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나는 듀이가 쓴 교육에 대한 논문하나를 읽어본 적이 있다. 그 깊이 공감이 가는 그 논문은 듀이의 통찰력있는 지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그가쓴 철학의 재구성을 읽게 되었다. 존듀이는 프래그머티즘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1919년 일본을 방문해 연설을 하면서 철학을 다시말해 우리가 가지는 사고방식의 전적인 재구성을 요청하는 연설을 한다. 이것이 책으로 나온것이 2010년에 이유선에 의해 번역된 철학의 재구성이다. 여기에는 책이 출간된 지 25년후에 씌여진 듀이의 긴 서문도 붙어 있다.
듀이가 철학의 재구성에서 핵심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 진리 혹은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던 과거의 철학 내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듀이는 베이컨 이래 우리는 권위주의적이고 복잡한 체계가 주는 감옥에서 탈출했지만 그것은 절반짜리 탈출이었으며 우리는 아직 인간적인 과학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룩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재구성이다.
두번의 개혁
철학의 재구성이란 종교적 개혁이나 패러다임의 변화같은 것이다. 그럼 그것은 어떤 변화이고 그 변화는 왜 쉽게 일어나지 않는것일까. 듀이는 두개의 혁명적 관점의 변화를 지적한다. 하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고 또하나는 베이컨, 르네상스, 개신교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언도받은 후에 독을 먹고 죽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의 죄목은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악에 빠뜨린다는 것이었다. 듀이에 따르면 (정당하게도) 우리가 신화로 알고 있는 비과학적인 이야기들, 미신적인 믿음은 생각만큼 미신적이 아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아주 오래전의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훨씬 지능이 떨어져서 그런 황당한 이야기들을 진심으로 믿고 여러가지 신들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떤 의미에서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솔직한 인간의 관심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즉 사냥하는 사람은 사냥감인 동물에 관심이 많고 따라서 동물에 더많은 비중을 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사냥이 잘되는 것은 동물의 신이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라거나 그런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런 전해져내려오는 관점들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사실은 우리가 아는 것이 없고 (소크라테스) 확실한 것은 이데아로 대표되는 진리의 세계 (플라톤)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오늘의관점에서는 미신에 대해 이성이 싸운 당연한 싸움으로 생각하게 되며 합리적인 쪽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적 시점에서는 사실은 반대라는 것이다. 이것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날때 항상있는 일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믿는 사람이 말하는 합리적이나 이성적인 태도는 기성의 패러다임을 믿는 것이며 당연히 기성의 패러다임은 오랜간 믿어져왔으므로 거대한 상호연관성과 복잡한 이야기구조를 가지게 된 권위로 작동한다. 그에 비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 시작단계에서는 신뢰를 줄만한 무기를 충분히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괴상해 보이고 쓸데 없이 작은 것을 붙들고 트집을 잡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비판받고 죽었어야 하는 이유다.
꼭같은 것이 부르노를 죽이고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아야했던 서구의 중세에서 근세로 변하는 과정에서 있었다. 신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세상을 설명하는 시각이 오랜간에 걸쳐서 엄청난 크기로 자라나 있고 권위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오늘날 과학적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시각에서는 비합리적인 것,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비도덕적인 것을 퍼뜨리는 미친자들의 행위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문제가 되었던 과학혁명의 핵심은 간단했다. 바로 우리눈으로 직접보고 느껴서 판단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험과 직접적 관찰을 중요시하게 된, 그리고 신이 아니라 인간을 중요시하게 된 혁명적 관점변화다. 산더미처럼 쌓인 관련서적이나 신적인 권위를 근거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느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관찰로 과학을 구성한다는 것은 오늘날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것을 우리는 당시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로 관찰은 오랜동안 행해져왔다. 그런것들을 서로 일관성있게 설명하는 것이 기성의 패러다임이다. 그런데 어느 누군가가 직접적인 실험과 관찰을 직접 일일히 행한다고 하자. 그 결과 설사 전통적으로 믿었던 어떤것과 다른것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우리는 쉽게 전통적인 믿음을 버리기 어렵다. 그것은 수많은 검증을 이미 거쳤으며 수많은 권위있는 인물들이 보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은 있다. 요즘도 물리학과에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편지가 온다. 그리고 그런 편지들은 당연히 그다지 진지하게 읽혀지지 않는다. 상대성이론은 수많은 검증을 거쳤으며 무수한 천재들이 인증서를 교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제와 누군가가 아니라는 편지를 보내도 우리는 대개 어디서 뭘 또 틀려서 이상한 결과가 나왔거니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혁명이 시작되었을때 서구 중세의 기성인들이 느꼈을 감정이라는 것은 뻔한 것이다.
