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과학과 현대사회를 읽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절반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중단했습니다.화이트헤드는 이 책을 기본적으로 자신의 형이상학을 설명하려는 의도로 썼는데 그 형이상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합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대해 나름 좀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느꼈습니다만 사실 더이상 그 형이상학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지금의 저에게는 큰 득이 된다고 여기지 않아 거기서 멈추기로 했습니다.
화이트 헤드의 형이상학이 답이라면 거기에는 질문도 있습니다. 즉 뭔가 이러저러한게 문제라고 생각되니까 그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이 형이상학이 처방이 될수 있다고 제시하는 형식이 될 수 밖에 없지요. 화이트헤드는 월리엄 제임스가 있었던 하버드대학의 철학교수로 실용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는데 이것이 실용주의 철학의 기본태도입니다. 필요가 없는데 답을 먼저 만들지는 않습니다. 제가 책을 읽기를 중단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앞의 부분은 매우 유익했으나 형이상학부분은 지금으로서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반면에 앞의 부분은 기록하고 정리해둘 가치가 있다고 여겨 독후감을 씁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1925년에 로웰강의를 했던 것을 기본으로 책을 냅니다. 그것이 이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서구과학의 발전을 간략하게 묘사하면서 과학이란 무엇이고 거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에 대해 논합니다. 그리고 그걸 극복하기 위한 철학으로 그의 형이상학을 내미는 것이죠. 그의 형이상학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지적은 옳고 기억해둘 가치가 큰 것입니다. 그가 책을 쓴지 이제 90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화이트헤드나 기타의 사람들이 지적했던 문제를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에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이며 동시에 좌절감을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 글로 인해 과학을 폄하하고 종교적 믿음이나 미신과 동일시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곤란하겠습니다. 병따개도 기계고 최신의 전투기나 우주선도 기계입니다. 성냥불도 뜨겁고 태양도 뜨겁습니다. 그렇다고 병따개와 우주선이 같은 것이며 성냥과 태양이 같은거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책은 pdf 파일로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더군요. (http://evankozierachi.com/uploads/Whitehead_-_Science_and_the_Modern_World.pdf)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셔도 되겠습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화이트헤드가 이 책을 통해서 하는 말은 과학도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할 수 밖에 없는데 과학적 방법이 너무나 성공적이었던 이유로 우리는 가정된 것, 증명할수 없는 것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은 이제 완전히 필요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발전의 한계에 근접해 가면서 우리를 제약하게 되었고 따라서 더 큰 비약을 위해서는 더 큰 일반성을 가진 형이상학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하기 위해 그는 먼저 과학혁명의 시대이전으로 갑니다. 그것은 서구의 중세입니다. 서양사람이 아닌 사람도 서구의 중세라고 하면 대개 약간은 압니다. 그들은 그 시대를 이성의 암흑기라던가 르네상스 이전의 시대로 신화만 떠들던 시대라던가 수도승들이 종교적 독단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던 무지와 야만의 시대쯤으로 기억합니다. 그 단순한 야만을 과학자 1세대인 갈릴레오 같은 사람이 깨부시는 것이 과학혁명의 시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종교적 독단에 빠져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화이트헤드는 거듭해서 말합니다. 과학혁명의 시대에 이성론자였던 사람들 즉 이성을 가지고 말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주류였던 구세대 종교학자들이었고 과학혁명이 반이성운동이었다고. 그것은 체제를 허무는 운동이었다고. 이런 예를 들어 봅시다. 누군가가 야밤에 담을 넘어 보석상에서 나오는데 주머니에는 보석이 가득들어 있었습니다. 보석상을 지키는 개는 낯선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듯 마구 짓고 있으며 이 사람은 자신이 나오는 것을 들키자 매우 당황해 합니다. 이 사람은 도둑일까요 아닐까요? 도둑일꺼라고 의심할 증거는 많습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말해 도둑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합리적인 것이지 모든 증거를 다 무시하고 아니야 이사람은 도둑일리가 없어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인 거라고 말할수는 없는 것이죠. 예를 들어 모자를 쓴 사람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기괴하고 믿기 어려운 증거하나에 기반해서 다른 모든 증거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은 종교적으로 보이는 신앙의 소유자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야만적 인간일거라고 생각되는 과학혁명 이전의 종교학자들은 실은 반대로 방대한 자료와 논리와 개념의 산을 만들어 세상에 대한 모든 질문에 나름의 답을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그런 이론의 바탕에 있던 기본적 형이상학이 틀려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눈으로보면 미신이 되버리고 마는 것이죠. 중세의 사람들은 핀의 머리끝에 천사가 몇명이 앉을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고민했었다라고 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알수 있는것은 그들은 천사가 유령이나 음악소리같은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만질수 있는 사람같은 것으로 진지하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21세기에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기독교신자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면 신을 만나고 천국을 가게 된다고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많은 참조문헌과 개념들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이란 우리에게 두드리면 탁탁소리가 나는 테이블이 현실이듯이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는 그들의 패러다임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들을 단순하게 이해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패러다임을 정교하게 발전시켜서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고대 그리스에 기원한 가당치 않은 믿음을 가진 일군의 사람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연에는 단순한 법칙이 존재한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과학혁명의 선구자이고 그들은 물론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과학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의 성공을 목도했기에 이제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처럼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두드리면 탁탁 소리가 나는 테이블처럼 구체적인 현실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어떤 의미에서는 행운과 사기가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과학이나 수학의 발전이 엄격한 논리적 발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엄밀히 말해 결과가 좋으면 거기에 이르게 된 논리에 함정이 있는 것은 상관없다는 식이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추상화된 이론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은 아주 오랜간 현실과 혼동되어져 왔습니다. 