 있는가하는 부분이 될 것이다.

 

혁명의 본질

 

예를 들어 어머니라는 작품을 읽으면 혁명은 곧 진리의 보급내지는 정보의 유통과 거의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느끼게 된다.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철없는 아들 파벨은 공부를 하고 노동자에 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신문을 만든다. 소설 속에서 그가 감옥에 가고 그의 어머니가 체포되기까지의 과정전체에 걸쳐서 혁명가들의 행동은 행진등을 통한 적극적 항의를 제외하면 무식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책과 전단지를 나눠주고 그들에게 진리를 알리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이것은 물론 자명한 이유때문이겠지만 적어도 약간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고 생각한다. 농민들이 아예 읽고 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진리의 보급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책이나 전단지는 가난한 농민들중에도 읽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꽤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 혁명가들은 단지 러시아의 농민이나 노동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실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같은 것은 몇백년전이라면 전혀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마르코폴로가 직접 중국에 다녀오고 나서도 허풍쟁이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되었듯이 실제로 그것을 체험까지 하고 돌아와도 그런 정보는 무시되거나 거부되기 쉬웠을 것이며 따라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세기초는 그렇지 않았다. 철도가 다니고 전보같은 유선통신이 대중화되고 라디오같은 전파통신이 시작되어 보급되기도 하는 때였다. 다시 말해 정보가 유통될 준비가 기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되어있었기에 정보는 흐를 수 있었다.

 

정보는 무슨 일을 하는가. 소설에서 어머니는 이중적 존재로 등장한다. 하나는 혁명의 대상으로서 가난하고 무식한 대중을 대표하고 구원받을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히려 젊은 혁명가들의 인간적인 마음을 유지시켜주는 존재, 혁명의 주체로서 그들의 구원자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전되어 나갈 수록 쓰고 읽는 법을 잊어버리고 처녀적의 기억을 망각할 정도로 학대를 받으며 단순하게 살던 어머니는 차차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자신의 삶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되어 나중에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웅변을 할 정도가 된다. 이에 대해 작가는 그녀의 입을 빌어 그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삶을 알게 됨으로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타인의 삶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비교라는 것이 가능해졌고 따라서 그녀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것은 시대를 초월한 진실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정보의 소통이 어떤 소규모의 마을이나 도시를 초월해서 흘러다니는 시대가 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자각하게 되고 변화가 시작된다. 도시인은 시골을 알아야 도시인이 뭔지 알게 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외국을 알아야 한국인이 뭔지 알게 되고 물론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무슨 대단한 혁명을 논하지 않더라도 정보는 곧 권력이고 돈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수박장사가 수박을 어디선가 사다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판다고 할 때 그의 영업상의 가장 큰 비밀은 어디서 어떻게 얼마의 가격으로 그 수박을 구해다가 얼마의 이익을 남기고 지금 이 가격에 사람들에게 팔고 있는가 하는 점이 된다.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거나 옆동네에서 같은 수박이 얼마에 팔린다더라 같은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자기가 바가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수박장사에게 가격을 내릴 것을 요구하거나 다른 방도를 구할 것이다. 노동자와 공장주의 관계에서도 같은 것이 벌어질수 밖에 없다. 즉 공장주나 자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보의 통제다. 자신들이 어느 정도의 위험과 노동을 해서 어느 정도의 이익을 보고 있는지를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그들은 큰 이익을 볼 수가 있다. 우리는 모두에게 직업상의 비밀을 공개하라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동시에 불투명성을 추구하는 세력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세력이 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도 천안함 사건이라던가 미네르바 사건, 국정원 선거개입사건등 여러가지 일들이 왜 벌어지고 확대되는가하는 일의 배경에 존재하는 진실이다. 표면적인 사건들의 결론적인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왜 음모론이 설득력을 얻을 정도로 세상이 불투명한가 하는 것이다. 결국은 누군가가 더 많은 비밀을 유지하려고 하니까, 더더욱 많은 것을 밀실에서 결정하려고 하니까 대중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것이다. 더 많은 비밀은 주로 부유한 사람들의 편, 권력을팔아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결국 혁명은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언제나 정보에 대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소설은 삶과 행복에 대해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혁명적 인간상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묘사를 보면 새로운 것이 되어야 할 것같은 그 혁명적 인간상이라는 것이 오히려 매우 전통적인 어떤 것을 닮아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것은 바로 출가한 수도승의 생활이다. 불교든 기독교든 아니면 또다른 어떤 종교든 독실한 신자는 신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결국 진리를 찾아 헤맨다. 진리를 위해 사람들은 흔히 금욕적 삶, 소박한 삶, 무소유의 삶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어머니는 기독교는 부정하면서도 예수의 삶은 긍정하는 일을 여러번 하게 된다. 즉 종교의 진정한 모습은 예수의 삶이 그랬듯이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것이고 진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인데 현실의 종교는 배부르고 탐욕스러운 자들의 사치와 위선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혁명을 종교와 동일시 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설속에서 그 둘은 사실상 자연스레 하나인것처럼 보이게 된다. 즉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생각하건 그렇지 않건 해야할 행동은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젊은 혁명가들은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감옥에 가거나 두들겨 맞거나 하는 일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그들은 돈따위를 개인적으로 독점하려고 하는 것을 비웃고 젊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맺고 개인적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까지 포기한다. 이들의 삶은 출가한 스님이나 비구니 혹은 신부나 수녀의 삶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은 진리를 위한 희생이며 그렇게 희생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그 안에서 크나큰 행복을 느낀다. 그 희생이 혁명가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바탕이 되고 그들은 그 동지애 속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배움과 신뢰로 차있고 거기에서 오는 감동과 감수성의 증대로 차 있다. 더이상 그것은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비인간적인 삶이 아니며 멈춰서 있지 않고 진리를 향해서 전진하는 삶이다. 이러한 점들은 주인공인 어머니를 성장시키고 인간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들은 단순히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해서 더 큰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며 따라서 혁명가란 남을 위해서 살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더 큰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다.