베이컨을 시초로 삼는 이 혁명적 변화가 혁명인 이유는 그 시점 자체가 그 당시의 사회와 가지는 관계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날 환경은 길고 복잡한 체계로 대표된다. 사람들은 질문을 던지는 데 그 답은 끝없이 계속되는 지식의 피라미드 속에서 권위의 피라미드 위로 숨겨진다. 사회는 결코 우리는 그 답을 모른다고 하지 않는다. 그 답은 산더미 같은 권위를 뚫고 저위에 있다고 할뿐이다. 그 권위적 체제아래서 개인들은 압살당한다.
그런데 직접 내 눈으로 보고 관찰한 것을 믿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외적인 권위에 대해 안으로부터의 시각변화를 꾀한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 것이다. 이제 진리에 우리는 직접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에서도 나타는 것이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기성의 시스템을 통해야 신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 개인적 신과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캐톨릭의 권위와 시스템이 한없이 복잡하고 거대해 졌을때 혁명이 된다.
인간적인 과학의 구성
존 듀이는 인간적인 과학을 만들어 내자고 말한다. 실은 그는 이것에 대해 이것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외적인 묘사는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이뤄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인 과학을 만들어 내자고 말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그렇게도 굳게 믿고 있는 과학문명이 또다시 틀린 권위로 무너져야 하는 권위의 자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를 다시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인이나 과학혁명 이전의 서구 중세인으로 만들기 쉽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과학이 틀렸다니. 그 오랜간 성공을 누렸고 굳건히 존재하는 권위의 상징인 과학이 틀렸다니. 어디서 미신이나 믿는 정신병자나 할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누군가를 화형에 처하거나 독배를 마시게 하기 전에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혁명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역사는 과연 종료되었으며 우리가 정말 다시는 혁명을 겪을 필요가 없는 합리성의 최종장에 도달한 것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조금은 겸허한 태도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뭘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그냥 이거다라고 말해서는 잘 보이질 않는다. 그것을 듣기전에 약간의 옆쪽의 이야기, 즉 현재의 문명이 만들어내고 숨길 수 없어진 문제점들과 다른 혁명의 경우를 볼 필요가 있다. 듀이는 과학문명에서 가장 잘나타나듯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즉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불변하는 원리를 추구하는 일이 오늘날까지의 문명, 철학의 특징이며 이것은 플라톤에서 칸트,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이 추구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철학을 논한 것은 노예들이 온갖 실질적인 일들을 하고 주인들은 고상한 형이상학과 철학을 논했던 시대였다. 일반론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와 원리를 논하는 주인들의 일은 가치있는 일이 되고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일은 노예의 일이었다. 듀이는 오늘날 인간문명이 만들어 내고 있는 착취의 참상은 실은 우리가 가진 철학적 문제에서 그 기원을 가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한가지 또 지적해야 할것은 우리 모두가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인식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잠재적으로 문제를 만들고 있다. 안에서 고통없이 우리를 죽이는 암처럼 말이다. 고통은 해석의 문제, 철학의 문제다. 우리는 국가를 위해, 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기꺼이 죽거나 엄청난 고통을 겪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겸허하게 우리자신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이 고통속에 있는 것은 실은 우리가 악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는 선이라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는 어떤 것때문에 일어나고 있을수 있으며 우리는 그런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 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백성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지는 삶의 고통은 애초에 군주제가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의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뭘 상식으로 알고 있을까.