추상적 이론의 대표인 수학이론은 강력한 분석적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수학이 추상화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추상화가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현실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하학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라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것도 있는 것을 압니다. 아인쉬타인은 비유클리드기하학을 써서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었지요. 어떤 수학으로 만들어 낸 논리적 결과가 현실에서도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귀납적이고 실험적인 것입니다. 즉 논리적으로 반드시 옳다는 것이 아니라 해보니 옳더라라는 사용경험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추상화된 이론은 현실에서 너무나 강력하게 잘 맞아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두가지 착각에 빠질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추상화가 현실의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다는 착각이고 또하나는 그 추상화가 현실과 반드시 일치한다는 착각입니다. 이런 착각에 빠지면 그 추상화된 이론에서 나타나지 않는 현상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론 그 추상화된 이론의 예측을 현실 그자체로 생각하게 되지요.
이론은 고층빌딩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맨 위층의 이론은 그 아래의 보다 근원적인 이론에 근거하여 확장된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이론이 틀리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론을 수정합니다. 이런 과정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독단과 신앙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끝없이 오류를 수정하고 이론을 수정하고 있는데 왜 어떤 이론을 독단적으로 믿는다고 하는 거냐고 반문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론은 그 아래층이 있고 다시 그 아래층이 있어서 저 바닥의 이론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즉 그것들이 이론이라는 생각도 없는 것이죠.
뉴튼시대에 과학은 하나의 형이상적 가정을 들여옵니다. 그것은 바로 저것은 이순간 저기에 있다라는 가정입니다 (simple location in space and time) . 예를 들어 야구공은 지금 탁자위에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우리는 다음번 질문을 던질수 있습니다. 야구공은 몇월 몇시 몇분 몇초에 어디에 있는가 같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들에게 민주주의는 오늘 자정에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황당한 질문으로 생각하거나 무슨 문학적 의미를 가진 질문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에게 바다에서 가장 큰 파도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파도의 위치라는게 정확히 선을 그을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누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개 바둑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면 이젠 좀 자신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바둑이는 생명으로 주변과 끝임없이 물질을 교류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질문도 끝없이 자신감있게 말할수 있는 것일까요? 이제 누가 야구공은 어디에 있냐고 하면 더더욱 대답하기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거꾸로 묻는 겁니다. 야구공과 민주주의는 정말 확실히 다른거 맞습니까? 어떤 것이 지금 저기에 있다라는 것이 형이상학적 가정이 아닌게 맞습니까?
물론 양자역학을 배운 사람들은 이미 과학자들도 전자에 대해 지금 이순간 전자가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누구나 에너지를 현실적인 거라고 생각하지만 에너지라는 개념은 우리가 종이위에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과학에 대한 반대
과학이란 하나 이상의 가정들 혹은 어떤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믿고 그것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반대론이나 경고의 소리를 내던 사람들은 잊혀졌습니다. 때로 그 반대는 거셀때도 있었지만 곧 진압되고 맙니다.
버클리와 흄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뭔가가 저기에 있다라는 생각이나 뭔가가 인과적으로 일어난다라는 것은 과학적 사고의 기본인데 그런 것들이 모두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흄을 읽고 칸트는 우리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합니다. 독일관념론의 발전은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과학자들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뉴튼이 세상을 보던 형이상학적 시각으로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과학은 새로운 철학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고 기술이 발전하고 그에 맞춰서 사회가 전문화되고 과학적 사고 방식, 환원론적 사고방식이 세상을 뒤덮으면 뒤덮을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뭔가가 빠져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에 혐오감을 가지고 저항하게 되는데 화이트헤드는 그것은 낭만주의로 정리합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시와 소설을 통해서 그들의 느끼는 문제를 말합니다. 뒷동산을 과학자의 눈으로 볼때와 시인의 눈으로 볼때 분명 거기에는 과학에서 빠뜨린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의 힘은 너무나 커서 어떤 의미로 아무도 그게 뭔지 밝히지 못합니다. 시인은 과학으로 맹인이 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철학을 새로 만들어 모든 사람의 눈을 뜨게하고 과학을 재탄생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던 추상화된 이론을 현실 그자체와 혼동할때 생기는 오류는 점점 더 커져가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화이트헤드가 과학혁명을 그 이전의 중세적 사고와 대비하여 반이성적 운동이라고 불렀던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지금 세계에는 수많은 대학과 연구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적인 인간들이 과학적인 연구를 하고 있지요. 저도 그중의 하나입니다만. 우리는 중세말엽의 종교학자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결국 또하나의 반이성주의 운동 혹은 패러다임 전환 -화이트헤드가 쿤보다 전세대이므로 화이트헤드가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습니다-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수없이 높게 쌓여 올려져 있던 자료와 관념과 권위의 힘을 가지고 인간세상을 지배하던 중세시대 지성에게 과학혁명은 말합니다. 생각하는거 다 때려치우고 직접 우리의 눈과 손으로 측정해 보자고. 말하자면 누군가가 그리스에 대해 책을 쓴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기성세대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는 먼저 그리스에 대해 나와 있는 이 책들을 다 읽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정리하고 네의견을 쓰는 것이 저술이다. 그리스에 직접 가봐야 한다는 점은 별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이미 그리스는 책속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물론 전세대의 자료와 의견은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기에 신참자는 그에 눌려서 뭔가 반론을 내기 어렵습니다. 이럴때 나는 그런거 몰라라고 말하고 그리스에 가서 자기 눈으로 보이는 걸 보고 와서 그것만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무책임하며 세상에 혼란만 일으키는 사람으로 말해질 것입니다.