 

이 점은 바로 취업걱정이나 은퇴자금마련에만 골몰하는 작아진 현대인에게도 잊을 수 없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돈이 필요하다. 권력과 물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밥만 먹고 사는 생명이 아니고 의미를 먹고 사는 생명이기도 하다. 수많이 존재하는 정신과 상담사들이 이것을 보여준다. 의미란 우리가 습관적으로 살기 시작하면 사라진다. 우리는 배우고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혁명을 하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거쳐야 삶다운 삶을 살수가 있다. 우리가 성장할 만큼 성장하고 나서 삶이라는 것을 살게 되는게 아니라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이 곧 삶이며 그 성장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죽음은 가까운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점을 잊을 때 우리는 모든 희생을 통해 쌓아 올린 우리의 물질의 성이 허무하게 무너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중년이나 노년의 정신적 위기 일수도 있고 사회적 불안과 윤리적 타락으로 인한 사회적 몰락일 수도 있다.

 

과거의 혁명을 넘어서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소설은 어떤 실패를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실패라서 그 아름다움이 손상되지 않을 뿐이다. 그 실패란 하나로 말해질 수도 있고 여러가지 다른 차원에서 말해질수도 있는데 백년이 지난 오늘날도 우리가 결코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문제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아름답지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은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절대는 없다고. 누군가가 진리를 추구하건 신을 추구하건 절대를 추구할 때 거기에는 오류가 등장하게 되고 혁명이 성공하고 나면 그 오류는 절망적으로 다가 오게 된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물론 이 소설속의 혁명가들은 과거의 실제 혁명가들이 쉽사리 그렇게 말했듯이 어떤 절대적 진리, 절대적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평등 같은거 말이다. 그러나 벽이 없고 테두리가 없는 평등따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서도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사회주의 혁명의 오류가 인간성의 한계를 무시한 거라고 말한다. 인간은 그렇게 순수한 수도승처럼 살수 없고 탐욕스럽고 죄를 저지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거친 것이지만 나름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 테두리 없는 절대적 진실의 추구란 절대적 무소유의 실천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국의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가 평등을 외치다가 전세계인들이 모두 전세계인들의 평균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는 종착점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임금 협상을 주장하지만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더더욱 가난한 중국이나 인도나 아프리카의 노동자를 대량으로 들여와서 그들과 직업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을 환영하는가? 소설에서 언급되듯이 왕권을 타도한 사람들은 왕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든게 아니라 부르조아들이 잘먹고 잘살며 오히려 노동자들을 더더욱 착취하는 현실을 만든다. 맥도널드에 가서 싸구려 장난감을 생각없이 받아드는 사람이 테두리 없는 절대적 평등을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 그 싸구려 장난감은 인도네시아같은 곳의 어린 노동자가 착취수준의 월급을 받아 만드는 것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파는 커피도 그런 사람들이 수확했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문제란 바로 이 벽과 테두리의 문제이다. 테두리 없는 정의, 공동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 정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세상사람들이 평등하고 같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이지만 그 반대 즉 모든 사람들이 서로 한사람도 같지 않다는 것도 진실이다. 테두리 없는 정의를 강제하려고 할 때 만들어 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근거없는 방식에따라 만들어 진 어떤 평균점에 따라서 살도록 강제하는 사회다. 그것은 작은 가족이나 작은 부락내에서는 그나마 그럭저럭 숨쉴 틈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특히 요즘처럼 전세계가 정보를 교환하면서 살고 있는 시대에 적용하면 인간이 살 수가 없다. 게다가 테두리 없는 정의는 인간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무한대로 폭주하는 것을 막을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 한명의 목숨은 과연 고래나 코끼리 한마리보다 숭고한가. 인간생명의 가치는 과연 대장균 한마리의 생명보다는 숭고한가?