철학의 재구성
이렇게 생각해 보자. 누가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증명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걸 공사현장에서 써보니까 확실히 맞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굳게 믿게 될 것이다. 설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정리의 증명이 엉터리라도 실제 써보니 옳기때문에 그 증명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며 실은 둥근 지구표면에서 엄청난 크기의 삼각형을 지표면위에 그리면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 같은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듀이는 우리가 통상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결과적인 검증을 통해서만 보장이 되는 것들일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논리는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를 축소하고 오직 현장해서 써보니 옳더라는 것만으로 통해서 믿게 되는 것일뿐 진짜 증명이나 자명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실존하는 실체는 어떤 보편관념만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이고 보편적 관념에 포함되지 않는 무수한 측면을 가진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두 명의 사람을 말할때는 우리는 그 둘 다를 사람이라는 범주안에 넣고 일반화를 하지만 사실은 어느 한사람도 꼭같은 사람이 없다. 우리가 그렇게 찾아헤매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절대적인 원리, 법칙은 일반화를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 일반화 과정이 실은 보장될 수 없는 허구라는 것이다.
또하나 듀이가 아주 강조하는 것은 인지과정 혹은 지성의 되먹임이다. 고래로부터의 철학에 있어서 인식론은 중요한 문제인데 거기서 가정되는 것은 수동적 환경의 인식이다. 즉 어떤 감각적 신호가 외부에서 주어지면 내적 지성이 그것을 분류하고 해석한다. 안과 바깥이 구분되었는데 안쪽이 어떻게 바깥쪽을 인식할수 있는가라는 관념론적 의문에 칸트등은 어떤 선험적 오성, 절대적 지성을 등장시켜 인식이 가능해 지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듀이는 실은 인지과정은 그렇게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 되먹임을 가진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우리가 보기로 선택한 것을 본다. 그리고 그렇게 본 것에 기반하여 행동을 취하고 그 행동은 우리의 감각신호를 발생시키는 환경을 변화시킨다. 즉 환경과 관찰자는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되먹임을 가진 존재로 얽혀 있다. 안과 바깥이 상호순환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이원론적 분할로 안과 바깥이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던 전통적 사고가 만들어 내는 인식론적 문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전통적 과학의 한계, 우리 개인의 중요성을 다시 각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한계를 인식하면서 과학을, 철학을 재구성할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공간속에 절대적인 진리대신에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을 망각하지 않는 철학이다.
맺는 말
듀이는 철학이 가지는 가치는 당세적인 환경하에서 판단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언뜻보면 그저 소크라테스나 베이컨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혁명들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위의 논의들도 어떤 면에서는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환경하에서 결핍된 것을 느끼고 행동한 것이다. 그들은 비대해진 권위하에서 인간을 구원한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철학의 재구성이 요청된다는 듀이의 지적은 그만큼 오늘날 우리는 또다시 비대해진 권위하에서 신음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철학은 재구성될 필요가 없다. 그 비대해진 권위라는 것은 그럼 어디에 있을까. 그것들은 국가에 있고, 금융시스템을 비롯한 경제시스템에 있으며, 교육시스템에 있다. 우리는 기성의 패러다임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어쩔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봉건체제에 의해 고통받으면서도 왕의 지배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길에서 노숙자가 얼어죽었다거나 수많은 아이들이 입양되어 수출된다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실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시간을 소모하면서 죽을 날만 기다린다거나 하는 일이 어쩔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멜서스가 빈민의 비참함을 지배하는 '사회적 법칙'을 논한 이래 생겨난 일이다. 우리는 그만큼 억압되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더이상 우리앞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무기력을 느낀다. 우리는 이 비극들이 그저 법칙의 결과이며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법칙은 종종 인간이란 이기적이것이라 이러저러하게 움직인다는 가정하에서 도출된것이다. 즉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법칙을 제시하고 그것을 믿고 다시 그대로 행동하면서 그 법칙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을 만들어 내는 악순환속에 있을 때가 많다. 우리는 경쟁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이란 결국 돈이나 음식을 소모하는 기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돈이면 행복한게 인간이다.