오늘날도 과학이론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다윈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모든 출판된 책을 읽었고 파인만은 미국물리학회지에 나오는 논문을 다 읽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자기 분야의 논문도 극히 일부만 읽습니다. 아인쉬타인이 유명한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논문을 보면 아예 인용논문목록이 없더군요. 요즘은 논문에 아주 길고 긴 인용논문들을 다는 것이 보통입니다. 인용논문들이 5-6백개에 달하는 책같은 것을 보면 신참자는 기가 질리는 것이죠. 과학의 새로운 세대는 날로 작아져만 갑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인데 무식한 사람이 됩니다. 과도한 전문화때문에 오히려 학교따위 안다닌 사람보다 무식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여기서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재미있게 생각되는 면이 있어 간단한 인상을 몇자 적는게 좋을 것같습니다.
탁자는 생생한 실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달리 버클리 같은 관념론자는 우리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우리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실체에 근거하여 우리마음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는 것으로 중간단계를 더 넣습니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형이상학을 전개합니다만 읽으면서 저는 수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이 모든 것을 말로 풀지 말고 수학식으로 표현했다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의 철학이 난해한 것은 수학을 말로 풀어서 설명하니까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뉴튼의 시각에 따르면 여기와 저기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화이트헤드에게는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분리되어 있지않죠. 이것은 지극히 추상적이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감각신호가 해석된 결과라는 것을 생각하면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영화를 볼때 화면은 앞에 있는데 스피커가 뒤에 있다고 해봅시다. 그럼 어떤 사람이 말을 하는데 소리가 앞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뒤에서 나옵니다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아주 이상하지 않게 영화를 봅니다. 소리가 말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또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각은 후각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코를 막으면 사과와 양파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또다른 예는 착시입니다. 하나의 선은 다른 선의 존재에 의해 더 길게도 보이고 작게도 보입니다. 진짜 좋은 예는 맹점이로군요. 우리눈에는 사실 보이지 않는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우리 뇌는 적당히 주변신호로 메꿔서 우리는 세상에 구멍이 있는 것처럼 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세계 그 자체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감각신호가 해석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는점을 생각하고 그 해석과정 혹은 인식과정은 각각의 것을 따로 처리하는게 아니라 전체 패턴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의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서로 얽혀서 존재하게 된다는 점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확률론적 수학식으로 표현하면 그리길지 않은 수식입니다.
이제까지의 과학은 현실을 인식하고 구성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관념론이 있었지만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세상을 만드는가 하는 인간마음의 이해에 있어서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고 그것이 다시 과학적 법칙의 탄생과 합쳐져서 통합적으로 이해되지도 못했습니다. 즉 어떤 마음이 있어야 중력의 법칙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가 같은 것은 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마음과 뇌와 인간에 대해 뭔가를 믿는 일군의 사람들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들은 중세시대의 학문도 그러하고 우리가 가진 과학문명의 학문도 그러하듯이 그것들은 다 훌룡하지만 왜 단순한 방법을 통하지 않는가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과학자들을 그저 단순했던 시대의 광신도쯤으로 잊혀지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맺는 말
지식의 발달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의 한계와 무한함입니다. 우리는 어떤 아이디어를 소화해 내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적당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은 우리가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까를 생각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화이트헤드는 현대사회의 지적인 근원이 가진 문제를 지적합니다만 사회적으로 우리가 과학문명의 독을 절실하게 느끼기에는 아직도 너무 빨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로부터 거의 백년이 지났습니다만 우리는 여전히 그가 살던 시대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흔들거리고 있기는 합니다. 당장 세계대전이 나서 온세계가 망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주 황당하게 들리지는 않는 시대입니다. 선진국이 가진 빚이 얼마나 되는가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숫자들이 이미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죠.
화이트헤드의 지적들을 곱씹게 되는 것은 그래서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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