 

그러나 테두리, 벽, 공동체를 인정하는 것도 힘들다. 그것은 차별이 무한대로 증식할 거라는 공포를 우리에게 준다. 또한 곧잘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가 모든 벽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지옥을 만들고 벽을 인정하면 또 지옥이 만들어 진다. 현실은 이래도 지옥이고 저래도 지옥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백년전에도 지금도 제대로 극복하고 있지 못한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다. 그러는 가운데 정보통신은 발달하여 더 많은 정보가 더 많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더 발달된 선전기술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정보 과잉의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자기의 관점이라는 것이 없을 때 길을 잃고 만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그러기가 너무 쉽다. 

 

나는 이 문제가 아직도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문제라고 말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 문제는 이미 수천년전부터 극복되어져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대중적 차원에서 실현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 답은 불교나 유교나 노장을 포함한 과거의 성현의 메세지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답이 충분하지 않다는 뜻일까 아니면 단순히 사람들이 그 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까? 

 

무식하고 단순한 일상에 매인 백년전의 러시아 농부나 노동자의 삶은 하나의 작은 알같은 세계에 갇힌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백년전의 혁명가들은 그 알을 깨고 진리의 세계로 나오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들은 적극적으로 그 알을 바깥에서 두들겨 깨려고도 한다. 그 혁명가들의 가장 큰 오류는 자신들이 서있는 위치가 최종적 진리라고 믿는 오만과 어리석음이다. 하나의 알이 깨어지면 우리는 최종적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어떤 기준에 따르면 더 큰 알속에서 깨어날 뿐이다. 우리의 행복과 삶의 의미는 이 알속이냐 저 알속이냐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알을 깨어나가는 그 과정속에 있다. 즉 언제까지나 유한할 우리는 최종적 목적지도 없고 목적지에 도달해서 삶을 시작하는게 아니라 걷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 곧 삶이다. 그러니까 성장하는 알속의 병아리를 방해하는 것도 나쁘지만 억지로 껍질을 깨고 그것을 미리 꺼집어 내는 것도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기는 하지만 요즘의 어른들은 어린 아이들을 너무 빨리 어른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메추리알만한 작은 세계에서 억지로 꺼집어 내어져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세계속으로 내팽겨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종종 헛똑똑이가 되는데 그것은 많은 것을 알고 똑똑한 것같지만 남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은 그런 인간형인 것이다. 그래프와 수치를 줄줄이 늘어놓을 수있지만 역사와 사회에 대해 기본적 가치관도 가지지 못한 그런 인간형말이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그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점점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린 아이같아지는 것같다. 어른들은 유치원때부터 취직걱정하는 아이를 만들려고 하는데 30이 넘어도 자기 삶에 대해 방향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늘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다. 우리는 편견에 빠져있으며 우리의 삶의 과정속에서 주어진 어떤 한 점에 존재하는 누군가이지 모든 껍질을 다 탈피한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존재는 아니다. 앞으로도 얼마를 노력하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기에 작은 알 속에 있는 것같은 삶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의 풋사랑은 어른이 보기에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른들이 노회한 수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준다면 어린 아이들은 순수한 첫사랑같은 것은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과연 현명한 걸까. 인생의 가장 찬란한 기쁨을 빼앗는 것이 아닌가? 모든 인간은 결국 늙어죽는데 죽을 때가 다된 노인이 젊은이에게 어차피 삶은 결론적으로 허망한 것이고 늙으면 돈쓸 때가 많으니 어린 시절부터 다른 일하지 말고 노후자금이나 모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현명한 것일까. 왜 미리 늙어버리고 미리 모든 좋은 경험을 다 망쳐버리는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주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주변으로 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른의 영향은 마치 알을 품어주는 엄마닭의 체온처럼 알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이 깨어나게 만든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메세지는 동양적 문화안에 산재해 있다. 크고 작은 공동체가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배려하고 공존할 수 있는 지혜는 이미 수천년전부터 세상에 뿌려져 있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재해석해야 할뿐이다. 게다가 과거에 그런 메세지가 실재로 있었다 없었다 하는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21세기의 혁명은 백년전의 혁명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다. 

 

그래도 백년전의 혁명에는 그리운 어떤 면이 있다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은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의 공포 때문에 질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당한 공포다. 하지만  공포가 우리를 완전히 작은 난쟁이로 만들어 버리게 하는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글에서도 여러번 말한 것이지만 우리는 혁명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다혁명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혁명하기를 포기하고 체념하는 순간 우리는 죽기로 결심한 것과 다르지 않다남은 인생은 밥만 먹고 길러지는 돼지처럼 되기로 것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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