서구의 중세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실질적으로 캐톨릭 신부들뿐이었다고 한다. 글을 못읽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신부들은 뭐든지 하면서 이것이 성경에 씌여져 있는 신의 뜻이라고 하면 그것이 법이 되었다. 무식하고 신앙적인 농부들이 불쌍하게 착취당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것은 뻔한 것이다. 오늘날 돈잘버는 좋은 직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도대체 초중고를 거쳐서 대학이며 대학원까지 이르는 동안 우리는 뭘 배우는가. 인간은 모든 환경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 그런 일반론적인 면에서 배우는 것을 제외하면 또 집에서 독서하거나 독학할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배우는게 없다. 돈을 천문학적으로 써야하고 오히려 진정한 배움에서 차단된다. 돈내고 세뇌당하고 돈내고 자기시간을 빼앗겨서 공부할 시간이 없다. 학교는 점점 더 오히려 세상과 우리를 분리하기 위한 수용소가 되어가고 있다. 학교에 적응할 수록 세상에서 살기 힘들어 진다. 그러면서도 학교는 중세의 신부들처럼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그 시스템은 실질적으로 누군가의 배움을 돕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비기득권층을 착취하고 탈락시키기 위한 장벽에 가깝다. 말잘듣는 로보트로 교육하거나 아니면 결국 너는 왜 탈락할수 밖에 없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비대해진 권위가 아닌가.
부동산거품이나 주식놀음을 보라. 집의 가치와 집값은 따로 논다. 회사의 가치와 주가도 따로 논다. 우리는 그것도 어쩔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문학적으로 돈을 써대는 정부와 복잡해진 법체계를 보라. 이 전체 시스템을 보면 결국 거대한 권위뒤에서 서구중세의 농민을 착취하던 신부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법체계를 뚫지 못해서 제 몫을 찾지 못하는 개인은 중세의 문맹자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 부동산이건 주식이건 경제적 거품은 실질적으로 돈을 마구 펑펑 찍어내는 공장이며 그 덕분에 그저 열심히 일하는 소시민은 착취당하고 만다.
우리는 대개 그래도 우리가 진보했으며 과거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닭공장을 구경한 사람은 오늘날의 닭이 백년전의 닭보다는 행복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농가의 마당에서 돌아다니면서 크던 닭은 이제 좁디좁은 닭장안에서 강제적으로 크고 도살되어 마치 생명이 아니라 신발이나 모자같은 공산품처럼 생산된다. 오늘날 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평생 일해도 다 갚기 어려울 정도로 빚을 지고 태어난다. 그 아이가 대학졸업장을 얻을 때까지 들여야 하는 교육비와 결혼해서 들어가 살아야 하는 집을 구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돈이 수억이나 되기 때문이다. 본래 부자집에 태어난 경우가 아니라서 빚으로 그런 것을 통과하는 사람은 그 빚에 대한 이자로 자신의 인생을 온통 탕진하고 만다. 유치원때부터 입시경쟁을 벌이며 치열하게 한시도 쉬지 않고 컨베이어 벨트위를 달려간 인생은 기득권의 경우가 아니라면 과도한 업무로 중년에 과로사 하기전까지 긴장의 연속일 뿐이다. 그렇게 일해도 왠지 빚이 많고 가정은 엉망이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의 머리는 세뇌되어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건 어딘가 매우 똑똑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자체가 세뇌다. 그런 질문은 똑똑한 사람만 던지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어려운 질문도 아니다. 그게 어려워 보이는 것은 잘못된 패러다임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기 때문이다. 바로 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왕국의 백성이나 신의 목소리는 똑똑한 신부만 알 수 있으며 우리는 무식하고 천해서 그런 것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서구 중세의 농부가 그렇듯이 말이다.
세상이 이럴 필요가 없다라는 것, 인간이 인간을 믿고, 각 개인의 감정과 느낌을 소중히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모두가 믿는 사회가 된다면 거기에는 인간적인 과학이 있을 것이다. 그 과학은 오늘날의 과학과는 다르다. 그것은 지금보기에 종교처럼 보일지 모른다. 지금의 과학도 나 혹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한다. 마찬가지로 그 과학도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할 것이다. 다만 일반화되고 절대적인 누군가를 찾기보다는 혼돈된 환경과 결합하고 행동하고 인식하고 있는 여기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고 인간들이 어떻게 소통하고 살 수 있는가에 강조점이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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