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3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어윈 쉬뢰딩거는 양자역학의 아버지이며 무엇보다 쉬뢰딩거방정식으로 과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유전자 혁명을 예견하기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 그가 쓴 나의 세계관 (my view of the world)를 구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아직 한국에 번역판이 없는 책인 것같습니다. 두개의 다른 시기 (1925년과 1960년)에 씌여진 두개의 다른 에세이를 싣고 있는 이 책에서 앞에 나오는 길을 찾아서 (seek for the road) 부분을 얼마간의 해설과 함께 소개해 볼까 합니다.
형이상학적 문제와 서구적 사고의 비판
10개의 작은 글들로 이뤄진 이 에세이의 서두를 장식하는 두개의 글은 형이상학의 문제와 서구적 사고의 비판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제목들은 거대한 것이라 사람을 기를 죽일수 있는 것이지만 그는 과학자 특유의 명쾌함으로 백과사전식으로 이런 문제에 대한 자료를 나열하는 대신 짧지만 의미있는 사실들을 지적함으로서 왜 우리가 형이상학에 대해 고민하고 서구적 사고가 당연한게 아니라고 생각해야 하는 가를 지적합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사실 서구적 사고는 어떤 특정한 형이상학적 태도를 지나치게 굳게 믿은 나머지 형이상학따위 없이 지식을 쌓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말하자면 매우 높은 빌딩 위에 있는 사람의 착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천층에 있는 사람에게는 땅이 보이지 않을수 있습니다만, 1000층 밑에는 999층이 있고 그 밑에는 998층이 있어서 제 아무리 높다해도 결국은 1층이 있고 그 밑에는 땅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지반은 사실 천층이상이 되면 무너질 정도의 강도밖에는 가지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땅따위는 보지못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계속 더 건물의 높이를 높임으로써 자신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를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형이상학이 쓸모없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어떤 특정한 형이상학적 태도를 너무나 굳게 믿은 나머지 자신이 뭔가를 믿는게 있다는 자각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쉬뢰딩거는 그러는 가운데 과학이외의 다른 분야는 오히려 쇠퇴하고 사람들은 이제 뭔가 기대고 믿을 것을 상실한 채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말합니다. 서구과학문명의 정점에 도달하여 모든 것이 명확하게 발전했다고 믿는 순간이 사실은 가장 위기의 순간이며 가장 불확실성에 가득찬 상황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적 놀라움
3장은 겨우 한페이지짜리 글이지만 떼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책의 제목이 나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누가 세계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때 당황하지 않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세계는 원자로 이뤄진 물질이 빈공간을 돌아다니고 뭉치기도 하는 공간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생명이 진화하여 인간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곳이라고, 그게 세계라고.
우리는 이 물론 두 줄짜리 세계관에 무한히 길게 세부사항을 더해넣을 수도 있습니다만 쉬뢰딩거가 말하는 세계관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쉬뢰딩거는 한마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세계를 보려면 형이상학적 전환이 필요한데 현대인들은 과학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학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가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항상 우회적으로 말해야 하며 듣는 사람의 비약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늘상 비유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 봅시다. 여기 한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여자가 상품처럼 팔리고 팔려간 곳에서 남편을 주인처럼 모시는 나라라고 합시다. 왜 그런가. 그건 '원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원래 그랬기 때문에 왜 그런가를 질문조차 안합니다. 여자가 팔리는 상황, 그런 규칙에 대해 놀라지 않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한 여자만 사랑하고 그 여자와만 결혼해서 사는 남자를 발견하면 놀랍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규칙에 어긋나게 사는 남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쉬뢰딩거가 말하는 철학적이지 않은 인간들의 태도입니다.
철학적인 인간이란 남들은 전부 원래 그렇다라고 해서 질문도 안하는 것, 즉 여자는 팔려가서 남편을 모시는 존재라는 규칙자체에 대해 왜 그런 규칙이 존재하는가 하고 놀랍니다. 비철학적인 인간은 어떤 규칙들이나 가정들에 쉽게 익숙해져서 거기에 그런 규칙이 존재한다거나 내가 규칙을 따른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철학하는 인간이란 - 뒤쪽에서 설명하는 대로 표현하자면 의식을 가진 인간이란 - 현실 자체, 그런 규칙이 존재하는 세계를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매순간, 모든 사물이 일회적이고 유일한 것입니다. 이 존재에다가 여자라던가 김말숙이라던가 키 큰 사람이라던가 부자라던가 나이가 많다던가 적다던가 지위가 높다던가 낮다던가 하는 이름표를 붙이고 분류하고 반응하고 하는 모든 것이, 즉 모든 개념과 관습과 규칙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걸 당연한 걸로 알까요? 예를 들어 물리학을 생각해 봅시다. 물리학 전공을 하지 않은 사람도 뉴튼은 압니다. 그리고 뉴튼방정식이란 말도 들어보았을 것이며 뉴튼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로 이야기된다는 것은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뉴튼방정식을 말하면서 말하는 질점이란 크기가 무한히 작은 질량을 가진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색도 냄새도 온도도 없습니다. 그게 뉴튼 물리학입니다. 뉴튼 물리학이 현실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시말해 어느 정도 형이상학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과 구분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이론이며 현실에 덧씌운 이론입니다.
다른 예를 봅시다. 한때 유클리드 기하학은 절대적 진리의 상징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것은 순수히 이성으로 증명할수 있는 진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유클리드기하학은 진리로 믿어지고 사용되었죠. 그것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부터 무너집니다. 사실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이 큰 삼각형을 그리면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쓰면 유용해지는 것은 우연에 불과하고 근사에 불과합니다. 수학자체는 현실과 떨어져있으며 저절로 수학과 현실이 1대1로 대응한다고 보장되지 않습니다. 유클리드 기하학도 그 자체가 현실이 아니고 현실에 덧씌운 이론입니다. 현실에 잘 맞을 뿐이죠.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인간은 현재의 우리가 몸담고 있는 패러다임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에서 철학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놀라움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뭔가 이상하다라고 느낍니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핵심은 논리가 아니라 체험이고 느낌입니다. 볼수 있는 사람은 말을 안해도 철학하는 것이고 보지 못하고 남의 이야기를 줄줄 외워서 보는 척하는 사람은 철학적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나 문화에 완전히 매몰되어져 있는 사람이 논리만으로 그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지식이나 논리가 아니라 그 지식이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며 그것을 다시 생각해 보는 자세입니다.
쉬뢰딩거는 과학에 있어서 형이상학을 제거하는 것은 실상 과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설을 쓰는것이 주어진 긴 이야기를 짧은 이야기로 요약하는 행위가 아니듯이 과학을 하는 것도 그저 수없이 많이 주어진 관찰사실들을 가장 경제적으로 요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이론을 가능하게 하는 통찰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오직 형이상학을 무시하지 않는 가운데에서만 가능하다고 쉬뢰딩거는 말합니다.
4장에 이르르면 쉬뢰딩거는 드디어 문제점이라는 것을 논의합니다. 1장에서 3장에 이르는 서론이 필요한 이유는 그런 문제점을 길게 쓰건 짧게 쓰건 그게 뭔지 알아들을 수 있으려면 안다는게 뭔지, 우리는 어떤 가정하에 살고 있는 건지에 대해 스스로 의구심을 가지는 마음상태 정도는 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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